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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녀용사들이 투강 뒤 이야기

□ 리 함

  • 2018-06-11 08:55:01


"리봉선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랑이야기가 있다고 전해지니
그 사랑하는 사람은
그 시절 항일련군 제5군 제2사 참모장 왕효명이였다."


8녀 투강 력사현지로 되는 목단강시 림구현 경내를 흐르는 우스훈하.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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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녀 투강 장거 이후 그날 적들의 포위를 헤치고 나간 항일련군 5군 1사에서는 하나의 소부대를 파견하여 우스훈하반의 싸움터를 수습하면서 희생된 전우들의 시체를 찾아 고이 묻어주었다. 그러나 강심에서 쓰러진 여덟명 녀전사의 유체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 여덟명 녀전사 유체를 두고 당년 부녀퇀의 녀전사이고 5군 군장 시세영(柴世荣)의 부인인 호진일(胡真一)이 회고자료를 남기여 귀중한 연구자료로 되고 있다.


강에는 버드나무가 있었다. 하류로 밀려내려가기도 하고 어떤 가방은 나무가지에 걸리였다. 그들은 일어서지 못하였다. 여덟명 녀전사는 하나도 나오지 못하였다. 1사에서 사람을 보내여 찾아도 찾지 못하였다. 강이 곧 얼어드는데다가 부대는 또 원정하여야 하므로 시세영은 부대가 목릉으로 전이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봄에 강물이 녹으니 이들 몇사람은 나무에 걸려있었다. 시세영은 여덟명 동지의 유체를 건져내기로 결정하고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였다. 강변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시세영은 나와 “랭운도 죽었는데 너무 비참하다, 버드나무가지에서 건지였다.”고 말하였다. 그의 심정은 좋지 못하였다. 그때 여덟명 녀전사는 무덤이 있었으나 후에 무덤은 강물에 의해 사라졌다.


호진일의 회고자료로 보는 항일련군 5군 부녀퇀 8녀 투강의 희생 후 소식이다. 다 알다싶이 이들 여덟명 녀전사중에는 조선족녀전사가 안순복과 리봉선 둘이였으니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던 리봉선의 사랑이야기가 알려져 가슴을 뭉클케 한다.

우리는 앞의 련재글에서 8녀 투강중의 하나인 리봉선은 조선족이고 희생될 때 20살이며 흑룡강성 림구현 룡조향(龙爪乡) 사람이고 항일련군 제5군 부녀퇀의 녀전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심한 독자는 리봉선은 또 8녀 투강 가운데서 가장 예쁜 미녀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랑이야기가 있다고 전해지니 그 사랑하는 사람은 그 시절 항일련군 제5군 제2사 참모장 왕효명(王效明)이였다.

왕효명(1900ㅡ1991)은 료녕성 창도현 칠가자향 이하촌(昌图县七家子乡二河村) 사람이고 1955년에 벌써 소장직함을 수여받은 장군으로 알려진다. 1938년 그 시절은 항일련군 제5군 2사 참모장으로서 5군 1사 부대를 따라 행동한 리봉선과 어떻게 사랑을 맺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2017년 8월 1일, 목단강시 림구현 우스훈하강반에 자리한 ‘8녀 투강 옛터 기념관’을 찾기 전만 해도 리봉선 전기를  집필한 필자도 리봉선의 사랑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곳의 ‘8녀 투강 옛터 기념관’을 찾으니 기념관내 8녀 투강 부분에는 여덟명 녀전사가 사진과 사진설명으로 하나하나 소개되여있었다. 리봉선 부분에 이르니 리봉선 화상과 함께 왕효명 사진과 사진설명이 보이여 필자의 주의를 끌었다. 그 후 왕효명에 깊은 주의를 돌리는 가운데서 드디여 왕효명과 리봉선의 사랑관계를 초보적이나마 알게 되였다.


