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드러나는 비범한 혁명가 전일

2018-09-25 08: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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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은 풍부한 투쟁경력에 힘입어 동지들과 함께 1931년 5.1절 군중집회와 1931년 가을과 이듬해 봄의 추수춘황투쟁을 성과적으로 지도하였다. 단지 당조직이 배후에서 지도하고 농민협회 등이 앞장서서 지도한 데서 전일의 숨은 지도를 자료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뿐이다. 그때 전일의 아들 전혁이는 공청단화룡현위 서기로서 당조직의 위임을 받고 현농민협회책임자 구성태(렬사)와 함께 개산툰일대 추수투쟁을 지도하러 갔다.

추수춘황투쟁 가운데서 달라자유격대가 조직되여 맹활약을 보였다. 금곡마을의 동북방 산속수리바위 재등에는 제법 병기공장까지 세워져 유명한 ‘연길작탄’ 등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10년대 후반 로씨야 연해주 시절 무장을 들고 일제침략군과 백파놈들과 싸운 전일이의 직접적인 지도와 갈라놓을 수 없다.

했으나 군중적 추수춘황투쟁은 당조직이 지도했지만 당, 단 조직을 비롯한 혁명조직을 로출시킨 비극도 초래하였다. 연변주서류관 자료 3049에 의하면, 1962년 9월 5일 김규선이 항일선배인 구선일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전일이 달라자에서 추수춘황을 직접 리면에서 지도한 분이라고 증실하였다.

구선일의 구술에 의하면 1932년 춘황투쟁시기 남양평과 룡정 등지에서 일제경찰 37명이 동원되여 달라자일대 혁명가 16명을 체포하였다. 이들 16명은 밤에 마차에 실려 갔다. 가는 도중 2명이 빠져달아나고 나머지 혁명자들은 대부분 며칠 후에 풀려나왔다. 그때 16명중에는 전일도 섞이였는데 그는 룡정의 총령사관을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였다. 그뒤 그는 옥중에서 적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다가 1938년경에 혁명가의 최후를 마치였다고 한다.

이는 그대로 전일전기를 이루면서 2007년 10월 민족출판사 출판으로 된 《겨레 항일지사들》 제2책에 수록되였다. 그러나 최근년간에 수집한 한국의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 자료들은 당년 화룡현 달라자에서의 활동과 체포, 서대문형무소 등 현실과 판이하게 다르다.

관련 한국자료에 의하면 전일은 1928년에 중국국민당 및 만주의 고려혁명당과 연락을 취한 일로 간도일본총령사관 경찰에 의해 3년간 재류금지(在留禁止)를 당하였는데 이를 위반하였다고 하여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 다시 1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전일은 동아일보 길주지국 기자로 근무하다가 1929년 7월 신간회(新幹会) 복대표위원회(複代表委員会)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가하여 활동하던중 체포되여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석방된 뒤에는 로씨야 연해주로 다시 망명하여 하바롭스크에서 주(州)직업동맹 인쇄소 교정담당자로 일하다가 1937년 3월 18일에 체포되여 1938년 4월 15일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5월 11일에 하바롭쓰크에서 총살되였다. 전일은 일제의 탄압으로 선후 3차례에 걸쳐 1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항일혁명가였지만 애매하게도 그 시절 쏘련 연해주땅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1957년 3월 13일에 원동주 군사재판에서 범죄 무혐의가 립증되여 복권되였다.

