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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련군 장령 김석봉의 출현

□ 리함

  • 2018-03-26 0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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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월, 주보중 장군이 지도하는 동북반일련합군은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재편성되면서 그 주력부대가 녕안땅을 떠나 중동철도 북부(中东铁路道北)로 전이하게 된다. 전편에서 이미 밝히다싶이 이때를 앞두고 5군에서는 군부 직속 부녀퇀을 조직하였는데 동북의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에서는 그 시절이나 그 후를 막론하고 유일무이한 부녀퇀이였다.

갓 조직된 항일련군 제5군 부녀퇀은 조직된 후 일정한 기간내에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5군 제1사와 5사의 여러 부대들에 소속되여 활동하였다. 한데서 1936년 여름 5군 직속부대로 군부를 따라 목릉, 림구 등지로 전이할 때의 부녀퇀 녀전사는 10여명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를 두고 제5군 부녀퇀 녀전사였던 서운경(徐云卿)은 자기의 항일련군회고록ㅡ《영웅적 자매》(英雄的姐妹)에서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때 부녀퇀의 일부 동지들은 마침 군부를 따라 로근거지 녕안에서 삼도통일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내가 갔을 때 그들은 마침 목릉 라복교외에 주둔하고 있었다. 군부에 소속되여있는 부녀퇀 전사들은 열몇명밖에 안되였다. 이 열몇명 전사들중에 대장인 왕옥환(王玉环)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제2군에서 넘어온 조선족 녀전사들이였다.


서운경의 회고록 중문은 항일련군회고록 《영웅적 자매》로 되여 길림인민출판사에 의해 1960년 4월에 제1차로, 1978년 11월에 제2차 인쇄되였다. 1980년 3월 그 시절의 ‘료녕인민출판사’에서는 서운경의 중문회고문을 조선문으로 번역출판하면서 책이름을 《항일련군의 영웅적 자매들》로 고치였다. 이 책의 19페지에서 서운경은 부녀퇀 설립 시초를 알리여 귀중한 력사자료를 남겨주고 있다.

서운경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목단강류역에 자리잡은 림구현의 어느 산간마을 출신으로서 굶주리고 헐벗은 생활을 하여왔다. 그러던 1935년경에 서운경이 사는 마을에 40여세에 나는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알고 보면 이 사나이는 제5군 군부 부관인 서씨였다. 서씨의 활동으로 이 마을에는 항일구국회와 항일부녀회가 조직되고 항일구국 아동단이 조직되였다.

서운경은 항일구국 아동단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7월에 제5군 부녀퇀에 가입하였다. 서운경이란 이 녀전사로 하여 항일련군 5군 부녀퇀의 많은 활동내막이 알려지며 훈춘현유격대 출신인 주신옥과 최순선의 활동륜곽이 일부 알려진다.

5군 부녀퇀이 군부를 따라 활동하던 1936년 9월 24일, 녕안 천안두(泉眼头)에서 2군-5군간부회의ㅡ천안두회의가 열리였다. 천안두회의는 항일련군 제2군이나 제5군 그리고 제5군부녀퇀 연구에서 자못 중요한 회의로서 이 회의에 조선인 항일련군 장령 김석봉이 참가함을 보인다. 김석봉은 1938년 ‘팔녀투강’ 소속 부녀퇀을 직접 거느린 분으로서 제5군 부녀퇀을 알자면 김석봉을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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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련군의 력사를 펼치면 항일련군의 장령으로 활동한 조선인 영웅인물들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는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요책임자, 항일련군 제2로군 비서장, 항일련군 제5군 1사 참모장으로 활동한 김석봉도 있으나 항일련군 연구가들은 어인 영문인지 김석봉에 대하여 마땅한 주의를 돌리지 않고 있으며 항일련군 장령대오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다.

오늘에 와서 김석봉에 대하여 잘 알수는 없으나 항일련군에서의 활동자료가 가담가담 드러나고 있어 그런대로 대략적이나마 발자취를 추적할 여지는 남겨지고 있다.