목단강시 림구현 우스훈하 8녀투강유적기념관내 리봉선 화상.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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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효명의 아들 왕민(王民)의 회고자료에 따르면 아버지 왕효명은 리봉선이 희생된 후 다른 녀인을 더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왕효명은 원 5군 군장이였던 주보중에게서 세번이나 ‘꾸중’을 들으면서 새로운 사랑대상을 찾으라고 권고받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효명은 내내 다른 녀인을 여겨보지도 않다가 1945년 8월, 그 시절 쏘련 경내로 전이한 항일련군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출한 뒤에야 개인의 혼인문제를 처리하였다고 하니 왕효명의 마음속 리봉선의 위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였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리봉선은 관련 자료가 따르지 못하여 그의 발자취가 내내 한편의 전기로도 정리되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흑룡강성 목단강시를 중심으로 하여 북만 항일련군 연구가들은 적지 않았으나 그 진전은 거의 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지난 몇해 사이 필자가 정리한 리봉선 전기가 한권의 인물실기-《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에 실리고 길림신문에 옹근 한면으로 소개되여서야 리봉선은 인물전기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8녀 투강중 조선족녀전사인 리봉선 소개와 사랑부분이라면 항일련군 부녀퇀의 녀전사들인 8녀 투강의 희생지는 오늘의 목단강시 림구현 조령진 삼가자촌 이동 약 4킬로메터 되는 줘무강자산 아래로 되고 있다. 지금 이곳에는 ‘8녀 투강 옛터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으니 1938년 10월 20일의 8녀 투강 력사현지를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는 당년 항일련군 제5군 1사 참모장 김석봉외에도 당지 사람 왕련재 등이 있어 8녀 투강의 영웅적 모습과 8녀 투강 직후 김석봉의 모습이 보다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최근년간 목단강시에서 100킬로메터 떨어진 우수훈하반 사합촌(乌斯浑河畔四合村)에 가 왕련재(王连财) 로인을 취재한 한 취재기사에 따르면 왕련재는 1913년생으로서 8녀 투강의 곽계금, 왕혜민과 한마을에서 산 경력을 가지고 있다. 왕혜민은 왕련재보다 두살 어려 8녀 투강중 나이가 가장 어린 가운데의 한 사람이고 곽계금은 왕련재보다 두살 우로서 어릴 때 이름은 국화(菊花)로 불리였다. 그들 셋은 서로 나이가 비슷하여 어릴 때 늘 같이 놀며 즐기였다.

그 시절 사합촌과 주변은 군중토대가 좋아 항일련군 5군 부대가 자주 다니였다. 그들 가운데는 5군 부녀퇀의 녀전사들도 있었으니 왕혜민의 집에는 다니는 항일련군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왕혜민의 아버지는 5군 군부의 한 부관이며 왕혜민의 어머니와 마을사람들은 산속에서 활동하는 항일련군 부대에 식량과 옷가지들을 보내주군 하였다. 왕련재와 왕혜민, 곽계금은 또 항일련군 사람들이나 부녀퇀의 녀전사들과도 곧잘 어울리였다. 그 속에서 왕혜민과 곽계금은 항일련군 5군 부녀퇀에 가입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림구현 8녀투강유적기념관내 김석봉 사진.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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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녀 투강 그날은 1938년 10월 20일. 그날 이른아침 15살에 난 왕련재는 마침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불현듯 자지러진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는 갈수록 가까이 들리였다. 뒤미처야 왕련재는 항일련군 5군 1사의 100여명 장병들이 우스훈하에 의해 갈길을 멈추었고 날이 밝자 1사 참모장 김석봉이 부녀퇀의 8명을 이끌고 우스훈하를 먼저 건너게 되고 강물이 불어 김석봉이 물길을 알려고 먼저 강을 건너보았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김석봉이 우스훈하 건너 대안에 이를 때 부녀퇀의 여덟명 녀전사는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을 자기들 쪽으로 끌며 생사판가리 싸움을 벌리다가 모두 손에 손잡고 강물에 뛰여들었었다. 나중에 적탄이, 박격포탄이, 도도한 우스훈하가 여덟명 녀전사를 삼켜버렸으며 왕련재는 이 전과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앞두고 강 대안에 이른 김석봉은 지켜볼 수만 없었다. 그는 다시 강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그는 강심에 이르지 못하고 몇발의 적탄에 맞았고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스훈하에서 멀지 않은 사합촌(四合村) 사람 왕련재(王连财)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자료는 김석봉이 대안에서 적들에게 먼 사격을 가하며 주의력을 자기에게 끌려고 했다고도 한다.

