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드러나는 비범한 혁명가 전일

2018-08-27 09:05:24

사회주의자 리동휘. 전일은 리동휘의 동지이고측근이였다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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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 3.13반일운동 100돐을 눈앞에 두니 력사의 시선은 그날 ‘철혈광복단’ 단장으로 항일의 기치를 든 비범한 항일혁명가이며 사회주의자인 전일에게로 쏠린다. 리동휘의 지지와 전일의 발기로 1914년 봄 왕청현 라자구사관학교에서 설립된 ‘철혈광복단’은 중국조선족항일무장투쟁사의 일환으로서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과 개산툰 3.1운동을 잇는 데서 주도적인 역할을 발휘했다. 1920년 1월 4일, 룡정 남쪽에서 벌어진 15만원 탈취 거사의 6명 열혈청년들도 전일의 지도하에 있는 ‘철혈광복단’ 단원들이다.

그 시절의 항일비밀결사단체ㅡ‘철혈광복단’, 그 ‘철혈광복단’을 이끈 단장이고 후날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한 전일(1893ㅡ1938)은 누구일가? 2007년 10월에 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족항일인물지ㅡ 《겨레항일지사들》 제2권에 전일전기를 올리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일의 생몰시간은 물론 진실한 고향도 몰랐고 진실한 발자취도 잘 몰랐다. 그것이 늘 맘에 걸렸는데 지난 10여년간의 지속적인 연구과정에서 지난 세기 20년대초 《동아일보》의 련속 재판기사와 ‘철혈광복단’ 단원인 최봉설, 강근 등의 수기와 회고가 발견되면서 우리 민족 력사 속 진실한 인물 전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나타나는 비범한 항일혁명가 전일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백탑동(吉州郡德山面白塔洞)출생으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선다. 이는 1921년 5월 8일과 7월 9일 등 《동아일보》 관련 기사에서 너무도 잘 알려진다. 1921년 6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ㅡ<일본군>에 따르면 전일은 ‘법정심문’- <피고는> 하는 ‘심문’에서 “원적디에서는 농림학교를 마치고 간도에 가서 사범학교를 맛치엇소.”라고 떳떳이 답한다.

사실 그러했다. 지금까지 전일연구에 따르면 아직까지 전일의 가족관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지만 고향에서 확실히 서당교육을 접하고 농림학교를 마치게 된다. 그러던 1910년 8월 망국의 한일합방에 의해 삼천리 금수강산이 일본에 병탄되자 전일은 분개한 나머지 결연히 두만강을 건너 국자가 소영자(局子街小营子)로 활동무대를 옮기였다. 사실은 소영자에 앞서 조선 종성대안의 후동골 옥동포에 먼저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때의 전일은 혈혈단신이 아니고 이미 결혼한 몸이였다.

전일의 결혼을 두고 재미나는 고향일화가 전해진다.

전일의 어린시절은 소년결혼이 성행되던 시절이였다. 남녀 15살 정도면 의례 결혼해야 하던 시절인데 전일은 웬지 겨우 9살을 잡았을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10대 초반의 소녀 최인진(崔仁镇)과 결혼하게 되였다. 아마도 봉건통이 심한 가족이고 생활환경이 상대적으로 괜찮은 집안인 것 같다. 그래서 이른 시절 결혼이라고 치러진 모양인데 신부 최인진은 길주에 북으로 멀지 않은 명천 녀자였다.

생각해보시라, 전일이 9살이라 9살내기가 알면 무엇을 알겠는가, 그것도 바지에 오줌을 싸기가 일쑤여서 겨울에 발방아를 찧을 때면 오줌에 얼어든 바지가 절그렁절그렁 소리를 냈다고 하니 안해되는 최인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부부동침이라고 한방에 들이면 어린 전일은 자기 녀인을 보고 “저리 가!” 하는 위인이였다. 부부생활은 꿈이요, 사랑의 결실은 먼 후날로 넘어가야 하였다. 그러던 철부지 남편 전일이 후에 어른이 되여 잃어버린 나라를 건지는 큰일에 나설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일제놈들의 함흥지방법원 청진지행, 즉 청진감옥 법정에 나선 전일. (1921년 7월 26일자 3면, 동아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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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은 어려서부터 철부지이긴 해도 자라면서 공부하면서 차차 계급의식이 터갔다. 그에게 왜놈들은 한하늘을 떠이고 살수 없는 원쑤놈들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20대 언덕을 바라보는 전일은 부모, 안해 등과 함께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섰으니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후동골 옥동포였다.