지금까지 관련 연구자료를 보면 김석봉은 그 래력에 관한 자료는 보이지 않으나 1887년생이고 쏘련의 동방대학에서 공부를 한 지식인으로서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세련된 혁명가임은 분명하다. 김석봉이 어디서 어떻게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지만 1936년 9월 5군군부 류수처 부주임으로,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 등장하여 주의를 끌기도 한다. 그만큼 김석봉의 발자취는 모두 항일련군 제5군과 이어지며 제5군의 시초 활동무대인 녕안현으로 모아진다.

필자가 팔녀투강의 조선족 녀전사인 리봉선 렬사 전기에서 이미 밝히여 보았지만 동북항일련군 제5군의 력사는 수녕(绥宁)반일동맹군,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동북항일련군 제5군이란 3개의 발전변화 시기를 거치면서 흘러온다. 첫번째 발전시기인 수녕반일동맹군 구성은 1934년 2월의 일이고, 그해 12월에 녕안반일유격대 등과 함께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으로 개편된다. 그때의 주요활동지는 녕안현 경내였다. 그에 따라 자료연구로부터 보는 김석봉의 5군 등장은 녕안현으로부터 시작된다

1935년 4월 이후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은 동부파견대, 서부파견대, 녕안류수부대 등 세갈래로 나뉘여져 새유격구 개척에 나섰다. 1936년 2월에는 주보중 장군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재편성되면서 그 주력부대가 중동철도 북부(中东铁路道北)를 넘나들면서 활동하게 되였다. 그런 와중에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갔다.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서던 1936년 9월 24일 녕안현 천안두(오늘의 宁安市江南乡泉眼村 동쪽 1킬로메터 되는 곳)에서 길동-동만지구 당조직과 항일련군 제2-제5군당위 특별회의ㅡ천안두회의가 열렸다. 회의참가자들로는 5군측에서 주보중, 장중화(张中华,제5군 정치부 주임), 김석봉…등이고, 2군측에서 왕윤성(王润成, 제2군 2사 정치위원), 진한장(陈翰章, 2군 2사 참모장), 후국충(侯国忠, 2군 2사 4퇀 퇀장)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3

천안두회의는 5군 군장 주보중이 제5군 군부와 교도퇀 제1, 제2대를 지휘하여 계속 북진하면서 먼저 중동로 동쪽 북쪽지구(中东路东段道北地区)로 진출한 5군 제1, 제2사와 회합하기로 하고, 5군 부분적 부대와 2군 2사로 도남 류수부대(道南留守部队)를 결성하여 수녕지구의 로유격구에서 투쟁을 견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석봉 관련 회의 결의는 또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새로 조직하는 항일련군 제5군 녕안류수처(宁安留守处)가 도남(道南)에 남은 2군과 5군의 류수부대를 통일적으로 지휘하기로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길동지구의 녕안현위와 동만지구의 동부 현들로 중공도남특위를 구성하여 중동로 동쪽 도남(中东铁路东段道南)의 수녕지구와 액목(额穆),돈화, 왕청, 훈춘, 연길 등지의 당의 조직과 각지 항일련군부대 및 남호두(南湖头)의 교통기관을 지도하기로 한 것. 따라서 장중화가 5군류수처 주임과 중공도남특위 서기로, 김석봉이 5군류수처 부주임과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5군 군부가 5군주력부대에 이어 중동로를 넘어 북진한 후 장중화와 김석봉은 류수부대로 남은 5군 경위영과 5군 1사 제3퇀, 2군 2사 5퇀의 제3련 등 부대를 지휘하면서 녕안현의 제4, 제7,제8구 등지에서 기동령활한 유격투쟁을 벌리였다.

1936년말에는 류수부대를 이끌어 중동철도 북쪽의 액목현에 감쪽같이 진출하였다. 그리곤 진한장이 이끄는 2군 5사 부대와 회합하고 ‘구참’(九站), ‘구표’(九彪) 등 반일산림대와의 련합으로 대마구(代马沟)에서 일본군과 위만군의 군용렬차를 습격하여 일본군 105명을 격사하고 70~80명을 격상하는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렬차에 앉은 위만군 부대에 대해서는 ‘중국사람이 중국사람과 싸우지 않는다’는 구호를 선행시키면서 총한방 쏘지 않고 그들의 무기를 전부 해제하였다.

