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옥 연희상 전순철 세 항일렬사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27

2019-02-18 08: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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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항일투쟁시기 가야하류역으로 불리우는 오늘의 도문시 석현 일대는 중공왕청현위 산하 구위ㅡ5구위로 통하였다. 5구위는 항일 많이 배출된 고장으로서 제2임 구위서기 오중화의 영향을 심히 받은 석현 신흥평 부녀회장인 김채옥 렬사와 남봉오동 지부 주요 구성원인 두 렬사가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 력사 분야의 주의가 따르지 못한 데서 지금껏 김채옥 등 세 렬사는 변변한 항일렬사 전기로 정리되지 못하고 해빛을 보지 못하여 유감을 남기였다.

먼저 김채옥 렬사를 보기로 하자.

길림성부녀련합회에서 1983년 5월에 내부자료로 펴낸 <길림성녀렬사영명록>(吉林省女烈士英名录)에 오른 김채옥 략력에 따르면 김채옥(金彩玉,1906년ㅡ1931년)은 석현 신흥평 사람으로 알려진다. 1929년에 혁명에 참가하고 왕청현 석현부녀회 회장을 맡았다가 1931년 11월 8일에 석현 동골(东沟)에서 희생되였다고 한다. 김채 옥렬사 략력 전부이다. 그나마 석현부녀회 회장은 모호한 직책으로 드러난다.

지난 80년대 중반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연구소에서는 《연변인민혁명투쟁사》를 집필하면서 연변보관서류국(당안관)에 반년나마 묵박혀있은 적이 있다. 그때 보관서류국에는 지난 50년대와 60년대 초반에 걸치는 현지 조사와 항일투사 방문 자료가 많고 많았는데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석현 5구 관련 자료들에는 석현 신흥평 사람인 김채옥을 회고한 자료도 보였다. 이 자료를 보면 김채옥은 왕청현 석현 구내 신흥평 부녀회장으로 알려진다. 당 5구위 구성에서는 김채옥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연변보관서류국에서 수집한 김채옥 회고자료(그 시절 연변보관서류국 자료 3065)는 지난 30년대 초반 제5구 당구위 조직위원이였던 주일부(朱日富)가 회고한 자료로서 그는 구위 산하 당지부에서 활동하면서 김채옥을 잘 알고 있었다. 주일부는, 자기는 1929년 2월에 룡암동에서 반일회와 농민협회에 참가하고 김채옥도 1929년에 반일회와 농민협회, 부녀회에 참가하였다고 회고하였다.

1929년에 석현 일대에서 조직된 반일회나 농민협회, 부녀회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에서 조직한 군중 반일단체였다. 오중화의 도움으로 이런 반일단체에 참가한 김채옥은 신흥평에서 부녀회 회장을 맡으면서 부녀야학실을 꾸리는 데 발 벗고 나섰다. 부녀야학실에서 김채옥은 글 모르는 문맹부녀들에게 우리 글을 가르치면서 혁명가를 배워주었다.

그런데 봉건에 물젖은 마을 로인들은 야학실이요, 문맹퇴치요 극력 반대하면서 “녀자들이 바지가달에 바람을 채운다.”고 떠들었다. 녀자들이 바깥으로 도는 것이 그리도 눈에 거슬린 로인들이였다. 그러면 김채옥은 그런 로인들과 도리를 따지면서 녀자들은 남자들의 노예가 아니며 더구나 가정의 노예가 아니다, 일제놈들을 몰아내자면 우리 녀자들도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당당하게 말하군 하였다. 이어 김채옥은 마을 부녀들을 지도하면서 그 시절 성행되던 매혼제와 봉건가장제와 견결한 투쟁을 벌리였다.


2

그 시절 부녀회 주요활동의 하나는 통신련락이였다. 마을 밖으로 이어지는 통신련락은 흔히 어린애 돌잔치나 결혼잔치, 환갑잔치 등에 가는 차림새로 나서게 된다. 이 같은 차림새로 나서자면 나들이옷도 그에 걸맞게 잘 입어야 하거니와 음식도 잘 준비하여야 했다. 김채옥은 이런 점들에 깊은 주의를 돌리며 부녀회원들을 잘 이끌었기에 그 시절 통신련락은 거침없이 잘 풀리여갔다.

