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로 혁명의 장을 엮은 안창이

2018-08-06 09:07:21


호남 북부의 안향현에는 현성남부 번화가를 가로 지르는 창이로라는 도로가 있는데 이는 혁명렬사 안창이를 기념하기 위해 수건한 것이다. 안향은 안창이의 고향이다.

안창이는 1898년 호남성 안향현에서 출생했다. 1919년 12월 프랑스에 가서 근공검학하다가 학생운동에 참가했다는 리유로 1921년말에 압송되여 귀국했다. 1922년초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24년 모스크바 동방대학에 입학하여 학습했다. 1925년초, 안창이와 엽정, 섭영진 등 20여명과 함께 쏘련홍군학교 중국반에 전학해서 군사지식을 학습했다.

1925년 9월, 안창이는 상해로 돌아와 중앙군사부(후에 중앙군위로 개칭)의 조직준비 사업에 참여했다. 1926년 중공호남구위 군사부 부장직을 맡고 군사부 로농무장조직사업을 령도했으며 북벌군의 호남전장에서의 승리적인 진군을 지지했다. 1926년 9월, 그는 중앙군위로 전근해 주은래와 조세염의 사업을 협조하고 상해로동자들의 3차례 무장봉기에 대한 조직과 지휘에 참가하였다.

대혁명 실패후 안창이는 주은래가 령도하는 중공중앙 군사부를 따라 무한으로 갔다. 7월, 중공중앙은 남창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섭영진, 하창, 안창이로 림시전적군사위원회를 구성해 강서 구강에 가서 당지 주둔군 속의 공산당원들에게 중앙의 결정을 전달하고 봉기에 협동작전했다. 남창봉기 후 그는 봉기군 제11군 제24사의 당대표직을 맡았다. 10월, 봉기군 주력은 광동 조산일대에서 적들의 포위공격으로 실패하자 동랑과 안창이 등은 제24사 1000여명 잔여부대를 이끌고 광동 동강지구에서 간고하게 전전하다가 팽배가 령도하는 해륙풍무장봉기에 참가해 해륙풍쏘베트정권의 건립과 발전에 기여했다.

1927년 11월, 팽배를 서기로 하는 중공동강특별위원회가 재건되였고 안창이가 특별위원회 위원, 특별위원회 군위 주임직을 맡았다. 이어 안창이는 당의 요구에 따라 동강지구를 떠나 향항을 거쳐 1928년 11월 상해로 가서 중앙군위 위원 겸 강소성군위 위원, 강소성군위 비서직을 맡고 팽배의 사업을 협조했다.

1929년 8월 24일, 반역자의 밀고로 안창이와 팽배, 양은, 형사정은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감옥에서 안창이 등은 공산주의자의 견강한 의지와 품질을 보여주었다. 적들의 높은 벼슬, 후한 봉록 유혹과 가혹한 고문도 그들의 혁명의지와 혁명정신을 추호도 동요시키지 못했다. 8월 30일, 안창이 등 4명 렬사는 상해 룡화에서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주은래는 당의 기관지 《붉은기일보》에 문장을 발표해 “팽배, 양은, 안창이, 형사정 4명 렬사의 희생은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의 엄청난 손실이다!”, 그들의 “영용한 전투성과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다년간 안창이의 혁명사적을 깊이 연구해온 원 안향현 당사판공실 주임 정안휘(72세)는 안창이는 남창봉기와 해륙풍쏘베트정권 건설을 위해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고 부상당한 몸으로 전투를 견지한 아주 대단한 분이라면서 “안창이는 확고한 맑스주의자이다. 우리 당대 공산주의자들은 반드시 용감히 전진하고 영원히 굴복하지 않는 그의 정신을 따라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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