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라이프

민족의 전설,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리함

  • 2016-11-21 08:19:36

사천성 소금현 량하향(小金县两河乡)소재지에 자리한 “홍군장정 량하구회의기념관”.

장국도 이 사람

1935년 6월, 중앙홍군 제1방면군과 제4방면군의 무공회사는 중국로농홍군력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 일대 사변이였다. 제4방면군의 홍군장병들이 8만여명을 이루는데서 제1방면군까지 합치면 홍군력량은 대번에 10여만명으로 늘어나게 된다.그러나 무공회사에는 홍4방면군의 주력부대와 4방면군 지도자 장국도가 참가하지 않았다.

6월 16일, 당중앙과 중앙군위에서는 아직 만나지 못한 4방면군 지도자 장국도에게 전보를 보내여 천섬감(川陕甘)혁명근거지를 건설할 당중앙의 의견을 알렸다. 6월 18일 중앙홍군 전부가 무공, 량하구 일대에 집결하게 되자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에서는 6월20일 장국도에게 무공에 와서 만나자는 전보를 보냈다. 6월 26일에는 장정도중의 무공과 마얼캉(马儿康) 사이의 량하구(两河口)에서 장국도의 참석하에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1, 4방면군 회사후의 전략방침에 관한 결정”(关于一、四方面军会合后战略方针的决定)을 지었다. 장국도는 겉으로는 이 결의를 따르는체했지만 뒤에서는 완전히 딴판이였다.

홍4방면군 장병들에게는 중앙홍군과 모택동동지는 선망의 대상이였다. 그런데 무공현성과 량하구에서 두 주력홍군이 회사하고보니 중앙홍군은 원래의 8만여명으로부터 3만여명으로 줄어있었고 장정길에서 거듭 혈전을 헤쳐오면서, 숱한 천험과 대설산을 넘어오면서 복장이나 차림새가 흐트러져 보였고 많이 피곤해보였다. 이와 달리 홍4방면군은 가장 발전하는 시기에 처하고 병력도 8~9만명에 달하고 생기로 넘치고있었다. 그러니 장국도 이 사람은 장정길을 이어온 홍1방면군-중앙홍군을 념두에 두지도 않으면서 청해나 신강, 서강(西康)쪽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었다.

6월 26일 무공이북의 량하구회의-정치국 확대회의에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와 정치위원 양상곤도 참가하였다. 팽덕회와 양상곤은 회의에서 당중앙에서 확정한 북상전략방침을 견결히 받들면서 홍군을 남으로 이동하여 먼저 성도(成都)를 치고 다음 천강변(川康边)에 근거지를 건립해야 한다는 장국도의 오유적주장을 반대하여 나섰다. 량하구회의에 참가한 팽덕회는 군단 지휘성원들과 참모 무정과 장국도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기에 주의를 돌려야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량하구회의후 팽덕회는 량하구회의 결의ㅡ“1, 4방면군 회사후의 전략방침에 관한 결정”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 제정한 “송번전역계획”(松潘战役计划)에 따라 양상곤과 함께 홍3군단을 이끌어 계속 북상길에 올랐다. 무공에서의 3~4일간 휴식정돈을 거치며 피로를 푼데서 홍군장병들의 정서가 대단히 부풀어올랐다. 무정도 정서가 잔뜩 부푼 중앙홍군속의 한 사람이였다.

북상하는 홍군대오는 량하구를 지나 마얼캉(马儿康)으로의 행군을 개시했으나 먹는 문제가 전에 비해 뚜렷한 문제로 나섰다. 홍군은 행군의 연도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하나 볼수 없었고 중국인 하나 볼수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장족거주지들인데 장족동포들은 국민당반동파의 악렬한 선전공갈과 사천군벌, 지방 반동분자들의 위협에 눌리워 숨어버리지 않으면 달아났다. 홍군은 식량과 소금 등이 동강났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구할수가 있어야지, 하루 두끼의 청과와 강냉이, 메밀, 고구마 등도 아침에 먹으면 저녁은 담보할수 없어 흔히 하루 한끼 먹기가 일쑤였다.

현지답사에 의하면 무공이라고 하는 소금현성으로부터 북으로 마얼캉까지 137킬로메터 거리이다. 량하구에서 마얼캉까지는 62킬로메터라지만 량하구에서 마얼캉까지 가자면 협금산과 비슷한 또 하나의 대설산-몽필산(梦笔山)을 넘어야 했다. 주어진 환경이 이같이 험악하고 먹을것이 문제인데 행군연도에서 국민당반동파와 지방 반동분자들의 위협선동을 받은 일부 장족인들이 홍군의 행군을 막아나서거나 행군중의 홍군에 대해 헛총질을 해대는데서 홍군의 선견부대라도 일주야에 마얼캉을 8킬로메터 앞둔 쭤커지에도 이를수가 없었다. 대오를 떨어진 개별적 홍군전사들은 장족인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 고장 장족동포들은 워낙 한인들과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거듭하는데서 홍군대오도 그렇게 인식하고있었다.

이런 엄혹한 환경속에서 무정은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도중의 두번째 대설산 몽필산을 넘어 몽필산의 쭤커지(卓克基)에 이르렀다. 장국도는 홍4방면군 총부가 자리잡은 잡곡뇌(杂谷脑, 오늘의 理县)로 돌아가고 중공중앙에서는 왕가상(王稼祥), 리부춘(李富春), 류백승(刘伯承), 리유한(李维汉) 등으로 구성된 위문단을 홍4방면군 부대에 파견하여 중앙의 결정을 시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장국도는 중앙위문단 활동에 대해 백방으로 저애하고 봉쇄하면서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 홍군을 통일적으로 지휘할 조직문제(统一指挥的组织问题)를 제기하였다.

무정소속 홍3군단은 모택동, 주은래 등 중앙종대를 따라 마얼캉부근의 쭤커지(克基卓)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후속부대들이 따르지 못하는데서 쭤커지동쪽의 사마(梭磨)에서 이틀간이나 머물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하늘은 무정하지만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무정소속부대가 중앙종대를 따라 사마를 떠나 35킬로메터 밖 마탕(马塘)과 그다음 타고(打鼓)를 바라고 나아가는데 사마를 지난 구간의 청과(青果)가 담황색을 띠기 시작하여 억지로라도 먹을수가 있었다. 홍3군단은 형제부대들과 함께 굶주림을 이겨내기 위하여 담황색 청과를 거둬들이는 한편 도처에 홍군을 파견하여 장족동포들을 찾아 귀가하도록 하면서 마땅한 대가를 지불해갔다.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