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드러나는 비범한 혁명가 전일
□ 리광인

2018-09-17 10:00:33

적들의 법정에서도 떳떳한혁명가 전일.(1921년 7월 26일자 3면《동아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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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은 조선 국내로 압송된 후 함흥지방법원 청진지행, 즉 청진감옥에 투옥되였다. 1921년 5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청진지행에서는 전일사건을 ‘많은 사건중 가장 세상사람이 주의하는 큰 사건’이라면서 엄청 주의를 돌리였다. 1921년 6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전일의 1심 공판 기록이 그대로 나오면서 항일혁명가로서의 전일의 위상이 그지없이 돋보인다. 부분 공판기록을 이른바 판사와 ‘피고’와의 원문을 그대로 보기로 하자.

ㅡ피고는 몇살인가.

ㅡ29살.

ㅡ직업은 무엇이었는가.

ㅡ일시 한인신보사 총무로 있었으나 본업은 조선독립이올시다.

ㅡ조선독립이란 직업이 어대 잇는가.

ㅡ그러면 무직업인 것이지.

그러면서 전일은 조선시절, 학교에서 공부할 때 조선독립사상을 가졌다고 떳떳이 대답한다.

ㅡ무슨 동기로 그런 사상을 가지게 되였는가.

ㅡ오조약과 칠조약이 성립된 후 합병이 실현될 그때 올시다.

ㅡ피고의 희망으로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ㅡ물론이지요. 잘만 운동하면 될 수 있습니다.

ㅡ그러면 합병한 그날부터 이런 희망을 두엇던가.

ㅡ네.

ㅡ독립의 희망을 품고 간도로 갔던가.

ㅡ네.

조선독립을 향한 전일의 대답은 거침없다. 판사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고 물을 때 전일은 “사회주의란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며 천한 자를 귀하게 하자는 것”이라면서 “독립운동은 조선을 위함이요, 사회주의는 세계를 위함이”라고 한다. 조선독립과 사회주의 리상을 위하여 싸우는, 사회주의 리론가와 실천가 전일을 보게 되는 순간순간이다.

결과 전일은 정치범으로 5년형을 받고 청진감옥에 복역하게 되였다. 그렇게 1심 공판으로부터 2년여가 흐른 1923년 7월 8일, 전일은 12명의 장기수들과 감옥을 탈출하다가 체포되여 추가로 4년형을 받았다. 한국의 ‘전일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전일은 청진감옥에서 여러차례의 감형 끝에 1927년 9월 16일에 만기출옥하였다고 밝히였다.

그러나 전일의 가족과 현지조사 자료로 보는 현실은 여러 면에서 다르게 나타나 주의를 끌고 있다. 1920년 3월 전일이 적들에게 체포된 후의 전일가족부터 보기로 한다.

전일이 체포되기 전도 그러하지만 전일이 체포될 때 아들 전혁은 금방 만 9살을 잡았고 딸애 신은이는 만 7살로서 이들 오누이는 거의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고 있었다. 전일이가 체포된 후 그의 안해 최인진은 사랑스런 오누이를 무릎가에 앉히고 애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후 커서 꼭 아버지의 뒤를 이어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일찍 만세운동에서 후동골과 그 일대의 수많은 부녀들을 궐기시켰고 남편의 대업을 무조건 받들고 나섰던 이 녀인은 자식들의 장래를 념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전일은 청진감옥에서 출옥을 7일인가 앞두고 파옥투쟁을 지도하며 맨 나중에 감옥담장에서 뛰여내리다가 뒤따른 놈들에게 칼에 찍히우고 다시 3년간이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는 4년 추가형이란 앞의 자료와 다름이 보이지만 3년 추가형은 개산툰진 자동 출신의 항일투사 박원석이 이렇게 실증하였고 후동 출신의 항일투사 채동식, 몽기동(지금의 광소촌) 출신의 항일투사 김창렬 등 로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필자에게 알려주었다. 1971년의 화룡현 관련 자료와 연변서류국의 력사자료ㅡ전혁, 최인진 부부에도 그렇게 반영되고 있다.

전일의 청진감옥 출옥도 전일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시간상 다름을 보인다. 필자의 모든 현지조사 자료는 1923년경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전일의 출옥소식이 조직내선을 통하여 후동골에 전해지자 후동을 중심으로 한 개산툰일대의 동지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특히 후동의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자기들 수령인 물맞이에 서둘렀다.


