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서, 또 하나의 비범한 혁명가

2018-10-15 08: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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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1930년, 이해 연변에는 우리 당조직이 지도한 대중적 5.30폭동과 중공에로의 합류,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약수동쏘베트,  성세호대한 8.1길돈폭동, 평강구, 개산툰구, 라자구 등지에 지방유격대가 조직되는 거대한 사건들이 련속부절히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중공당원 박윤서(1896년ㅡ1939년)와 관련되고 있으니 1930년도 제반 투쟁은 박윤서를 떠나 제대로 론할 수가 없다. 박윤서(朴允瑞)는 연변 당조직의 지도하에서 이해 1930년 일련의 투쟁을 직접 발기하고 지도한 비범한 인물이였다.

룡정 비암산에서 본 오늘의 룡정시 룡정 모습. 룡정은 그제날 연변 5.30폭동의 중심지였다. (2016년 8월 27일 현지촬영)

박윤서는 일명 박형세(朴衡世)로서 1896년생이고 로씨야 연해주사람으로 선참 알려졌다. 1917년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폭발하고 로씨야 극동지역의 조선인들이 일제의 공공연한 침략을 반대하고 백파군과 싸울 때 박윤서는 이 위대한 투쟁에 뛰여들어 용감히 싸웠고 1921년에 리동휘의 공산당 ‘상해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에 대한 자료가 보이지 않아 아직 그 이상은 더 알 수 없으나 박윤서가 이미 맑스주의를 접수하고 조기 조선인 공산주의자로 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

1921년 10월 1일에 연변 룡정에 사립동흥중학교가 세워졌다. 잇달아 상해파의 수령 리동휘 등이 상해에서 지하간행물 《새벽종》 잡지와 기타 소책자들을 룡정의 몇개 중학에 보내여왔다. 뒤미처 박윤서는 상해파의 파견을 받고 주청송 등과 함께 쏘련 연해주로부터 룡정에 와서 동흥중학교내에 ‘사회과학연구회’, ‘친목회’등을 조직하고 맑스주의사상을 전파하였다. 그 뒤 박윤서는 조공당 엠엘파 만주총국 군사부장의 책임으로 연변에 나타나고 연해주로 오가면서 화룡현 평강과 개산툰, 룡정, 라자구, 돈화, 녕안 등지에 조공당 엠엘계통의 기층지부를 널리 조직하며 광범한 조선족군중을 불러일으켜 반제반봉건투쟁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박윤서 연구에 따른 박윤서의 초기발자취가 그러했다. 2007년 10월, 민족출판사 출판으로 된 필자의 저서 《겨레 항일지사들》 제1책에 수록된 박윤서전기도 이런 연구결과의 기록이였다.

그러나 일제측 ‘일본외무성특수조사문서’에 의하면 이와 많이 다르다. 일제측 자료에는 박윤서는 일명 박호림(朴虎林)이고 원적이 황해도 송화군 련방면 백화리(黄海道松禾郡莲芳面白华里)147번지로 나타난다. 고향에서 그는 19살 젊은이로 자라났는데, 생활이 어려워 고향의 박상원(朴尚元) 댁과 의사 서광호(徐光浩) 댁에서 머슴으로 4년을 보내게 된다. 1926년 2월 27일에 박윤서 일가는 살길을 찾아 중국행에 오르면서 신경(新京,즉 장춘)을 거쳐 반석현 호란집장자(呼兰集厂子)로 이주한다. 그 후 1929년 3월에 자기 동지들과 더불어 남만청년동맹을 조직하며 1930년 12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함을 보인다.

여기 단락은 일제측 자료에 의한 것으로서 20년대 초반과 중반 연변에서 맹활동한 박윤서의 실제 초기발자취와 판이하게 다르다. 또 지난 20년대 전반에 걸치는 박윤서는 사회주의자이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엠엘파의 저명한 수령인물로서의 빛나는 경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일제측 자료에 보이는 박윤서는 1926년 이후에야 조선민족주의단체 정의부에 참가하고 남만청년동맹에 가입한 평범한 혁명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박윤서가 그 시절 남만의 반석, 이통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견지하다가 1933년 1월 25일, 일본놈들에게 불행히 체포된 후 일찍 20년대 연해주와 북만, 동만에서의 모든 활동을 루설하지 않은 데 기인되는 것 같다.

