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서, 또 하나의 비범한 혁명가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4

2018-10-29 09:18:58

1930년 7월 28일, 박윤서는 김명균 등과 같이 돈화현 관지에서 폭동준비회의를 소집하고 폭동대를 7개 파괴대와 2개 습격대로 나누었다. 7월 31일 밤 10시, 폭동은 돈화, 액목, 교하 등 넓은 범위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파괴대는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고 전주와 전화선을 끊어버려 길회철도, 길하철도를 마비상태에 빠뜨렸다. 습격대는 당지의 여러 경찰서와 공안국을 습격하여 보총 16자루와 1000여발 탄약을 탈취하고 보안대의 병영 아홉칸을 불살랐다.

박윤서가 지도한 8.1길돈폭동은 이튿날 8월 1일까지 지속되였다. 이에 반동당국은 ‘8.1폭동은 세계 공산당이 일으킨 대규모운동’이라고 놀라 부르짖으면서 현지에 많은 군경을 풀어 미처 피하지 못한 폭동대원 139명을 체포하였다. 폭동은 비록 적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기는 했으나 5.30폭동에 이은 또 하나의 대규모 군중무장폭동으로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국민당 군벌정부를 크게 타격하였다.

박윤서의 이른바 두번째 ‘중대한 착오’는 개인관계로 유격대를 지휘하여 연화유격대의 ‘도목구…실패’와 흩어진 운명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력사사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박윤서 관련 화룡현 약수동쏘베트정부 유적지를 현지답사한 인터넷동아리 력사동네 민속동네 회원들. (2017년 8월 3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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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서는 상기 지적과 같이 조공당시절에 만주총국 엠엘파 군사부장으로서 1928년 겨울에 벌써 반일무장단체-철혈단을 조직하였다. 그가 발기하고 조직한 5.30폭동은 사실상 무장폭동으로서 폭동중 각지 엠엘계통에서 준비한 토제작탄과 렵총, 권총 등은 폭동의 승리적 진행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후 박윤서는 동만특별지부 군사부장의 신분으로 1930년 6월에 개산툰 학성에서 연변의 첫 유격대-개산툰유격대를 조직한 뒤 7월에는 또 중공평강구위와 신춘을 도와 평강구유격대를 조직하고 성위의 지시에 따라 그 이름을 ‘로농홍군’으로 부르고 대외로는 ‘연화유격대’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해 10월에 왕청현 라자구에서 조직된 라자구유격대, 즉 왕청현유격대도 박윤서 등의 지도와 지시로 조직되였다. 라자구유격대 대장 김세훈은 박윤서가 녕안과 라자구에서 활동할 때의 조공당 엠엘파 당원이고 수하 동지였다.

8.1길돈폭동이 폭발한 후 박윤서는 동만특별지부 및 평강구위 지도자들과 상의하고 개산툰유격대가 연화유격대에 가담하여 7월말 8월초 사이 8.1길돈폭동을 성원하러 떠나게 하였다. 가는 도중에 이들 유격대가 도목구에서 우세한 중국륙군대의 돌연습격으로 엄중한 좌절을 당한 것은 유격대의 무기결핍과 전투경험이 없는 등 탓이지 박윤서가 당의 책략과 로선을 위반하고 개인관계로 유격대를 지휘한 것이 아니였다.

연화유격대는 화룡현 도목구에서  일부 희생자와 체포를 초래하였지만 유격대는 파괴되지 않았으며 다시 재조직되여 맹활약을 보이였다. 평강구유격대가 그러했고 개산툰유격대가 그러했다. 박윤서는 또 동지들과 조직의 신임을 받아 1930년 8월 13일 화룡현 약수동에서 탄생한 중공연화중심현위 제1임 군사부장 중책을 짊어졌다.

그다음은 박윤서 당적 개제의 ‘중대착오’로 된 ‘자유행동’ 문제이다. ‘통지 제6호’에 의하면 연화현위에서 박윤서에게 ‘20일간의 시간을 주어 모지에 가서 모종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는데 5개월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신련락마저 없었다.’하여 특위에서는 ‘공공연히 당조직을 떠났다.’고 점찍고 있는데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박윤서는 연화중심현위가 존재한 1930년 10월까지 줄곧 중심현위 군사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달 10월에 연화중심현위가 연화현위로 개칭된 후 신춘이 현위 군사부장책임을 이어받는다. 어떻게 하여도 ‘공공연히 당조직을 떠난’ 지 5개월이 되지 않는다.

