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화와 유태봉 유태성은 3부자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5

2018-11-05 08: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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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 발전 뒤 원 흥안향 실현촌 밭자리에는 ‘28명 렬사순난지’(二十八位烈士殉难地)가 있어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곳 순난지 비문에는 유중화(俞仲华)와 유태길(俞泰吉), 유리길(俞利吉)이라는 이름도 새겨져있는데 사람들은 이들이 한가족 3부자임을 잘 모른다. 이들 3부자에서 유중화는 아버지고 유태길(형이고 본명 유태봉)과 유리길(동생이고 본명 유태성)이 아들인데, 비문에는 유중화, 유태길, 그리고 유리길은 유리길과 유태성 두 사람으로 표기되여 유감을 준다.

항일렬사 유중화(俞仲华)와 이들 3부자 명함을 처음 듣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81년 3월 8일의 일이다. 그때 연변대학 조문학부 78년급 재학생이였던 나는 항일로간부인 연길 량환준 로인의 알선으로 룡정에 가서 항일로간부인 유영효(俞英晓, 1911년생)로인을 취재하게 되였다.

28명 렬사중의 한사람이고 당년 중공연길구위 서기였던 조기석 렬사의 딸 조계숙 일가와 박경훈 렬사의 아들 박룡갑씨. (2003년 4월 5일 현지촬영)

유영효는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 시절 공청단동만특위 산하 공청단연길구위 서기로서 그 시절 당, 단 연길구위와 중공연길구위에서 조직한 1931년 가을 추수투쟁과 1932년 봄 춘황투쟁, 지금의 연길시 28명 렬사순난지 사실을 잘 알고 계시였다. 그 과정에 들은 것이 연길시 28명 렬사중의 한사람인 유중화 렬사였다. 유중화의 아들 유태봉과 유태성 3부자 모두가 그날 희생되였다는 눈물나는 이야기.

1981년 그해 3월과  5월, 7월 나는 룡정으로 수차 다니며 유영효 로인한테서 그의 고모부인 조기석 렬사와 유영효 로인의 항일사를 듣고 또 들으며 당, 단 연길구위와 그 활동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나 조기석과 유영효에 주의를 돌리다보니 유중화에 대해서는 별반 기록을 남기지 못하여 천만 유감을 안게 되였다.

유중화전기에 내내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이런 연유였다. 유영효 로인을 방문한 지 36년이 지난 지금 유중화 렬사 전기를 정리하고자 하니 아는 것이 많지가 못하다. 그러면서도 유중화 렬사의 활동 배경으로 되는 당, 단 연길구위의 항일투쟁사는 상당한 품을 들이여 그나마 유중화 렬사 전기를 륜곽적으로나마 그려낼 수 있는 데다가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9)에서 룡정시민정국을 통한 유중화 렬사 약간한 자료가 알려져 다행이기만 하다.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9)(최문식, 김춘선 주필)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2016년 12월에 출판한 계렬략전으로서 유중화 렬사도 들어있어 고무적이다. <유중화>에 나타나는 혁명활동 부분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지만 1887년 출생이고 안해가 김옥금이라는 점이 밝혀진 것은 그리도 신선할 수가 없다. 이 두가지는 전혀 모르던  사실이여서 이 유중화전기에서 출생년을 1887년으로 밝히게 된다.

유중화 렬사’략전(1100자 정도)에 따르면 조선에서 살던 유중화는 1910년대초에 살길을 찾아 일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섰고 그 시절 길림성 연길현 지인향 북산촌(현재 연길시 소영진 경내)에 이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1년 3월과 5월, 7월 연변대학 재학시절 룡정에 가서 수차 방문한 유영효 로인의 이야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유중화는 유영효한테 할아버지가 되는 분으로서 유영효는 유중화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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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8일과 5월 25일, 7월 21일 방문기록을 보면 유중화는 형제가 셋으로 유중화가 맏이이고 유영효의 할아버지가 둘째, 유씨가족을 떠메고 농사를 했다는 할아버지는 삼형제중 막내였다. 둘째인 유영효의 친할아버지는 광복전 어느 해든가 45세 정도에 중풍으로 세상을 뜨고 아버지 유석준은 시인으로 나오는 말마다 시라고 하였으니 시적재능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유석준은 시인이면서 또 항일독립군으로 조선팔도를 메주밟 듯 한 어른이기도 하다. 그러던 유석준은 어느 해인가 독립군 부대를 따라 로씨야 연해주로 들어갔고 연해주에서 훈장노릇도 하다가 1936년도인가 1937년도에 중국 밀산에서 일본침략군에 학살되였다고 한다.