그 시절 후동은 조선이주민들에게 두텁골로 불리웠는데 후에 한자(汉字)로 번져지면서 후동(厚洞)으로 굳어졌다. 후동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후 전일은 지체없이 국자가로 달려가서 스스로 사범학교라고 말한 국자가 길동기독학당(吉东基督学堂) 법정과를 다니였다. 길동기독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리동춘이 교장으로 근무하는 광성학교 교사로 활동함을 보인다.

전일이 중국행에 오른 이듬해 1911년, 개산툰 후동골 옥동포에서 아들 전혁이 태여났다. 이어 딸 전신은도 고고성을 울리니 전씨네 가문으로 말하면 오랜만의 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늘 밖으로 도는 아버지여서 전혁이와 신은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거의 모르고 다정다감한 어머니 최인진의 뜨거운 사랑과 엄격한 할아버지의 단속을 받으며 자라났다.

전일의 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으시고 신수도 잘 보신다고 원근에 널리 알려진 기독교 전도사였다. 그는 노상 손자, 손녀에게 해동성국의 찬란한 문화와 을지문덕, 리순신 장군 등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후 커서 민족을 건질 큰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일깨워주군 하였다.

전일이 국자가 광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동지이고 항일혁명가이며 후날의 사회주의 운동가인 리동휘가 소영자 광성학교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현재 보이는 자료에 의하면 20세기 10년대의 전일은 조선이주민들 속에 이름이 짜한 열렬한 반일지사로서 리동휘의 측근이였다. 전일 일가가 1910년 가을 두만강을 건너 후동으로 이주한 것은 이미 리동휘와 관계되는 일이다. 1910년 봄에 리동휘 등 신민회 간부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패로 나뉘여 해외 망명길에 올랐을 때 전일도 뒤미처 중국행을 강단하게 되였다.

1910년 3월, 국자가에서 연변 지역 조선인단체인 간민교육회(垦民敎育会)가 조직되고 1913년 2월에 간민회가 조직되자 전일은 간도교육회와 간민회 간부로 활약하였다. 간민회의 전신인 간민교육회는 회원이 200여명으로서 모두가 리동휘의 측근들이다. 그들은 리동휘를 축으로 리동휘의 두리에 뭉치면서 주요골간들로 ‘72형제파’를 뭇기에 이르렀다. 전일은 이들 72형제파의 주요 한사람이였다.

리동휘가 연변땅에서 민중을 쟁취하면서 반일의 대업을 도모할 때 훈춘현에서는 영향력이 막강한 항일지사 황병길 등이 극진한 동지였다면 조선에서부터 리동휘의 동지였던  전일은 화룡현에서 리동휘의 막강한 조수였다.

1914년초에 전일은 동지들과 함께 리동휘를 받들면서 왕청현 라자구 깊은 수림속에 라자구사관학교를 꾸리였다. 오늘의 왕청현 라자구진 태평구(太平沟)마을 서쪽 언덕 우를 가리킨다. 태평구의 원 이름은 화수동(桦树洞)이였다. 화수동이 개발될 때 주변은 모두가 삼림으로 덮이였는데 그중 많은 것이 봇나무여서 화수동으로 부르다가 태평구로 바뀌였다. 태평구의 남쪽에는 험준한 산발이 들쑹날쑹하여 당지 사람들은 그 바위를 중국식으로 ‘라즈’(砬子)라고 불렀다. 그에 따라 태평구는 ‘라자구’(砬子沟)라고도 불리였다.

라자구의 중문 라(砬)자는 조선어발음으로 ‘라’(罗)와 비슷하다. 한데서 라자구(砬子沟)는 점차 라자구(罗子沟)로 굳어지면서 오늘의 라자구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되였다. 이같이 라자구 이름이 생겨난 태평구에 조선사람들이 처음 들어선 것은 1899년에 훈춘에서 넘어온 8세대 조선이주민들이다. 이들 8세대는 훈춘지구에서 수렵을 일삼던 사람들로서 태평구의 첫 이주민들이였다.