전일에 관해 이같은 자료도 있음을 그대로 밝히면서 이후의 전일연구에 도움을 주려고 한다. 전일의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옥사자료도 아직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석방뒤 연해주행, 하바롭쓰크에서의 희생 자료를 배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하든 항일혁명가이고 사회주의자로서의 전일은 길지 않은 자기의 한생을 다바쳐 조선에서, 로씨야 연해주에서, 연변에서 일본침략자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다가 쓰러졌다. 전일 뿐아니라 그의 안해와 그의 아들딸 세 식구도 항일전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으니 그의 영향으로 항일에 나선 그의 가족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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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20년대에 걸쳐 전일이 밖으로 돌며 거듭 옥살이로 보낼 때 그의 안해 최인진은 가정의 중임을 한 어깨에 떠메고 오누이를 극진히 키우는한편 시아버지를 잘 모시였다. 동네 이웃들도 힘자라는 대로 도와나섰다. 집에는 석마칸이 있어 곡식 찧으러 오는 사람은 꼭꼭 쌀되박을 남겨놓는다. 그러면 인진이는 그런 쌀을 남겼다가 쌀없는 집에 나누어주군 하였다. 옷과 덮을 것도 서슴없이 내주는 성미이다. 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어느덧 오누이가 학교갈 나이가 되였다. 이들이 때때옷을 입고 책보를 안고 개산툰삼동포사립학교로 달려갈 때 인진이는 동구밖에까지 나가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떠나가는 남편을 바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는데 오늘은 또 오누이를 배웅의 길에 내세우니 가슴이 찡해났다.

1928년에 아들 전혁이와 딸 신은이는 삼동포사립학교를 마친 뒤 룡정으로 가서 사립대성중학교와 명신녀고에 다니였다. 그러던 이들 오누이는 학교에서 로씨야 10월혁명의 영향과 맑스주의학설을 접수하면서 서슴없이 혁명이란 이 직업을 선택하였다. 그때부터 최인진은 남편을 받들던 것처럼 또 아들딸을 받들며 든든한 뒤심이 되여주었다.

1930년 5.30폭동 이후 아들 전혁이는 룡정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당조직의 지시를 받고 개산툰에 돌아와 그해 가을 개구의 대중 적추수폭동을 지도하였다. 1931년봄 이후에는 또 공청단 화룡현위 제1임서기 중책을 짊어졌다.

아들의 뒤를 이어 최인진도 딸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되였다. 식구모두가 중공당원이다. 딸은 중공후동지부 위원이요, 인진이는 후동당지부 부녀회 책임을 맡았다. 따라서 집은 자연히 동지들의 활동장소로 되였다. 외지혁명자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인진이는 딸과 더불어 동지들의 시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외지로 떠날 때면 자기 집을 아예 동지들에게 내맡기였다. 1931년 그해 시아버지가 불귀의 세상으로 떠났다. 인진이는 시아버지의 후사를 치른 뒤 부녀회사업에 더욱 몰두하였다.

1931년 겨울, 대구일대에 가서 활동하던 아들 전혁이는 회의를 하던중에 적들의 불의습격을 받았다. 그는 미처 신도 신지 못하고 맨발바람으로 내닫다가 두발에 심한 동상을 입었다. 그는 고향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주구들이 눈을 밝히는데서 집에 들지 못하고 혁명자 오일남의 뒤고방에 숨어있으면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기간에도 그는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추수투쟁 후 적들의 준동이 날로 심해지는데서 투쟁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전혁이는 매일과 같이 포스터를 쓰고 삐라를 찍어 각지 조직에 보내주었다. 1932년 초의 어느 날 전혁이는 밤중까지 삐라를 찍어 어머니에게 주어 북노루골에 보내고서야 새벽잠에 들었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자 주구의 밀고를 받은 팔도하자경찰서 놈들이 마차를 가지고 도적고양이마냥 옥동포 오일남의 집을 조이며 들어왔다. 전혁이는 뒤늦게야 조성된 사태를 헤아리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방문을 박차고 필사적으로 옥동포뒤산으로 올리 달았다.

적들은 총을 쏘며 뒤쫓아왔다. 갑자기 전혁이는 몸에 적탄을 맞고 비칠거렸다. 포위를 헤치기란 백번도 글렀다. 최후를 각오한 전혁이는 결연히 돌아섰다. 적들이 바로 그의 발밑까지 따라섰을 때 그는 원쑤놈들을 쏘아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올라 오너라, 전혁어른이 여기 있다. 이 야수같은 놈들아…”