5.30폭동의 중심지 룡정거리 일각. 1932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제1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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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든 20년대 후반의 박윤서는 연변을 주요무대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이였다. 1928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엠엘파)가 직접 지도하는 강학제 등 7명으로 구성된 ‘철혈단’을 꾸리고 자금을 준비하여 반일무장단체를 내오며 특무, 주구를 숙청하며 무장투쟁을 진행하는 것을 주요과업으로 내세웠다. 강학제연구에 따르면 그들 철혈단은 천도선렬차에 올라 적들을 습격하다가 달리는 렬차에서 뛰여내리기도 했으니 이는 그 시절 《동아일보》 관련뉴스에서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가 있다.

1930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7면 기사에 따르면 며칠 전 2월 27일 “백주에 룡정시 제4구 7통 19호에 철혈단원 2명 침입하여 협박하다가 일본 령사관 경찰서원의 손에” 하나가 ‘즉사’하고 하나가 중상입었는데 그 ‘두 범인’이 얼마 전 ‘철도습격범’들이라고 한다. 1930년 3월 17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는 이들 ‘무장단 수명이’ 룡정 밖에 은신한 룡정시 제4구 7통 19호 주인 장동진을 찾아 권총으로 쏘아죽였다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철혈단원이고 무장대원들이 바로 박윤서가 조직하고 지도하는 무장대였다.

이들 무장대의 활동은 그에만 그치지 않았다. 박윤서와 강학제, 김철 등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재지인 북만 녕안현의 녕고탑을 중심으로 강습소를 꾸리고 선후 수백명 남녀투사를 양성해내고 동만과 북만에서 반동분자를 소탕하고 10만여원에 달하는 고리대문서를 빼앗아 소각해버리고 부호의 곡물 300여석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시기 박윤서의 활동을 알리는 자료는 일제측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통하는 <간도공산당사건>에도 잘 알려진다. 1928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제2면 기사에는 “피고 한일(韩一)은 재작년 11월초순경에 자택에서 만주총국의 당원 김복만(金福万)과 박윤서의 권유로 그의 소속 동만국역구에 입당”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1932년 4월 24일자 《동아일보》 제4면 기사 <함북공산당>에도 “피고 최정호 등은 사회과학에 관한 서적 및 잡지를 탐독한 결과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왕청현 춘명향 활동시절 “공산국제파견원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간부인 박윤서”의 교육하에서 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공산주의자로 되였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동아일보》로 보는 혁명가 박윤서의 혁명활동 축소판이려니 아래 몇개 부분으로 나누어 1930년의 큼직큼직한 활동들을 거론하면서 박윤서의 위인됨을 헤아려보기로 하자.

1930년 5.30폭동에서 사용한 5.30폭동 참가자들이 사용한 무기와 탄약. 1932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제1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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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공산당에로의 합류

1925년 4월에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단체들인 화요회(이르크쯔크파), 무산자동맹회(서울, 상해파), 북풍회(북풍파) 등은 련합하여 서울에서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건립하고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제3국제공산당의 한개 지부로 되였다. 1926년 5월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녕고탑에 세워지고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3개 구역국을 세웠다. 그중 동만구역국(즉 동만도)은 만주총국의 핵심조직이였는데 박윤서의 역할이 자못 컸다.

헌데 1928년초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엠엘파, 화요파, 상해서울파로 분렬되여 파벌투쟁으로 차고넘친다. 이에 비추어 1928년 12월에 국제공산당에서는 지령, 즉 ‘12월 테제’를 내려 조선공산당 파벌조직을 해산하고 ‘일국일당(一国一党)’의 원칙에 좇아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건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1930년 1월에 할빈에서 ‘재만중조량당 간부련석회의’가 열리였다. 련석회의에는 중공중앙의 파견을 받고 온 중화전국총공회 상무위원 소문과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한빈, 리춘산 그리고 중공만주성위와 재만조공당 화요파, 엠엘파, 재건파의 거두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어떤 동지들은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동의하지 않았으나 박윤서는 화요파, 엠엘파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재만조선공산당 각파의 당원들이 중공에 가입하는 것을 견결히 지지하여 나섰다. 회의 후 박윤서는 오성륜 등과 함께 1930년 3월 20일에 엠엘파 만주총국의 이름으로 첫 해산선언을 발표하고 430명의 조공당원들이 개인신분으로 중공 여러 조직들에 참가하였다.