1930년 전 연변을 들썽한 대중적 5.30폭동 이후 중국공산당 조직이 연변 각지에서 륙속 조직되였다. 1931년 1월에는 석현의 영창동에서 한영모를 서기로 하는 중공석현구위ㅡ제5구위가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이해 2월에 김채옥은 유세룡 등 5명과 함께 오중화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영창동지부 부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지부가 조직된 후 김채옥은 동지들과 함께 공청단, 부녀회,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를 련달아 일떠세우는 한편 지방 적위대도 조직하면서 지방 무장투쟁의 서막을 열어놓기도 하였다. 1931년 가을 연변 각지를 불태운 추수투쟁의 렬화는 석현지역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김채옥은 여러 당원동지들과 함께 신흥평 등 여러 마을의  농민군중들을 추수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이해 10월경의 어느 날, 신흥평의 수십명 군중들은 김채옥 등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영창동 남성(南城)으로 몰려갔다. 영창동 남성에는 영창동 장골, 용골, 진목동, 봉오동, 흥진, 삼도구, 하목단, 용암동 등지에서 모여든 수백명 농민형제들로 차고 넘치였다. 그들은 영창동 남성에서 성대한 대회를 가지고 지방당국에 드리는 청원서를 선독하면서 소작료에 대한 감조감식을 강렬히 요구하였다.

대회 후 수백명 농민형제들은 대렬을 지어 호호탕탕히 배초구의 현정부로 향하였다. 대렬 속에 끼인 김채옥 등은  ‘지주의 착취와 압박을 반대한다!’, ‘감조감식을 실시하자!’ 등 구호를 끊임없이 부르며 군중들의 투쟁정서를 고무하였다. 투쟁대오가 배초구의 현정부에 이르니 무려 1000여 명에 달하였다. 1000여명 군중들은 목소리를 합치였다.

“손중산 선생이 제기한 ‘3.7’제, ‘4.6’제의 원칙을 철저히 실시하자!”

“현장은 나오라!”

현정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구호소리는 갈수록 높아갔다. 급해난 현장은 할 수 없이 군중 앞에 나서더니 “무슨 요구가 있는가?”고 물었다. 이때 대렬 속에서 장락봉이라고 하는 사람이 척 나섰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이 제기한 ‘4.6’제 소작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여왔소.”

“그럼 대표를 파견하여 같이 연구해봅시다.”

어마어마한 1000여명 군중들 기세에 눌린 현장은 ‘시원’스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 장진우, 장락봉 등 세 사람이 대표로 현정부로 들어갔다. 한참만에 대표들은 군중들 앞에 나타났다. 대표들이 현장이 ‘4.6’제의 소작요구를 접수하였다고 선포하였을 때 1000여명 군중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따라서 김채옥 등은 영창동 등지의 군중들을 이끌어 영창동 지주 남병운의 곡식낟가리를 헤쳐 ‘4.6’제의 비례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니 성수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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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가을 추수투쟁과 더불어 신흥평, 영창동, 룡암동  등 마을들 도처에 반일삐라들이 흩날리고 전화선이 절단되였다. 한간, 주구 놈들이 비밀리에 처단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맘에 걸리는 것은 무기였다. 적들과 투쟁하자면 손에 무기가 있어야 했다. 추수투쟁 가운데서 이 점을 깊이 터득한 김채옥 등 동지들은 무기를 탈취하라는 현위와 구위의 지시를 받들고 당지부회의를 열고 전문토론을 벌리였다.

이는 1931년 10월 어느 날의 일이다. 이달로 신흥평, 영창동 등지의 당원들이 힘을 합치여 석현 경찰서 습격전투를 벌리자 김채옥은 녀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에 짝지지 않고 용감히 나섰다. 이어 수남의 세무국 습격이 벌어질 때도 김채옥은 앞장에서 물심량면으로 받들었다.

김채옥 등의 헌신적 투쟁은 적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조직에서는 김채옥 등을 신속히 전이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석현경찰서 놈들이 낌새를 챘다. 때는 눈이 내리는 철이라 그들의 발자욱이 드러났다. 놈들이 전이하는 김채옥 등의 발자욱을 추적하여 김채옥은 그만 놈들에게 체포되였다. 그날이 1931년 11월 8일이니 김채옥은 놈들과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석현 동골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는 당년 석현 5구 구위 조직위원과 구위서기를 력임하였던 주일부의 1962년 5월의 회고자료와 김채옥 략력에서 보여지는 김채옥 렬사 관련 자료이다. 그외 지금까지 김채옥 관련 다른 자료를 찾지 못하여 그 이상 더 알지 못함이 유감으로 남는다. 석현 동골에서의 희생과정도 알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고려툰, 그제날 남봉오동 출신들인 연희상과 전순철은 왕청현 5구위 산하 중공남봉오동지부 조직위원과 선전위원이였다. 그들 소속 남봉오동지부 전신은 조선족 혁명가인 오중화가 1927년 4월에 남봉오동에서 선참으로 4명 당원을 발전시키고 조직한 조선공산당 지부로서 서기는 연희상(延禧相)이 맡아나섰다.