이어 그는 온몸에 힘을 주며 섬나라 오랑캐들이 무슨 리유로 이 땅에까지 들어와서 무고한 인민을 살해하는가, 너희들 상관을 위해 개목숨을 팔지 말라, 혁명은 꼭 승리한다 등 내용의 선동강연을 했다. 선동강연이 어찌도 사리에 맞고 피가 끓는지 적들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잇달아 “중국공산당 만세!”, “중국혁명성공 만세!” 등 비장한 구호소리가 울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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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혁이는 드디여 중과부적으로 체포되였다. 적들은 전혁이를 마차에 싣고 그 길로 후동곬을 지나 산굿이 장대를 넘어갔다. 그날 최인진은 아들이 주는 삐라를 품에 간직한채 새벽길을 떠나 약 20리 떨어진 북노루골로 갔다가 한낮 때에야 돌아왔다. 헌데 웬지 마을은 전에 없이 조용하고 뭔가 분위기가 달라보였다. 뒤늦게야 아들의 불의지변을 알게 된 최인진은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해났다. 남편이 적들한테 끌려갔는데 또 아들까지 잡히니 한동안 실신한 사람 같았다.

그날 밤에 개구구위와 후동지부의 동지들이 최인진을 찾아 위문하였다. 이때의 인진은 이미 마음을 정리한 뒤여서 동지들은 뜻밖에 ‘호된 견책’을 받게 되였다.

“찾아주니 고맙소. 그래서 이 마음이 무거워나는구만. 혁명하자면 이런 일이 가끔 있기가 마련인데 오긴 왜 왔소? 적들이 우글거리는 판에 봉변이라도 당하면 내 마음이 편하겠소? 동무들이 진정 나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내 아들을 위한다면 어서 돌아가 주오, 어서.”

동지들은 이 평범한 조선족녀인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1932년 초봄의 일이다.

적들은 전혁을 팔도하자경찰서에 싣고갔다가 다시 룡정의 총령사관에 넘기였다. 그자들은 심문을 받을 처지도 못되는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한다 하는 의사를 청하며 복새판을 피웠다. 그의 입을 열기 위함이였다.

하나 전혁이의 상처는 조금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설사 정신을 차린다 해도 조직의 비밀을 루설할 그가 아니였다.

전혁(1911ㅡ1932)은 혁명의 승리를 그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치였다. 적들은 유체를 해란강가의 버들밭에 아무렇게나 파묻었다. 적들이 눈을 밝히는 데서 전혁의 5촌 큰아버지 전인보 로인이 룡정에 찾아가 렬사의 유체를 룡정우의 허청리에 고이 묻었다.

1932년봄 이후 일제놈들은 화룡현개산툰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대‘토벌’을 개시하였다. 한동네에 있던 최인진이의 남동생도 혁명에 나섰다가 집에서 체포되여 그 자리에서 피살되였다. 최인진과 딸 신은이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적들은 그들 모녀를 귀순시키려고 미쳐 날뛰였다. 이때 최인진이는 당지부회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무엇 때문에 그놈들앞에 굽어들겠는가. 내 아들을 죽이고 남편도 잡아가더니 우리 모녀마저도 귀순시키려구? 흥, 어림두 없지!”

언제나 락관적인 최인진이는 놈들을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더는 마을에 배기지 못하고 조직의 알선으로 달라자 칠도구(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 신동-선바위 앞 서남쪽 골안을 가리킨다.)일대로 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이해 1932년 겨울과 1933년 초, 최인진과 딸 전신은은 칠도구일대에 대한 적들의 거듭되는 준동에서 비장한 최후를 마치였다. 그때 최인진은 40대의 녀인이였고 신은이는 20살의 한창 꽃피는 나이였다. 그뒤 최인진의 남편 전일이까지 항일의 싸움터에서 희생되니 일가 식솔 넷은 모두가 일제를 몰아내는 항일의 성전에서 쓰러진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중공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이던 1983년 11월 25일, 필자는 안도현 복흥향 광흥촌에서 전일의 안해 최인진 렬사의 사촌동서의 며느리인 박명숙(1913년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박명숙은 필자에게 광복 후에 전혁, 최인진, 전신은 세 렬사의 렬사증은 단번에 세장이 내려 왔지만 전일이의 렬사증은 없었다며 락루하던 일이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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