선바위에서 보는 오늘의장재촌과 명동촌 그리고 그 일대. 그제날 중공달라자 제1임구위 서기 전일의 활동무대. (2016년 8월 26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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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 31일 필자가 개산툰 광소촌에 찾아가 김창렬 로인(항일투사)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필자에게 그날 전일이 두만강을 건너올 때 후동과 그 일대의 모모한 사람들이 선구나루터에까지 가서 폭죽을 터치고 북장단을 울리면서 전일이를 마중했다고 말하였다. 그의 눈으로 직접 본 전일이의 귀가였다.

전일의 일가 다섯 식솔(전일이와 안해 최인진, 전일이 아버지, 아들과 딸)은 말 그대로 오래간만에 단란히 한자리에 모여앉았다. 열두어살 되는 아들 전혁이와 그 아래 녀동생 신은이는 또릿또릿한 눈길로 낯설어보이는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세상의 빈부차이는 어떻게 생겨났고 일본사람들은 왜 제 나라도 아닌 조선을 짓밟고도 모자라 중국까지 삼키려고 날뛰는가며 수두룩한 의문을 내놓았다.

그러는 아들이 기특하기만 했다. 전일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도 딸애를 안아 무릎에 앉히기도 하면서 임진전쟁이며 갑오전쟁이며를 실례로 침략은 제국주의의 본성이라는것을 알기 쉽게 이야기하여주었다. 이어 섬나라 오랑캐 놈들을 몰아내고 지주, 자본가 놈들을 소멸해야만이 온 세상의 백성들이 잘살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넌 아직 어리다. 공부를 잘하고 학문을 깊이 닦아야 자연 도리를 깨달을 수 있단다. 하니깐 넌 학습에 일념해야 한다.”

아버지 전일의 절절한 말씀은 나어린 전혁이의 마음에 세찬 격랑을 일으켜놓았다. 아버지가 집에 체류하고있는 1년 기간에 연변의 방방곡곡에서 매일이다싶이 동지들이 찾아들었다. 전혁이네 집은 그야말로 후동과 개산툰일대의 혁명의 지휘부나 다름 없었다.

청진감옥에서 출옥한 후 전일이는 집에 한 1년 머물러있었다. 말이 집이지 그는 돌아가는 치륜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밖으로 돌며 무산대중을 계몽시키고 지도하는 일에 나섰다. 김창렬 로인의 말씀에 의하면 전일이가 알심을 들인 것은 1920년 ‘경신년대토벌’에서 일제놈들에 의해 불타버린 정동중소학교 등 사립학교들을 복구하고 다시 글소리가 랑랑하게 하는 일이였다고 한다.

후동에 와서 약 1년간 머무른 후 전일이는 다시 조선에 나갔다.

1924년 8월 17일에 전일은 리남두(李南斗), 리충모(李忠模), 김×× 등 6명의 동지와 손을 잡고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전일이는 일찍 리동휘와 손을 잡고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세웠던 그 뛰여난 일솜씨로 이번에는 획기적인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공산주의 단체들인 ‘화요회’, ‘북풍회’, ‘무산자동맹’ 등은 전일 등이 조직한 조선공산당과의 합작을 희망하였다. 전일은 이에 절대적인 찬성을 표하고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건립하는 거창한 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던 1924년 그해 11월에 전일이는 리남두(李南斗) 등 몇몇 동지와 함께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였다. 《한국공산주의 운동사》(1) 그러하고 중국 조선족사회 조선공산당연구의 제1인자 량환준 로인이 그러하였다. 량환준 로인은 20세기 20년대에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화요파) 중책을 지니였던 분이였다. 그번 체포를 계기로 전일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여러해 옥살이를 하게 되였다.

이같이 전일의 옥살이는 여러 자료와 연구성과들이 서로 다르게 기재되여 혼란도 없지 않다. 이 세상 력사연구란 늘 이러하거늘 절대적으로 옳고 아님을 가리지 못할 때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20년대 중반 이후 전일이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고 이에 대한 자료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초부터이다. 1971년 화룡현 관련 자료와 관련 ‘연길현당조직 연혁개황’에 따르면 1930년초에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는 공산당원 ‘오아바이’(吴大爷)와 ‘얽음뱅이’(麻包头) 두 사람을 달라자일대에 파견하여 당구위 조직에 나서게 하였다.