유중화의 손아래 동생과 조카인 유석준은 모두 한학자였다. 유영효의 구술에 따라 이제 이들의 고향마을을 추적하면 함경북도 부령군 관해면으로 알려진다. 관련자료를 헤아리면 관해면(观海面)은 구룡동, 라석동, 산진동, 서리동, 신흥동, 이진동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면으로서 면소재지는 소청동으로 나타난다. 유중화네 유씨는 면내 어느 동 소속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영효 로인은 관해면내의 범바위라고 말씀하신다. 범바위마을에 유씨만도 300호 정도 되였다고 하니 비교적 큰 동네로 보여진다.

유중화네 유씨는 관해면 범바위에서 살다가 삶의 터전을 바다가 유진 쪽으로 옮기였다. 유진이 어느 군 소속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중화 아버지의 결단이였다.  1981년 룡정에서 만난 유영효 로인은 1911년에 이곳 유진에서 태여났다. 절반은 어부로 절반은 농사로 삶을 영위하는 그들이였다. 그러나 1910년에 일본에 의해 병탄된 조선, 망국노의 신세로 어디간들 편안한 곳이 있으랴, 1915년 경에 유중화네 삼형제(삼형제의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는다)는 종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섰고, 중국 화룡현 경내인 두만강 북쪽기슭의 상천평ㅡ몽기동에 들어섰다. 그 시절의 유중화는 20대 후반의 젊은이로서 이미 결혼하였으며 1915년을 선후로 슬하에 아들 유태봉(俞泰奉)과 유태성(俞泰成) 그리고 딸애 유분녀(俞粉女)를 두었다.

이들 유씨는 두만강 기슭의 몽기동에서 한때를 보내다가 몽기동에서 그닥 멀지 않은 화룡현 덕신사 안방툰으로 재이사를 한다. 유중화의 조카아들인 유영효는 덕신사의 사립광동학교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1924년에 졸업하고 그 해로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이들 유씨네가 마지막 삶의 터전으로 되는 국자가 북산으로 옮겨앉은 때는 1929년, 그러니 조선에서 국자가 북산으로 직접 이주한 것이 아니라 두만강 이북에서 몽기동, 안방을 거쳐 세번째 이사였다. 룡정에서 인연을 맺은 유영효 로인의 구술담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유중화는 항렬이 셋이고 맏이이며 조선의 부령군에서 살다가 두만강을 건넜고 나중에 국자가 북산으로 이사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지나야 할 것은 이들은 단순히 유씨네 삶만을 위해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20년대 말기부터 혁명의 장도에 올랐다는 점이다. 그 진두에는  유중화의 조카 남편인 조기석이 서있었다.

28명 렬사순난지 기념비. (2016년 9월 22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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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석은 유중화 손아래 동생의 딸의 남편으로서 유영효한테는 고모부가 된다. 그런 조기석은 1904년 생이고 함경북도 종성군 록야동 출신으로서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삼촌인 조군삼의 집에서 자라게 되였다. 조기석이 8살 되던 해인 1912년에 삼촌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 세전마을ㅡ지금의 동성용진 영성촌 부근 마을에 보짐을 풀게 되였다. 한 데서 조기석은 영성의 물건너에 자리한 현립2교를 다니다가 룡정의 동흥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삼촌 일가도 동흥중학교가 위치한 룡강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기석이 언제 결혼하였을가?유영효에 의하면 조기석이 13살 때라고 한다. 13살 때 조기석은 삼촌의 주선으로 세살 우인 유영효의 고모와 결혼하게 되였다. 동흥중학교(4년제) 시절 조기석은 조선공산당 ML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3학년 때인 1925년에 일본 도꾜로 가서 고학하는 한편 로동운동에 뛰여든다. 1년여만에 조기석은 연변으로 돌아오게 되고 1926년에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리창혁 등과 함께 남하하여 황포군관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연변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28년으로 밝혀진다.

1928년 그  전후시절 유영효는 생활고로 은진중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퇴학하게 되고 덕신사 안방(중평?)에 돌아가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여야만 하였다. 1929년에 국자가 북산으로 이사하면서 고모부 조기석과 한 동네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유영효는 은진중학교 시절부터 사회주의 서적을 읽으며 학생운동에 나선 젊은이로서 조기석의 영향으로 북산 등지를 혁명화하기에 힘 다하였다. 조기석과 유영효의 활동은 또 40대 초반인 유중화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치여 북산과 그 주변 마을의 야학실, 농민협회  등 활동에 열성을 다하였다.

