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로 몰린 비운의 혁명가 리상묵

2018-08-13 0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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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의 건립은 연변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발전을 표징한다. 새로 개편된 연길, 화룡, 왕청, 훈춘현의 각 퇀들은 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토벌과 봉쇄정책이 계속되고 1932년 겨울 이후 시작된 얼토당토치 않은 반‘민생단’투쟁이 그칠줄 모르는 엄혹한 정세를 분석하고 근거지를 사수만 하던 피동적 국면에서 벗어날 방책을 찾기 시작하였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안도의 일반군중과 반일부대 및 위만군병사들 가운데서 상당한 발전성을 보아냈다. 이에 근거하여 적들의 통치가 박약한 안도현 처창즈를 근거지로 창설하고 대전자, 대사하 일대를 혁명적으로 개척하며 새 유격구를 만들 ‘의견’을 동만특위에 제기하였다. 그때 리상묵은 특위에서 일제놈들의 토벌을 분쇄하는 반‘포위토벌’전과 새근거지 개척을 직접 지도하고 있었다.

리상묵을 주도로 하는 특위는 화룡현위의 ‘의견’ㅡ중요한 전략적 포치를 비준하고 안도를 진공할 새 방침을 세웠다. 특위에서는 화룡현에서 먼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량을 안도에 보내여 유격전을 전개하며 유격전을 확대하라고 지시하였다. 1934년 가을에 이르러 화룡 3퇀과 여러 항일부대들은 안도일대에서 일련의 전투를 진행하여 적들을 쫓아내고 처창즈근거지를 개척하는 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왕청퇀과 훈춘퇀의 주력부대는 1934년 봄부터 왕청, 녕안, 동녕 등지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발동하면서 피동적 국면에서 벗어나 일제의 1934년 춘기토벌을 격퇴하고 넓은 지역에서 적들을 족치였다. 자료에 의하면 연길, 안도 두개 현을 보아도 순 일제침략군 200여명이 살상되였다. 이리하여 연길, 안도, 돈화, 왕청, 녕안, 동녕 등지에 새 유격구가 개척되고 제2군 독립사는 광활한 지역에서 적들에게 련속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였다.

그 시절 중공만주성위의 결의에 의해 중공동만특위 서기는 특위 선전부장 왕중산(王仲山)으로 내정되였다. 1934년 6월 2일, 왕중산은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과 함께 의란구 남동에서 특위림시회의를 가지고 왕중산, 리상묵, 왕덕태, 주진 등 4명으로 특위림시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특위 새로운 서기로 왕중산이 나섰다. 리상묵은 주진, 왕덕태와 함께 새로운 특위서기를 도와 새 유격구 개척사업을 계속 힘있게 내밀었다.

1934년 봄 이후 연변 각 항일유격근거지의 처지가 갈수록 험악해감은 엄연한 현실이였다. 1933년 봄과 겨울의 제1차, 제2차 대‘토벌’에서 거듭 참패를 당한 일제침략자들은 1934년 9월부터 1935년 1월까지 동만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해 옹근 4개월에 걸친 제3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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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였다. 일제놈들은 또 ‘집단부락’정책을 전면적으로 가속화하여 항일유격대와 인민군중과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모든 공급선을 차단하려 시도하였다. 1934년 9월 6일에는 당, 정, 군 가운데서 일제에 투항하여 전향한 자, 혁명단체 가운데서 전향한 자들을 긁어모아 관동군 헌병사령부 연길헌병대의 특무외곽조직ㅡ‘간도협조회’를 조직하면서 여러 근거지들에서 벌리고 있는 반‘민생단’투쟁을 역리용하면서 ‘리간계책’을 꾸미였다. 본부는 국자가 연자가(延字街 오늘의 연길시 진학가)에 두었다. 이자들의 “민생단이 아직도 활동하고있다”는 리간계책은 연변의 당, 정, 군 숱한 조선인 혁명가들을 ‘민생단’으로 몰아갔으니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도 그 리간계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제놈들은 1934년 9월에 들어서면서 제3차 대‘토벌’에 혈안이 되는데 동만특위에서는 반‘민생단’ 관련 만주성위의 서한을 전달하면서 특위특별회의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문제를 토론한다면서 특위 집행위원들인 조선인 리상묵, 주진한테는 통지조차 하지 않았다. 이때라고 간도협조회 놈들은 이른바 ‘사방대사건’(四方台事件)을 조작해 내고 리상묵과 주진은 그 덫에 걸리였다.

이른바 ‘사방대사건’은 1935년 1월에 발생한 일이다. 간도협조회는 1월 3일, 저들 산구공작대(山区工作队)원을 연길현 삼도만근거지 사방대에 파견하면서 연길 1퇀의 량식운반대장 한영호(韩英浩)가 ‘민생단원’이라는 가상을 꾸며놓았다. 그 실제내용은 이러하다.