박윤서의 행방을 두고 필자는 10여년 전에 이미 많은 력사자료를 뒤지였다. 그러나 그 시절 연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자료들에서는 박윤서의 활동이 1930년 10월까지 되여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필자는 지난 80년대초에 이미 당년 조공당 화요파 중요인물이고 고려공청만주총국 선전부장이였던 량환준 항일로간부를 수차 방문하였다. 량환준 항일로간부에게서 들은 소식은 “듣건대 쏘련에서 그를 불러다 밀정으로 처결하였다.”는것. 1971년에 형성된 화룡시 해당 자료중 박윤서의 간력에도, 연변서류관의 해당 자료들도 마찬가지, 그 후는 전혀 깜깜부지였다.

박윤서가 참가한, 화룡시 약수동 옛 상촌 마을터에 세워진 중공연화중심현위 탄생 유적비. (2017년 8월 3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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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8월 13일부터 10월까지 박윤서의 행적을 힘자라는 대로 추적하여 보았다. 추적 가운데서 연화중심현위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던 박윤서의 이른바 당적 개제를 두고 그의 생평을 개괄적으로 언급하면서 1930년도의 대사건들과의 련관 속에서 분석, 대비하여보았다. 결론은 하나다. 박윤서 당적 개제의 세가지 ‘중대한 착오’는 엄중히 과장되여 놀라울 지경이다. 실상 박윤서는 결함과 착오가 있고 도목구 실패로 한때 군중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중국공산당을 믿고 따른 견실한 공산주의자이다.

지난 세기 20년대 후기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크게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로 분립되여 파벌투쟁이 심각한 상태였다. 게다가 1930년 봄의 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 3명 위원 모두가 엠엘파 인원들로 구성되여 새로운 분쟁의 불씨를 묻어두었다. 원 화요파계렬의 중공당원들은 엠엘파, 더우기 박윤서를 극단적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엠엘파라고 하면 저쪽으로 보는, 화요파의 중요인물 량환준 선생의 글과 말에서도 쉽사리 보아낼 수 있다. 이러한 인물 박윤서가 1930년 4월에 만주성위 순시원의 신분으로 연변에 왔고 자기파에만 의거하여 활동하니 화요파 등의 미움은 극도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 5.30폭동 때 화요파는 대단히 피동적이였다. 폭동의 주체는 엠엘파 당원들이며 5.1투쟁행동위원회의 전부가 엠엘계통으로 이루어졌다. 그 시기의 약수동쏘베트나 8.1길돈폭동, 개산툰유격대도 모두 조공당 엠엘파들에 의해 전개되였고 평강구유격대와 라자구유격대의 지도자와 핵심은 모두 엠엘파 성원들이였다. 원 조공당 화요파 등에서 이를 곱게 받아들이고 정당하게 평가할 리가 만무했다. 물론 엠엘파 등 당원들이 투쟁의 시련을 거쳐 중공당조직에 가입하고 박윤서가 중공당조직에서 중책을 맡은 이후의 사정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 시기의 박윤서는 이 파, 저 파를 막론하고 중국공산당 조직체로 행동해가는 세련된 혁명가였다.

그외 1930년도의 거의 모든 대사건들이 모두 박윤서와 관계된다. 성과가 출중하고 남들보다 일을 많이 하니 쉽게 남들의 말밥에 오르고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이는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통병인데 박윤서의 경우라 하여 례외일 수 없었다. 필자는 중공연화중심현위의 성원들을 주의하여 보았는데 서기 왕경을 망라한 절대다수가 화요계 성원들이였다.

그제날 연변 5.30폭동의 중심지 룡정시 룡정 도심에 세워진 거룡비. (2016년 9월 7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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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5.30폭동 이후 연변의 원 조선공산당 화요파, 엠엘파, 상해파 등 여러 분파의 사람들은 중국공산당 조직에 가담한 후에도 서로의 불신임은 보통정도가 아니였다. 화요파 출신의 중공당원들로 말하면 박윤서의 이런저런 결함과 착오를 서슴없이 리용, 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간도공산당사건’과 그 체포자, ‘법적 처리’ 과정을 전문 다루었던 《동아일보》에도 박윤서 관련 소식이 실리였다.

1933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 2면 관련 기사에는 그 시절의 원 조선공산당 여러 파벌들의 알륵과 투쟁이 기사화되고 있다. 상해파에 속한 윤자영, 김하구 등  80여명이 출당처분을 당하고 다시 자기들 진영을 정비한 윤자영 등은 출당조치를 당한 박윤서와 그의 일파를 다시 입당시키고 등등. 이들 파벌투쟁을 둘러싼 처음의 의문과 추측이 사실로 드러나고있었다.