자료로 보는 유중화의 직접적인 혁명활동은 1930년 연변의 ‘붉은5월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해 5월 연변각지에서는 룡정과 투도구를 중심으로 ‘붉은5월투쟁’이 맹렬히 터져올랐음은 겨레항일력사가 잘 알려준다. 국제공산당(공산국제)의 일국일당원칙에 의해 조선공산당 당원을 중공당원으로 흡수하기 위한 한차례 군중적 투쟁이였다. 이 시기의 5.30폭동은 ‘붉은5월투쟁’의 절정이였는데 유중화는 ‘젊은이들에게 뒤질세라 농민협회의 서원들과 함께 거리에 나가 시위활동을 벌리면서 악질지주, 친일주구를 청산하는 투쟁의 불길을 선참으로 지피였다’(최문식, 김춘선 주필.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9. 연변인민출판사, 2016년 12월 출판, 제399페지)고 한다.

1930년 8월 13일, 중공연화중심현위가 화룡현 약수동에서 조직되였다. 그해 10월에는 중공동만특위가 조직되면서 국자가 북산촌의 조기석 댁은 신생한 동만특위의 비밀련락장소로 되였다. 유씨네 일가들에서 유중화와 유영효의 활동, 소선대원들인 유중화의 아들 유태봉과 유태성의 활동도 눈부시게 번져갔다. 유중화는 조기석, 유영효와 손잡고 자기 두 아들을 혁명의 한길로 이끌고 있었다.

28명 렬사순난지 기념비 뒤면 비문과순난자 명단. (2016년 9월 22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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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0월, 중공동만특위의 탄생과 더불어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연화현위로 개칭되였다. 1931년 2월 연회현위의 지시에 따라 경한철도 2.7대파업기념일맞이 지방농민폭동이 터지자 유중화는 북산촌과 그 일대 농민협회, 호조회, 반일회 등 성원들과 함께 ‘연길역부근에 집결하여 일제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통신망을 마비시켰으며 천도선철도공사장을 습격하여 일제의 천도선철도부설계획의 실행을 지연’시키였다.

1931년 봄에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연길현위와 화룡현위로 나뉘여지고 연길현위 산하 중공연길구위도 연길구, 의란구, 팔도구 등 3개 구위로 나뉘여지면서 조기석은 중공연길구위 제6임 서기로 부임하였다. 이해 봄에 투쟁의 시련을 거친 유중화와 유영효는 조기석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조기석과 함께 북산촌당지부를 구성하였다. 조기석이 연길구위 서기 겸 북산촌 당지부서기였다.

입당과 함께 유영효는 공청단연길구위서기로 활동하고 유중화는 북산촌 농민협회와 호조회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유중화는 또 한학자이고 붓글씨를 잘 쓴 데서 북산촌과 그 주변의 포스터 쓰기를 도맡아 나섰다. 1931년 봄에 중공연길구위에서는 동만특위와 연길현위의 지시에 따라 마반산 오암동에서 수백명 군중이 참가한 군중대회를 가질 때 군중대회의 주체는 북산촌의 혁명군중들이였다. 북산촌의 선줄군은 당연히 유중화였고 소선대원들인 유중화의 두 아들도 북산촌 군중대렬의 앞장에 나섰다.

1931년 가을, 중공동만특위가 발기하고 지도한 군중적 추수투쟁이 연변 각지에서 드세게 번지였다. 중공연길구위와 해란구구위는 긴급상의를 거쳐 10명으로 구성된 소작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2개 구위의 리면지도하에 소작투쟁위원회는 첫 투쟁대상을 소영자의 대지주 송보승으로 결정하고 11월 5일에 연길, 해란 2개 구의 수백명 군중을 이끌어 송보승의 집을 겹겹히 에워쌌다. 이번에도 유중화는 북산촌 투쟁의 진두에 나서서 소속 군중들을 이끌었다.

송보승과의 담판이 열을 올릴 때  소영자 고개너머의 서골 공안분주소놈들이 달려들어 소작투쟁위원회의 강태익(姜太翊), 박종우(朴钟宇), 원남희(元南熙), 강상호(姜相镐), 남동희(南东熙) 등 5명을 잡아갔다. 연길구와 해란구는 분노로 넘치였다. 이튿날 11월 6일, 유중화 등 2개 구의 수천명 군중들이 소작투쟁위원회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서골공안분주소를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풀이 죽은 공안분주소 소장은 박동우, 남동희 두 대표를 고분고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 대표는 연길현공안국에 넘기였다고 한다. 격분한 수천명 군중들은 조기석 등의 리면지도하에 홰불을 들고 공안분주소 소장을 앞세우고 밤도와 국자가 현부로 움직이였다. 도중에 국자가와 여러 학교 청년학생들, 주변 마을의 군중들이 합세하니 군중대오는 근 만명의 장사진으로 늘어났다. 유중화 등 선두대렬이 지금의 진학소학교 자리인 국자가의 현공서에 이르렀을 때 후위대렬은 아직도 소영자를 떠나지 못하였으니 군중대렬의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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