간도협조회는 도처에 저들 그믈을 늘여놓은 데서 연길 1퇀ㅡ즉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1퇀의 한영호가 왕청현 백초구에 가서 식량구입을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였다. 절호의 기회라고 본 간도협조회 산구공작대 놈들은 1월 3일 총을 지니지 않고 사방대근거지에 들어갔다. 이자들이 근거지의 바깥보초소에 이르러 혁명군의 보초병과 말을 걸었다.

“우리는 백색구역에서 와서 당의 사업을 회보합니다.”

“한영호가 백초구에서 돌아왔어요?”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가 보초병의 보총을 빼앗아가지고 달아났다. 보초병은 지휘부에 달아가 금방 발생한 일을 여실히 회보하였다. 지휘부에서는 간도협조회 공작대는 혁명대오내에 숨어든 ‘민생단’이다, 한영호는 ‘민생단’과 련계가 있다고 보면서 한영호를 잡아들이였다. 사방대에 끌려간 한영호는 고문을 당하였고 고문에 얼이 나가니 1퇀 퇀장 박춘(朴春)과 독립사 사장 주진(朱镇)이 ‘민생단 수령’이라고 불어댔다. 붙들린 박춘도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과 그의 수하 한패의 사람들이 ‘민생단’이라고 주어댔다.

그러나 주진은 독립사 사장인데서 마구 체포할 수 없었다. 1981년 1월 13일에 화룡현유격대 출신이고 특위 통신원인 채동식로인이 구술한데 의하면 주진의 체포에 특위서기 왕중산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때 주진은 연길 1퇀과 화룡 2퇀을 직접 지휘하면서 안도현 처창즈근거지(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 경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왕중산은 자기가 친히 처창즈로 가서 요긴한 회의가 있다면서 그 시절 중공화룡현위 서기 조아범과 독립사 사장 주진을 불러 함께 사방대로 향하였다.

도중에 연길현 신선동(오늘의 안도현 차조구 경내)을 거치게 되였다. 사전에 약속한 왕중산과 조아범은 주진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손을 써 주진을 체포하고는 ‘민생단’이라고 선포하면서 사방대의 특위로 압송하였다. 채동식로인은 주진 체포과정을 말하면서 주진은 사방대에 이른 두번째 날밤에 가만히 도망쳤다고 긍정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탈출에 성공한 후 적들에게 투항하였다. 리상묵은 자기가 민생단으로 몰렸다는 소식을 접하자 결혼한지 오라지 않은 안해와 같이 산속‘민생단’에서 도망해 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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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야단났다. ‘민생단수령’ 리상묵과 주진이 달아나니 그들 수하에서 활동하던 40여명 동지들은 영락없이 붙들리고말았다. 그쯤이면 모르겠는데 특위림시집행위원회에서는 그들 모두를‘민생단’으로 몰아 죽여버리였다. 억울했다. 얼토당토않은 ‘사방대사건’의 개략적인 전말이라 하겠다. 연변 4개 현 유격근거지들에서 벌어진 치떨리는 내부 반‘민생단’투쟁은 나중에는 연변내 조선인혁명가들의 수령인물들인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장 주진에 이르기까지도 용서치 않았다.

사실 리상묵도 동만특위 책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연변의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을 극단적으로 몰아간 사람이였다. 1933년 봄 이후 특위에서 반 ‘민생단투쟁’을 ‘당내외 모든 사업의 중심과업’으로 삼고 내밀면서 이해 1933년 9월, 특위서기 동장영(童长荣)과 만주성위 순시원 반경우(潘庆友)가 훈춘에 가서 반‘민생단’ 고조를 일으켰다. 민생단으로 몰린 훈춘현유격대대 정위 박두남(朴斗南)이 기회를 보다가 반경우를 총으로 쏘아죽이고 달아나니 진짜 큰일이였다.

박두남사건 이후 김성도에 이어 특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던 리상묵은 훈춘현으로 달려가더니 훈춘 항일조직의 70%가 민생단원이라고 선포하면서 대황구와 연통라자 근거지에서 단번에 60여명 간부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그후 60여명중 1명만 살아남고 모두 처형되였다고 하니 너무도 참담한 현실이였다.