선바위에서 보이는 오늘의 칠도구는 옛날 전일의 활동무대.(2016년 8월 26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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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에 그들 둘은 금곡, 영동 등지에서 원 ‘조공청년회’ 회원 라일준, 김명옥, 김재룡 등을 중공 당조직에 받아들이고 영동지부를 조직하였다. 이에 앞서 채수항을 서기로 하는 금곡당지부도 이미 조직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해 12월에는 또 중공남구지부와 사대임(四對任)지부가 조직되였다.

여기에서 오아바이란 누구이고 얽음뱅이란 누구일가, 오래동안 연변의 력사학자들은 아무런 자료도 쥐지 못한데서 오아바이란 별명을 가진 이 사람을 김일환으로 잘못 여기였다. 1902년생인 김일환으로 말하면 이 별명이 어울리지 않았다. 김일환에 대한 모든 력사자료와 그와 동시기 항일투사들을 많이 찾아보아도 김일환에게는 근본 오아바이란 별명이 따른 적이 없었다. 필자도 어쩌는 수가 없어서 2001년 2월 21일과 22일에 김일환 렬사전기를 정리할 때 오아바이를 김일환이라고 인정하고 그대로 서술했던 것이다. 이것이 력사적 착오임을 알게 된 것은 2003년 9월의 일이다.

항일인물편ㅡ《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 제4책의 출판을 앞두고 필자는 전일의 안해 최인진 렬사에 대하여 거듭 검토하게 되였다. 아무리 검토해도 남편 전일이 미타하게 느껴졌다. 그토록 큰 력사인물이 그렇게 소리없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전일과 렬사인 그의 안해 최인진, 아들 전혁, 딸 신은이를 두고 연변서류국 자료와 화룡현 관련 자료 그리고 달라자, 개산툰일대를 둘러싼 관련 자료, 관련 항일투사 방문기록을 모두 거듭 찾아보았다.

필자의 현지조사기록인 목책(1)에는 80년대초에 연길에서 고창일 녀항일투사를 방문했을 때 적은 한단락 기록이 있었다. 그 기록에는 “달라자에는 그때 두개 별호(즉 오아바이와 얽음뱅이를 가리킴)가 있는데 나와 오아바이는 함께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달라자에 가 가짜부부로 꾸미고 활동하였다.”고 적혀있었다. 당시 필자의 중시가 따르지 못한데서 그 이상 더 묻지 않고 다른 취재에 열을 올리였는데 고창일 녀투사가 바로 당년 개산툰구농민협회 위원이였다. 그때 고창일은 필자와 오아바이는 개산툰 후동사람이고 40대의 나이여서 ‘오아바이’로 부를 만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정신을 번쩍 차리고 해당 ‘중공달라자구위 조직개황’자료를 뒤져보았는데 이 자료의 실증자가 고창일과 개산툰구 부녀회 책임자였던 장영숙이였다.

이어 그  시절 전일연구에서 가장 발언권이 있는 항일 로간부 량환준 로인의 방문기를 찾아보았다. 그날은 1984년 1월 28일이였는데 량환준 로인은 달라자의 “‘오아바이’가 전일임이 95%는 옳은 것 같다.”고 필자와 말한 적이 있었다. 또, 전일은 키가 1.65메터쯤 되고 얼굴이 닭알형으로서 곱살하게 생긴 미남인데 1930년대초의 나이는 40세 정도라고 말씀하셨다. 전일의 생몰년대를 모르던 그 시절 전일의 출생년대를 1890년쯤으로 추정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오아바이의 정체가 드러났다. 오아바이는 다름아닌 전일이였다. 개산툰일대 항일투사들을 방문할 때 전일이는 감옥에서 다시 풀려나왔고 달라자일대에 가 활동하였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모든 자료에 전일의 이름이 보이지 않은데서 필자는 마땅한 중시를 돌리지 못했었다. 보통내기가 아닌 비범한 인물 전일이의 발자취는 이렇게 다시 이어졌다.

1931년 2월에 중공달라자구위가 금곡에서 조직되고 오아바이ㅡ전일이 제1임 구위 서기로 추대되였다. 구위가 조직된 후 전일은 구위 조직부 간부인 김일환 등과 함께 구내 각지에 내려가 장동, 대소, 성교 등 기층지부를 건립하는 한편 유격대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1930년대초 중공달라자 제1임 구위 서기 전일의활동무대였던 오늘의 개산툰진 천평벌.(2018년 7월 6일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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