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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무덤이 있는 마을 소영자(小营子)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상전벽해의 변화속에

  • 2009-06-16 15:26:50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연길은 알아도 연길동쪽 외곽의 소영자를 아는 외지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소영자라는 지명이 연길보다 훨씬 앞섰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더구나 가물에 씨앗나듯하다.

소영자는 옛 지명으로서 지금은 소영촌이라고 불리우는데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7킬로메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나지막한 산기슭을 따라 내처 몇킬로메터 쭉 이어진 촌락은 그대로 띠모양을 이루고있다.

청나라때 봉금(封禁)이 해제되기전에 연길의 벌은 무인지대였다고 한다. 이 벌에 조선반도와 중국내지에서 찾아온 이주민이 보이기 시작한것은 19세기말이였다. 1880년대초, 소영자에는 30여가구의 만족과 조선인이 살았다고 전한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오늘의 소영자동쪽인 계동(溪洞) 기차역의 부근에 군영을 앉혔는데 이 작은 군영으로 해서 얻어진 촌락의 이름이 바로 소영자라고 한다.

연길시내의 동쪽에서 소영자로 포장길을 따라 갈수 있고 산행이 취미라면 산등성이를 가로탄 흙길을 따라 갈수 있다.


천년의 촌락


불과 30년전만 해도 소영자와 연길시내 사이에는 황량한 들이 가로누워있었다. 그래서 밤길을 걷는 사람들은 종종 귀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흠칫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촘촘하게 들어앉은 살림집들은 물론이요, 또 공장건물까지 가세해서 오히려 귀찮도록 분주한 경상이다.

사실 소영자에 인가가 들어선것은 3000년의 긴 세월을 거슬러 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일찍 연길지역에는 예맥족계통의 옥저(沃沮)인들이 주요한 거주자로 있었다. 그들은 소영촌 제10촌민소조의 유적을 포함, 많은 유적들을 연길시 주변에 남기고있다. 그러나 소영자에서 유적지를 찾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동네 어른을 붙잡고 물었더니 대답대신 물음이 날아왔다. “뭐? 고대유적지요? 우리 마을에 그런 게 다 있어요?”

후문이지만 소영자의 토박이는 박씨, 윤씨, 황씨, 장씨 등 성씨의 가족이였다. 아쉽게도 토박이 로인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고 후대들도 거의 모두 본고장을 떠나고 없었다. 동네 좌상이라고 할수 있는 60대의 사람들은 거개 소영자의 유래마저 잘 모르고있었다.

소영촌 제10촌민소조 북쪽 골짜기에 있는 유적에서 약간의 토기조각과 오석조각이 발견되였는데 유물이 너무 적어 학자들도 내용물을 뭐라고 판명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다만 모래가 섞인 갈색토기와 흑요석기의 조각으로 미루어 선사시대의 유적지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유적지가 과수밭서쪽에 있다는 기재에 따라 부근 산등성이를 한겻이나 오르내렸다. 무성한 잡초더미에서 이따금 이름 모를 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랐다. 워낙 유물이 적은 이 유적지는 아예 흔적도 찾을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 10년(기원 28년) 고구려는 북옥저를 토벌했으며 연길에서 약 킬로메터 떨어진 훈춘경내에 책성을 두었다. 고구려는 또 연길지역에 성자산산성, 하룡고성, 흥안고성 등을 세운다. 1963년, 성자산 서쪽기슭에 있는 소영자에서 출토된 고구려시기의 쇠솥 등 유물은 이 시기 고구려의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정작 연변에서 고구려시기의 유물은 발견된게 아주 적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 연변지역은 발해국의 중심지역이였다. 연길시 지역에서 발견된 발해시기의 유적지만 해도 10여곳 된다. 이중에는 소영자의 유적지도 들어있다. “연길시문물지”에 따르면 소영자의 발해유적지는 소영촌 제1촌민소조의 서북쪽 산비탈에 있다. 지금은 과수밭에 흔적 없이 묻혀있는 이곳은 성자산산성과 불과 몇백메터 상거, 지세와 유물 특히 토기의 밑굽기물모양이 발해기물의 특점을 갖춘것으로 미루어 발해시기의 촌락유적지로 추정되고있다.

천년의 촌락은 그대로 일장 연대기를 적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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