결과는 어떠했던가, 박두남사건 이후 이미 ‘파쟁’수령으로 파직되였던 리상묵 먼저 전임 특위 조직부장 김성도(金圣道)도 ‘나는 민생단원이 아니다’는 혈서를 쓰고 ‘민생단두목’으로 처형되였다. 1935년 3월에는 특위숙반위원회 주석 리송일(李宋一)도 ‘민생단 최고 수령’으로 몰리였다. 그는 처형 직전에야 “민생단이 한낱 환영에 지나지 않는구나 !”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하물며 후임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도 ‘민생단원’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그럼 리상묵은 어디로 하산했을가? 관련 연구자료와 리상묵의 녀동생 리구진, 리상묵의 조카 리철산씨 이야기에 따르면 안도, 돈화, 액목 등지를 전전하면서 한해 푼히 숨어살았다. 독립사 사장 주진처럼 산에서 하산하자 투항해 버린 것은 아니였다. 그러다가 은거생활중인 1936년 4월에 연길현 도목구에서인가 간도협조회 놈들에게 체포되여 돈화감옥에 갇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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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17년 11월 14일 오전, 주숙지인 상해 제경려치호텔(帝璟丽致大酒店) 306방에서 월드옥타 상해지회 부회장이고 상해지회 차세대 위원장인 리춘화씨와 춘화씨 아버지 리철산(李铁山)씨를 취재하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 본다.

“리상묵이 변절자가 아니라는 근거는 무엇이죠?”

“리상묵의 안해가 우리와 오래 같이 살았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유복자 리풍산이 있었습니다. 리상묵의 안해가 이야기한데 의하면 1935년 1월인가 리상묵은 어이없게도 ‘민생단’에 걸려들자 안해와 같이 가만히 도망쳐 돈화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리상묵 연구자료들에서 보던 리상묵의 도망과정이 그의 조카 리철산의 말로 다시 펼쳐진다.

“그후는 어떻게 되였는지요?”

“삼촌 리상묵은 한 1년 지나서 적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여 돈화감옥에 투옥되였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적들과 굴함없이 싸웠는데 말시비에서 감옥놈들은 리상묵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리상묵의 별호가 성쉬군이던데요.”

“그렇지요. 별호 성쉬군대로 말시비에서 리상묵을 이길 수가 없었지요. 누구한테도 지려고 하지 않는 성품이였습니다. 적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지요. 적들은 강압적으로론 리상묵을 굴복시킬 수 없다고 보고 전술을 바꾸었습니다. 밖으로는 리상묵이 투항하였다 퍼뜨리고 내부로는 리상묵더러 담배를 피우게 ‘배려’를 돌리면서 담배속에 약담배를 가만가만 넣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리상묵은 자기도 모르게 약담배 지골로 되였어요. 적들은 고의로 약담배를 피우게 하면서 리상묵을 머저리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이 부분도 전에 리구진할머니한테서 직접 들었습니다.”

“지독한 놈들이지요. 결과 리상묵은 춤을 게질게질 흘리는 머저리로 전락하면서 돈화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아편중독이지요. 혁명 조직과 동지를 물어 넣은 것도 없습니다. 리상묵은 억울합니다. 그는 ‘민생단’이 아니거니와 ‘변절자’도 아닙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리상묵 관련자료에는 일본밀정이 되여 동지들 잡으로 다니다가 결국 아편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엉터립니다. 모두가 적들의 조작입니다. 리상묵은 돈화감옥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1937년인가 죽었어요. 숙모ㅡ리상묵의 안해되는 사람이 잘 알고 있습니다. 숙모와 우리 리씨 가족은 리상묵의 산속도망과 은거생활, 체포와 사망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그는 체포되기 전에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조직에서 찾아주지 않을가 기대했지요”

상해서 만난 리상묵의 조카의 취재정리고를 들여다 보았다. 리상묵의 막내 녀동생인 리구진할머니도 그렇게 알려주고, 그 시절 연변대학 력사학부 박창욱교수도 변절이 아니라며 깊이 연구해볼 것을 제의하셨다. 이로부터 보면 1936년 4월 친일단체 간도협조회에 체포된 후 <경애하는>이라는 제목의 이른바 ‘리상묵 성명서’도 거짓임이 드러나고 체포된 후 일본헌병대의 밀정으로 일하다가 아편중독으로 죽었다는 것도 조작설임이 드러났다.

리간계책에 이골이 튼 간도협조회 놈들은 체포된 후 투항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장인 주진이나 훈춘현유격대대 정위 박두남과 더불어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도 저들에게 투항하였다는 가짜 설을 만들어 보다 많은 ‘산속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하게 하려 하였다. 그 가짜 설, 조작 설에 묻히여 리상묵은 죽어서도 억울한 루명을 벗지 못하고 장장 81년을 혁명의 배신자, 변절자로 몰려야 하였다.

력사란 때론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치 못할 모종의 음모와 작간에 의해 본의 아닌 억울함을 무정하게 당하기도 함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다. 리상묵 동지, 죽어서 81년 만에 동지로 불리우는 리상묵 동지여, 구천에서 원을 푸시며 환히 웃으시라, 조선족항일사에서 길이길이 빛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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