1930년 4월, 박윤서는 남만의 반석현에서 중공당에 가입하고 오성륜, 진공목 셋이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 사업위원으로 임명되였다. 이들 셋은 모두가 원 조선공산당 엠엘파의 당원들이여서 다른 파의 강렬한 반대를 야기시켰다. 했건만 오성륜은 남만으로, 진공목은 북만(북만에 갔으나 그는 배기지 못하고 돌아왔다가 동만에 나오게 됨)으로, 박윤서는 동만으로 파견되여 중공만주성위 순시원(또는 특파원)의 신분으로 조선공산당원을 중공당원으로 합류하는 사업을 직접 지도하게 된다.

그 시절의 박윤서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 원칙을 접수하고 견결히 중국공산당의 켠에 섰다. 문제로 되는 것은 이들 셋이 모두 엠엘파로서 다른 파의 반대를 받을 만도 했으나 이는 박윤서 개인의 착오만으로 볼 수가 없다.

1930년 5.30폭동 폭동지점 지도. 1932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제1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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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붉은 5월 투쟁과 5.30폭동

1930년 4월에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좇아 ‘5월 투쟁 계획’을 제정하고 토지혁명과 쏘베트정권을 건립할 두개 대목표를 내놓았다. 이에 따라 박윤서는 4월 24일에 화룡현 용신사 동량 어구인 승지촌 하승리에서 김근(렬사)을 총책임자로 하고 김철(렬사)을 총지휘로 하는 ‘폭동지휘부’를 조직하고 5.1투쟁위원회를 내왔다. 연해주에서 온 녀성혁명가 리금옥(즉 리정숙)이 폭동지휘부의 포치에 따라 폭동격문을 살포하는 책임을 짊어졌다.

유감스러운 것은 5.1투쟁행동위원회가 청일색의 조선공산당 엠엘파의 단독 위원회라는 점이다. 책임면에서 만주성위 순시원 박윤서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겠지만 주요책임은 동만특별지부 서기 왕경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 특별지부에는 왕경외에도 화요파의 동만도 책임자들인 김창일, 한별(즉 김인묵) 등이 있었기에 왕경의 한마디면 공동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1930년 5월 1일, 룡정의 로동자들과 학생들이 선참으로 파업,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붉은 5월 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잇달아 1930년 5월 29일 밤 10시경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의 지방혁명자 수십명이 명신사 단포동(흥륭촌 일대) 뒤산에 모이여 5.30폭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일본놈들이 드나드는 평양려관, 조선인민회(주구단체) 사무실, 주구 김일로, 로명창 그리고 리영춘 등 지주집들에 불기둥이 솟았다.

평강벌 투도구일대의 폭동대는 해란강을 계선으로 수남, 수북 폭동대로 나뉘여 투도구의 조선인민회 사무실을 태워버리고 시가지 안의 몇몇 주구들 집에 불을 질렀다. 곳곳에서 작탄이 작렬하였다. 룡정과 이도구, 삼도구로 통하는 전화선이 단절되였으며 일제 투도구령사분관 담벽에 탄알흔적이 어수선하였다.

1930년 5월 30일 밤에 룡정과 그 일대 군중 100여명이 룡정 동산 대륙고무공장 부근에 륙속 모여들었다. 이어 한 책임자가 폭동을 선포하면서 이밤 룡정을 까막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폭동대원들은 3개 조로 나뉘여졌다. 그중 한개 대는 룡정역 부근의 발전소에 쳐들어가 새로 가설한 배전판 설비들을 짓부셨다. 룡정과 투도구는 삽시에 까막나라로 되여버렸다.

한개 대는 룡정 우장리에 있는 동점복의 철공장 일부와 곡물상 김명희 집에 불을 달았다. 강학제 등이 뿌린 작탄 하나가 폭발하여 동양척식회사 간도파출소 사무실에 대한 파괴가 컸다. 다른 한개 대는 조선으로부터 증원병을 막고저 룡정 동쪽에서 조선으로 통한 전선대를 넘어뜨리고 전화선을 끊어버렸다.

1930년 5.30폭동은 5월 29일 밤부터 5월 31일 새벽까지 투도구, 이도구, 삼도구, 사도구와 룡정, 개산툰, 천도철도 연선의 조선족 혁명군중들이 일제히 일어난 대중적인 폭동이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해당 통계자료에 의하면 폭동군중들은 일제주구의 가옥 19채에 불을 지르고 천도철도다리 네곳을 파괴하고 전화선 10여갈래를 절단하고 발전소 한곳을 훼손시키고 조선총독부 보조서당 5개소와 조선인민회 여러 곳을 불살랐다. 당시 《간도일보》와 《민성보》는 간도 18개 민회(주구단체)가 전부 소각되였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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