룡정시 원 개산툰팔프공장 주택과 천평벌이 한눈에 보인다. 그제날 여기 천평벌 왼쪽에 후동에 전일의 집이 있었다. (2018년 7월 6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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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00년에 훈춘에서 또 16세대가 태평구에 들어섰다. 몇년 후 1905년 좌우에 두만강너머 온성에서 또 100여호 조선이주민들이 오늘의 라자구일대에 들어서면서 태평구의 세대수도 늘어갔다. 리동휘랑 태평구에 사관학교를 세울 무렵인 1912년에는 태평구의 세대수가 30여호를 이루었다. 그중 7호가 한족이주민들이라지만 그들은 한 마을에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였다.

라자구 태평구의 개척과 이주를 알리는 자료를 두루 보았다. 라자구사관학교가 설립된 고장이 태평구기에 사관학교는 또 태평구사관학교, 동림사관학교라고도 불리였다. 사관학교의 학생들은 명동중학교, 창동학원, 광성중학교ㅡ세 중학교를 중심으로 모여든 열혈청년들이고 리동휘의 측근인 사관학교 교원 전일은 사관학교 설립자, 운영자의 한사람이였다.

이해 1914년 봄에 전일의 발기로 열혈청년들 속에서 ‘철혈광복단’이 조직(단장 전일)되였는데 이들 70여명 철혈광복단 단원들은 손가락으로 피를 짜서 혈서를 쓰면서 몸과 마음 다하여 조선독립에 나서겠다고 맹세하였다. 철혈광복단의 암호는 ‘우죽선생’(友竹先生)이고 조직은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은 물론 연해주 각지에 파급되였다.

그때 라자구사관학교 학생이고 철혈광복단 단원인 충청도 출신 강근의 회고에 의하면 라자구사관학교는 리동휘 주최로 철혈광복단 단원 70여명이 공부하였다. 전일이 큰힘을 내였다. 강근이 기억하는 그때 학생들로는 최계립(즉 최봉설), 최상종, 최관평, 주룡술, 주건, 주진술, 강상모, 강우홍, 여봉갑, 정일무, 임명극, 맹훈, 안영진, 윤동선, 리낙준, 채창헌, 림국정, 리광, 조훈, 리재형, 원일상, 정성규, 최호극, 김기선 등이다. 당시 조직지도자들로는 리동휘, 리종호, 장기영, 최호극, 전일 등이고 지방열성자는 최정국, 염재권, 전천모, 전이근 등이였다.

강근은 또 교사들 가운데는 일본륙군사관학교 기병과 출신 김숭천이란 자가 있는데 이자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정탐이라면서 전일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일은 김숭천이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정탐이란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하였다. 내속은 국자가에서 이자를 만나 사관학교로 보내면서 먼저 이자한테서 잘 배우고서 그후에 죽여버리라는 것이였다. 사관학교에서는 당연히 전일의 말대로 하였으니 전일은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이렇듯 라자구사관학교는 리동휘의 지도와 전일, 장기영 등 선생들의 열성적인 교수 그리고 지방 주민들의 극력 주선으로 잘 꾸려졌으나 나중에는 경비문제로 사관학교는 자못 어려움에 처하였다. 결과 몇달가지 못하고 사관학교는 페지되고 대부분 학생들과 교원들은 연해주 해삼위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날의 사관학교 학생인 최봉설이 회고한 데 따르면 그때가 바로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시작되던 때였다.

어떤 자료에서는 라자구사관학교 사생들의 연해주행은 1914년 봄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제1차세계대전 발발이 1914년 7월 28일이라고 할 때 응당 여름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1914년 봄에 ‘철혈광복단’을 조직하자 곧 떠났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때 해삼위로 간 림국정, 채창헌 등 30여명 학생들은 돈벌어 사관학교를 잘 운영하겠다고 하다가 김병학이라는 청부업자에게 속히워 머나먼 우랄산 나제센쓰크 목재소에 가서 고역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로씨야 1917년 2월혁명 후에 조선인녀성혁명가 김알렉산드라(1885ㅡ1918)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전부 풀려나게 되였다.

그럼 전일도 이들 30여명 학생들과 같이 연해주 해삼위로 갔을가? 이를 알리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보이는 자료는 “1915년 5월까지 전일은 연변에서 리동휘 등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그해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기였다.”이다. 실은 연변 일대와 연해주 일대가 모두가 전일과 그의 동지들의 활동무대였다. 이 시기 연변에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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