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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양림과 회리현성에 나타나

  • 2016-08-22 08:04:08

력사적인 회리회의 장소. (사진자료)

군위간부퇀은 3만여명 중앙홍군의 금사강 순조로운 도하를 담보하기 위하여 군위의 명령으로 금사강 북안에서 련속 사자산(狮子山)전투, 통안주(通安州)전투를 벌리며 적들을 여지없이 족치였다. 사천군 제24군 1려 려장 류원당(刘元塘)은 홍군의 간부퇀에 크게 패했다. 패주길에서 패잔병 400여명을 모은 류원당은 한바탕 통곡하더니 밤도와 54킬로메터 떨어진 회리(会理)현성으로 퇴각하였다. 류원당은 급급히 운남 강역(姜驿)쪽으로 파견했던 39퇀을 불러들이고 통안에서 패한 29퇀 잔여부대를 끌어모았다. 서창(西昌)에 진을 친 국민당 천강변방군(川康边防军) 사령 류원장(刘元璋)도 섭추함(聂秋涵)의 퇀을 회리로 급파하니 회리현성을 지켜선 적병력은 3개 퇀을 이루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모택동은 금사강 북안의 사천쪽 바위동굴에서 팽덕회에게 직접 회리현성을 포위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가장 좋기는 회리성을 공략하는것이고 공략할수 없으면 적들을 성안에 몰아넣고 그자들이 성밖으로 나와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뜻인즉 적들을 성안에 겹겹이 포위하여 성밖에 나와 휴식하는 홍군부대나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교란하지 않으면 된다는것이였다. 장기적인 행군과 작전에 시달린 홍군대오는 필요한 휴식과 조절이 필요하였다.

중앙군위는 중앙홍군을 통솔하여 금사강변과 통안주를 떠나 회리현성으로 진군하면서 팽덕회가 이끄는 3군단을 전위부대로 하고 사자산전투와 통안주진공전에서 용맹을 떨친 간부퇀이 3군단을 따라 행동하도록 하였다. 5월 8일 간부퇀은 3군단과 함께 회리현성밖에 이르렀다. 장정길에서 흔치 않은 홍3군단 무정과 군위간부퇀 양림이 한 전투에서 싸우는 감동적인 현실이 펼쳐진다. 5월 9일에는 무정과 양림 모두 소속 부대를 따라 회리현성밖의 동산사(东山寺)와 서래사(西来寺) 등 감제고지(制高点) 점령에 나서면서 회리성에 대한 포위 형성에 뛰여들었다.

“무정아우, 우리 사천땅 회리현성에서 다시 만났구만!”

“필사제형, 다시 만나는군요.”

“시간이 빠르기도 하지. 우린 준의 루산관전역에서 같이 싸웠더랬는데 오늘은 금사강 넘어 회리현성에서 또 만나니.”

“글쎄요. 사제형네 군위간부퇀이 금사강천험을 열어제끼구, 형이 직접 소속 간부퇀을 이끌구 사자산, 통안주전투를 멋들어지게 치렀다는것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나도 무정아우가 3군단 포병부대를 이끌고 잘 싸우고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고있소. 우리 이번에도 잘 싸워보자구.” “네. 잘 싸우다뿐이겠습니까, 그깟놈들을 이 무정이 박격포로 쓸어버릴텝니다.”

언제 보나 무정은 시원시원하고 통쾌한 사람이였다. 무정은 습관조로 가슴을 치면서 필사제로 통한 양림형의 두손을 꽈악 잡아주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회리현성이나 성안의 적들은 그렇게 노긋노긋하지가 않았다.

회리현은 사천성 서남부, 금사강 북안에 위치한 량산이족자치주(凉山彝族自治州)의 한개 현이다. 사천성지도를 보면 운남성 사이를 꿰고들면서 사천성의 지구급시인 판즈화(攀枝花)시, 린근현인 회동현(会东县)과 더불어 사천성의 최남단지구를 이루고있다. 력사가 유구하여 4000여년전에 인류가 이 땅에서 활동하였고 상조와 서주를 거쳐 전국시대를 이루는 그 시절에 벌써 이곳은 서남 공도국(邛都国)의 땅이였다고 한다.

서한 원정 6년(元鼎六年,기원전 111년)에는 이 땅에 회무(会无), 삼강(三绛) 2개 현을 설치함을 보인다. 당태종(唐太宗) 정관 8년(贞观八年, 634년)에는 화집현(和集县)을 설치하고 당 천보(天宝)년간에는 회천도독부(会川都督府)를 세워 500여년을 지속한다. 원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2년에는 회천로총관부(会川路总管府)를, 명 홍무(明洪武) 15년(1382년)에는 회천로를 개명하여 회천부를, 청 강희(清康熙) 원년(1662년)에는 건창감리청(建昌监理厅)에 예속된 회천위군민수비(会川卫军民守备)를 두었다.

력사의 흐름속에서 회리지구는 강희 29년에 회리주가 설치되였다가 민국 2년에 현으로 개칭된다. 민국 24년에는 제18행정독찰구에 예속되고 민국 28년에는 서강성(西康省)에 예속됨을 보인다. 1950년 3월 회리가 해방된후 처음 서창전구(西昌专区)에 예속되고 다음 량산주에 예속(1978년)되는 력사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같이 회리는 문자에 기록된 행정설치력사만도 21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다.

1935년 5월 10일 밤, 홍군 제3군단은 회리성에 대한 진공을 개시하였다. 제3군단 지휘부는 성밖 경장묘의 대전(景庄庙大殿,지금의 회리 제2중학교)에 설치되고 10퇀이 성을 에워쌌다. 무정의 포병련이 박격포포격으로 길을 열면서 11퇀과 12퇀이 진공전에 뛰여들었다. 삽시간에 등불이 환하던 성우와 성아래는 기관총소리, 보총소리, 박격포 소리,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로 뒤죽박죽이였다.

이날 밤, 제3군단의 주공방향은 성의 동북쪽이다. 11퇀의 폭파조는 전 퇀의 강대한 화력의 엄호하에 신속히 성벽 한곳을 폭파하여버렸다. 수십명 돌격대원들이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성벽에 올라 적들을 제압하고 붉고 푸른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러나 후속부대가 다달을 때 돌격대를 지원하는 포병련의 박격포탄 한발이 불행히도 돌격대의 진지를 잘못 들부셨다. 그사이 적들이 마구 밀려들어 홍군은 다시 돌격대를 조직할 겨를이 없었다. 3군단 소속부대는 부득불 회리성 진공을 멈출수밖에 없었다. 회리성은 내외 두개 성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성은 크고 외성은 작은편이였다. 특이한것은 내외성 모두 완전하고 두텁고 높은데서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어려운 군사요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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