5군류수처 부주임과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서의 김석봉의 모습이 잘 알려진다. 김석봉은 실상 항일련군과 당내에서의 직무가 더욱 높아 항일련군 제2로군 비서장과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그중 제2로군 비서장으로서의 김석봉은 아직 알려지는 자료를 찾지 못했으나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으로서의 김석봉은 길동성위 비서처 녀전사였던 왕일지(王一知)의 회고문ㅡ<중공길동성위 비서처에서의 나날>에서 잘 보여진다.

왕일지의 회고문은 동북항일련군사료편찬조에서 편찬하고 중공당사자료출판사에서 1987년 12월에 출판한 《동북항일련군사료(하)》에 선참 실리였다. 왕일지의 회고문에 따르면 왕일지가 항일련군 제5군 군부기병대로부터 중공길동성위 비서처로 전근한 것은 1937년 8월 하순이다.

왕일지가 두 기요교통원의 안내하에 의란현 경내 깊은 산속밀영에 자리한 성위 비서처에 이르니 비서처에서는 그날 저녁으로 전문 환영회를 열어 뜨겁게 맞아주었다. 왕일지는 회고문에서 비서처의 동지들은 모두 12명이였다면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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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 비서처는 도합 12명으로서 비서처 요신일(姚新一)은 실제상 총편집이고 비서처 주임 김석봉은 조선문 총편집이였다. 비서로는 서걸(胥杰), 전창철(全昌哲), 김동식(金东植), 왕일신(王日新), 왕일지. 이 밖에 사업일군 박××이 취사를 관리하고 김영남(金永南)이 잡일과 교통련락을 관리하였다.”

비서처 주임은 김석봉이고 중문, 조선문 총편집은 주임의 지도를 받았다. 왕일지는 이 밖에 항일련군의 자제들인 풍만상(冯万祥, 11살)과 고전민(顾全民, 9살)그리고 중공남만성위와 북만림시성위, 지방당조직을 련락하는 4명의 교통원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길동성위 비서처의 주요한 과업은 《구국주보》(救国周报)와 당내간행물 《전초》(前哨)를 출판하고 식자교과서(识字课本), 정치상식교과서, 자체로 편집하는 혁명가곡, 삐라,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告父老同胞书), 위만군사병들을 대상하는 글(告伪满士兵书), 일본군 장병들을 대상하는 글(告日本官兵书)을 만들고 찍어내는 등등으로 헤아려진다. 이런 신문간행물과 교과서 등은 모두 중국문, 조선문, 일본문 등으로 등사하는데 한장의 등사용지로 1200부를 찍어낼 수 있었다. 비서처 주임이고 비서처에서 책임지고 발간하는 신문의 조선문 총편집인 김석봉은 이런 일들을 책임지고 내밀어야 하였다.

중공길동성위의 설립은 1937년 3월 14일로 알려진다. 이날 북만 방정현의 사도하자(方正县四道河子)5군밀영에서 주보중의 지도하에 당의 확대회의가 열리면서 도북특위를 토대로 중공길동성위가 조직되였다. 신생한 길동성위는 산하에 도남특위와 벌리-목릉-밀산 3개현위(勃利、穆棱、密山3个县委), 항일련군 4군과 5군당위, 8군당총지를 두고 있었다. 1938년 이후에는 하강특위(下江特委)와 항일련군 제7군당위도 길동성위의 지도를 받았다.

중공길동성위는 조직된 후 성위기관으로 성위 비서처를 두면서 5군 류수처 부주임 겸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석봉을 비서처 주임으로 배치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김석봉은 5군 류수처와 더불어 1936년 9월 천안두 회의 이후 중동철도 남부지구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초 이후 중동철도 북부지구로 전이하면서 점차 방정현 사도하자 5군 밀영에 이른 것 같다.

길동성위 비서처의 동지들은 항일련군의 문화일군들로서 그 문화수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주임 김석봉은 쏘련 동방대학 출신으로서 중국어, 조선어, 로씨야어, 일본어 등 4개국 언어를 잘 구사할 뿐만 아니라 서법이나 회화도 제법인 직업혁명가로서 항일련군 제5군의 문화건설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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