력사사실이 이러할진대 1930년 12월 17일의 ‘중공동만특위 통지 제6호’는 착오적이기에 이 ‘통지 제6호’에 근거하여 박윤서를 나쁘게 평가할 수 없다. 박윤서는 결함과 착오가 있고 한때 자기파에만 의거한 엄중한 단점도 있긴 하나 맑스주의를 견지하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한 견실한 혁명가임은 드팀이 없다. 이는 최근년간에 비로소 알려지는, 그 후의 박윤서의 행적이 이를 잘 알리고 있다.

1930년 10월 이후의 박윤서, 이른바 당적 개제 후의 박윤서는 쏘련에 끌려가 밀정으로 처단된 것이 아니였다. 그는 이른바 당적 개제로 연변에서 활동을 견지하기가 어렵게 되자 자기가 살며 활동했던 남만의 반석현일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 반석일대에서의 활동을 이번에도 《동아일보》가 알리고 있다.

1933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제2면 기사 <농민동맹원>에 의하면 수일 전 신경령사관 경찰서에서 김동호 등 농민동맹원 10여명을 검거했으니 그들 가운데는 박윤서도 들어있었다. 박윤서 등은 길림성 이통현 삼도구 조선인부락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하는 한편 여러가지 활동을 드세게 벌리였다. 그러다가 체포된 것이 1933년 1월 25일로 알려진다.

1935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 제2면 기사-<반석공산당사건>에 박윤서의 활동내막이 밝혀진다. 《동아일보》는 일제측 ‘예심종결’이 박윤서를 ‘반석방면에서 농민운동을 하든 엠엘파의 맹장’이라 한다면서 36세의 박윤서외 12명은 ‘드디여 당을 조직하고 동지 300여명을 규합하여 소화 7년(즉 1932년) 3월경 ×× 일으켜 반석현 곽가점을 비롯하여 부근 11개 소의 촌락에서’라는 활동내막을 알리고 있다.

이 같은 활동내막이 드러나 박윤서는 불행히 일제놈들에게 붙잡히게 되였다. 박윤서의 본적도 황해도 송화군 련화리(莲华里)라고 기사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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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측 검거와 심문을 통한 《동아일보》 관련 기사가 이러하다면 일제측 자료 《일본외무성특수조사문서》 제42권에도 남만에서의 박윤서의 활동이 비교적 상세히 알려지고 있다.

반석현일대로 전이한 후 박윤서는 그 해 1930년 12월에 중국공산당에 다시 가입하게 된다. 1931년 1월에는 당이 지도하는 반석현 호란집장자(呼兰集厂子) 농민협회에 가담하여 농민협회 토지소득(土地租得) 위원으로 활동한다. 그해 1931년 12월에는 리구일(李九一), 한진(韩震) 등과 상의하고 공산당유격대를 조직하고 호란집장자유격대 대장으로 유격활동을 벌려간다.

1932년 2월 박윤서 등은 반석현 호란집장자에서 군중대회를 가지고 농민협회 투쟁을 상의하면서 한패의 일제 주구들을 청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박윤서 등 약 20명은 1932년 3월초부터 5월에 이르는 사이11명의 친일 주구를 끌어내다가 투쟁하고 청산해버리였다. 그로 하여 적들의 준동이 가심화되여가자 박윤서 등은 조선의 피난농민으로 위장하고 남만철도 연선에 숨어들었다.

1933년 1월초에 박윤서는 영길현 남산 제7구 오리하자(五里河子)에서 하마트면 적들에게 체포당할 번하였다. 1월 18일 박윤서는 신경(新京)에 이르고 20일에는 조선으로 달리는 렬차에 올랐다. 신경령사관 경찰서 놈들이 이 정보를 탐지하고 1월 23일에 조선측 송화(松禾)경찰서에 알리였다.

1933년 1월 25일, 박윤서는 끝내 조선측 송화경찰서에 체포되여 신경령사관 경찰서로 압송되였다. 같은 시기 박윤서와 같이 활동하던 여러 동지들도 체포되여 신경령사관 경찰서에 갇히였다. 이어 박윤서는 적들의 심문을 받았으나 리구일 등 간부들의 지령하에 일제 주구 몇몇을 죽인 것만 승인하고는 일체 활동을 승인하지 않았다. 당연히 연변에서의 혁명활동은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

옥살이 속에서 여러 해가 흘러갔다. 1939년 2월 20일, 일본관동지방법원은 제1심 판결을 내리고 박윤서 등 6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사형 또는 무기형, 유기형에 처하였다. 적들은 박윤서와 김도환(金道焕)을 치안유지법 위반, 소란, 강도살인 등으로 사형에로 내몰았다. 오랜 시련을 겪은 항일혁명가 박윤서, 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이고 중공연화중심현위 군사부장이였던 박윤서는 이렇게 항일의 싸움터에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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