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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 전마의 비석

  • 2016-03-14 08:51:29

그런데 전설에 등장하는 전마는 분명 이 고장에 다시 나타나고있었다. 오랑캐와 싸우던 장수의 이야기가 두만강기슭에 영화처럼 재현되였던것이다.

1920년, 홍범도(洪范图)장군 등이 인솔한 독립군이 일본군의 대대병력을 대파한 봉오동전투는 바로 이 마패촌에 도화선을 묻고있다. 봉오동전투는 청산리전투와 더불어 우리민족의 독립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과이다.

봉오동전투는 발생 사흘전 즉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삼툰자전투에서 비롯된다. 삼툰자는 우리 말로는 세 동네라는 의미로 오늘의 마패촌 7대이다. 19세기 중반, 함경북도 삼봉일대에서 월강한 김씨, 박씨, 최씨 성의 세 일가가 이곳의 첫 개척자였다고 한다. 그후 한가구 두가구 차츰 늘어나면서 나중에 상촌, 중촌, 하촌 등 세 동네를 이뤘던것이다.

삼툰자는 강이 흐르는 협곡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우리 말로 또 “사이벌”이라고 불리며 중국말로 옮기면서 또 “간평(间坪)”이라고 불린다. 사이벌은 함경도 사투리로 와전되면서 또 “새불”이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바로 4일 새벽 독립군 소부대가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했던것이다. 이때 일본군 2개 중대가 이를 보복하려고 독립군 추격에 나선다. 그들은 나중에 삼툰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애꿎은 민간인을 무차별 살륙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삼툰자부근의 범진령 산기슭에서 매복하고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한다.

이에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하고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으로 진격하며 이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린 봉오동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것이였다.

이때 매복전이 벌어졌던 범진령은 두만강 기슭에서 회막골(도문)에 이르는 고개이다. 마패에서 회막골에 이르는 골짜기는 도합 네개 있는데 범진령은 제일 북쪽의 골짜기를 타고있다.

범진령이라는 이 이름이 파다히 알려진건 단지 독립군의 매복전때문이 아니다. 범진령에는 또 전설 아닌 전설이 전해지고있었다.

예전에 마패에는 명포수로 알려진 김씨성의 포수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김포수는 산에 올랐다가 바위아래에서 먹이감을 놓고 희롱하는 범을 발견했다. 김포수가 총을 쏘아 범을 잡고난 뒤 보니 그 먹이감은 놀랍게도 혼절한 웬 처녀였다. 처녀는 한참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알아보니 처녀는 강 맞은쪽 함경북도의 어느 산골에서 살고있었다. 그날 새벽에 밖에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그만 범에게 물려왔다고 했다. 그때 범은 이처럼 강 건너 멀리까지 사냥을 다녔던것이다.

그후 처녀는 김포수의 집을 드나들면서 “큰집”으로 삼았다. 그들은 지난 세기 60년대 중반까지 왕래를 하다가 중국에서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래왕이 끊겼다고 한다.

현지에서 전하는 이 이야기는 판본이 여러개 되지만 모두 범이 소굴 범진령에 물고 온 함경도의 처녀를 마패마을의 포수가 구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있다.

범진령은 이토록 범이 진을 치고있기로 소문이 높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시말하면 범이 출몰하고있는 산이라는것이다. 일각에서는 범도 맥이 진하게 넘는 고개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어쨌거나 범진령은 또 노래까지 생겨나 더구나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지난 세기 70년대 삼툰자에는 여느 농촌마을처럼 하향지식청년들이 진주(进驻)하고있었다. 하향지식청년은 지난 세기 50년대부터 70년대말까지 중국에서 자원 혹은 부득불 도시에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으로 된 청년들을 말한다. 그들은 대부분 초중이나 고중 교육밖에 받지 못했는데 약 15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있다.

그때 삼툰자의 하향지식청년들은 노래 “여량수레 령 넘어가네”를 노상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이 노래는 1964년 연변예술학교 학생들이 여량수레를 몰고 범진령고개를 넘으면서 만든 작품이다. 듣기에 따라 곡조가 흥겨울지 몰라도 거기에는 시골에 잡초처럼 묻힌 꽃다운 청춘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비껴있다.

“범진령 십리고개 청줄 마대 박아싣고 여량수레 줄을 지어 흥겹게 령 넘어가네.…”

잠간, 여량수레라고 하니 누군가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국어사전》의 해석에 따른다면 여량은 수레나 말이 다닐수 있는 나무다리를 말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연변에서는 이와는 달리 여유식량이라는 의미의 “여량(余粮)”을 뜻한다. 중국말 그대로 옮겨놓았기때문에 얼토당토 않은 결과가 빚어지고있는것이다.

범진령 역시 중국말로 지명을 옮겨 적으면서 난데없는 번진령(翻进岭)으로 둔갑하였다. 졸지에 뭔가 뒤집히면서 들어가는 이상한 고개로 된것이다. 이처럼 더는 시초의 범의 고개가 아니여서 그럴지 모른다. 범진령의 고개에는 범의 포효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고있었다.

솔직히 범진령의 “범이 처녀를 물고왔던 이야기”도 마패의 “전마의 비석”처럼 언제인가는 한낱 전설로 전해지지 않을가 우려되였다.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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