초연이 가시고 일본놈들이 물러간 여기 우스훈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사합촌의 사람들이 여덟명 녀전사 순난지에 이르러 희생된 렬사들을 묵묵히 추모하였다. 왕련재는 이윽토록 땅에 꿇앉아 흐느끼면서 자기 또래인 왕혜민과 곽계금의 이름을 맘속으로 불러보았다. 왕혜민, 곽계금과 어울려 뛰놀던 지난날이 눈에 선하였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저녁 무렵 왕련재의 아버지는 우연히 부근 산속의 한 항일련군의 밀영지에서 혼미상태에 빠진 김석봉 참모장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땐 험악한 세월인데다가 마을에 늘 특무거나 한간들이 들락하여 산속의 항일련군 비밀련락점이 파괴된데서 왕련재의 아버지는 김석봉 소식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15살에 난 아들 왕련재에게만 조용히 알렸을 뿐이였다.

그 시절의 왕련재는 같은 또래들에 비해 여위고 키가 작은 등 원인으로 15살이라지만 보기엔 10살도 되여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간과 사이좋은 녀인집 머슴살이로 소를 방목하고있은데서 소를 몰고 마음대로 산을 오르내릴 수 있었다. 한데서 왕련재는 아버지의 분부 대로 약과 식량을 산속 밀영에 전하게 되였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르니 김석봉은 상처가 나아지면서 소속부대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때를 두고 왕련재는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후에 그의 소식이 끊기였다. 가능하게 싸움터에서 희생되였을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그의 소식을 탐문하여보았지만 김석봉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후에 일본놈들이 투항한 후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림구현 8녀투강유적기념관내 리봉선 부분에 전시된 왕효명 사진.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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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보면 그날의 왕련재는 확실히 김석봉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김석봉은 어느 전투에서도 희생되지 않았다. 최근 김석봉에 대한 계속되는 연구와 림구현 그리고 림구현 규산향(奎山乡)의 전문자료에 따르면 1939년 3월 30일 목단강 서안 사도하자골(四道河子沟)에서 중공길동성위 확대회의가 열리였고 회의결의에 의해 5군 군부 부관 풍비양(冯丕让,렬사)과 길동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은 류수부대 400여명을 이끌며 림구 등지에서 투쟁을 견지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39년 이후 항일련군 제2로군 소속부대는 점차 쏘련으로 넘어가고 소부대가 여기저기 파견되여 활동하지만 김석봉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는 자료를 접하지 못하였다. 어인 연고인지 그는 항일련군 부대와 함께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부대와의 련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와 그 후 김석봉이 별수 없이 길림성 영길현 산구로 돌아간 과정을 필자는 모르고 있다.

관련 연구자료를 보면 김석봉은 영길현 산구로 돌아간 후 이름을 김상걸(金尚杰)이라 변성명하고 살다가 1962년에 당적을 회복하고 1970년에 병사하였다. 생전에 그는 자기가 항일련군 전사라는 것을 잊을 수 없었고 관련 부문에 8녀 투강의 진실한 목격과정을 여실히 알리였다. 그런 김석봉이 1938년 10월 10일 그날 포위를 헤치고 나온 전우와 함께 8녀 투강의 진실한 위치를 확인하여 주었기에 관련부문은 1982년에 림구현 조령진 줘무강 산 아래, 우스훈하 서안을 8녀 투강 순난지로 정식 확정할 수 있었다.

다시 앞의 왕련재로 돌아오면 왕련재는 그때 우스훈하 서안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고 강폭은 지금처럼 50메터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300메터는 넘었다는 귀중한 회고를 남기였음을 알리고 싶다. 당년의 김석봉과 여덟 녀전사가 우스훈하 여기를 도강지점으로 선택한 것은 강폭이 넓고 물이 얕으며 물살이 세지 않기 때문이였다. 지금 보면 왕련재의 회고처럼 8녀 투강 현지 우스훈하는 강폭이 수십메터 정도여서 여기가 당년 우리의 여덟명 녀전사가 강물에 뛰여든 력사의 현지라는 것이 전혀 실감이 나질 않는다.

중국혁명사에 길이 남을 항일련군 부녀퇀의 8녀 투강, 8녀 투강의 8명 녀전사 가운데의 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과 5군 부녀퇀 출신 리봉선, 감동과 눈물이 없이 읽을 수 없는 그들의 항일무장이야기며 우스훈하에서의 비장한 최후는 정녕 우리 조선족의 자랑이 아닐 수가 없다. 당년의 8녀 투강을 진두에서 이끌며 새로 알려지는 김석봉 역시 우리 조선족의 자랑이여서 가슴이 찡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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