1930년 5.30폭동 이후 연변을 중심으로 동북 경내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개별적인 입당수속을 거쳐 륙속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남봉오동지부의 조선공산당 당원들도 오중화 등의 소개로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중공 남봉오동지부가 세워졌다. 강문호(姜文浩)가 서기로, 연희상(延禧相, 항일렬사)이 조직위원으로, 전순철(全舜哲, 항일렬사)이 선전위원으로 되였다.

중공남봉오동지부는 1931년 1월 석현 영창동에서 조직된 중공왕청현위 산하 제5구위 소속 한 지부로 활동을 벌리였다. 여러 활동중 가장 빛나는 활동은 1931년 그해 가을의 군중적인 추수투쟁과 이듬해 봄의 춘황투쟁을 성과적으로 조직한 것이라 할가. 추수투쟁에서는 마을의 혁명군중들을 불러일으켜 영창동으로 갔고 영창동에서 다시 1000여명 대오와 함께 배초구의 현정부를 에워싸면서 조직된 군중의 거대한 힘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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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피눈이 된 일제놈들은 련속 토벌을 감행하면서 연변 각지와 더불어 석현 5구내에서 타오르는 항일의 불길을 꺼버리려고 광분하였다. 1932년 음력 5월 15일 이른아침, 석현일대의 하가경찰서 놈들은 무장자위단을 앞세우고 남봉오동에 살기등등하게 달려들었다.

1987년 12월에 내부발행된 《도문문사자료》 제1집에서는 이날 적들은 남봉오동의 광동학교 운동장에 마을의 군중들을 모여놓고 일본놈 경찰서장이 직접 남봉오동의 공산당원 명단을 공포하면서 당원들이 나서라, 나서지 않으면 이 자리 모인 군중들을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위협을 들이댔다.

그때 보리밭 김매러 갔던 연희상과 우사간 구유 밑에 숨었던 전순철이 척 나섰고 적들은 광동소학교와 연희상, 전순철의 집을 불태워버리고 그들을 끌고 갔다가 가야하 강가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한다. 전순철은 칼탕쳐 죽이고 가야하에 처넣었다고 하고 연희상과 남봉오동 출신인 또 한 사람 김일평을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도문문사자료》 제1집의 이 부분이 어떠한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지난 1월 6일 오전, 수남촌 라철룡 서기의 안내하에 석현 5구와 봉오동 항일력사 현지취재차 남봉오동으로 간 필자는 이미 모여있는 남봉오동 년장자 한정범, 연형국, 김봉룡, 한원범 등 분들과 만남의 기회를 가지면서 연희상과 전순철 관련 적잖은 이야기를 들었다.

남봉오동 년장자들과 이야기는 《도문문사자료》 제1집의 내용이 기본 맞으면서도 일부 다르기도 하였다. 년장자들에 따르면 1932년 음력 5월 15일 그날 연희상과 전순철은 보리밭에서 김을 매거나 소구유 밑에 숨어있다가가 아니라 둘 다 각기 보리밭에 숨어있다가 모인 군중들을 전부 죽여버린다는 적들의 호통에 마을사람들을 구하고저 적들 앞에 선뜻 나서게 되였다.

하가 주변의 가야가 강반에서 잔혹하게 피살되여 강에 버려진 이도 전순철이 아니라 연희상이며 전순철은 다른 곳에서 불질러 죽였다고 한다. 특히 마지막 희생 부분에서 어느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남봉오동, 오늘의 고려툰 년장자들은 연희상, 전순철의 진실한 나이는 잘 모르지만 이들 최후 이야기는 마을에서 줄곧 이렇게 전해왔다고 강조하여 말하였다.

2019년 1월 6일 오전, 우리 일행은 고려툰 년장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나서 라철룡 서기와 리경호씨의 차로 고려툰 남쪽 고려령 아래 산중턱에 위치한 연희상 렬사의 묘소와 고려툰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전순철 렬사의 묘소를 찾아보며 연희상, 전순철 두 렬사에 대한 추모에 빠지였다. 평소 노래를 잘 불렀고 적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항일가요를 불렀다는 연희상, 무예가 출중하여 평소 ‘노란 벙거지’로 불리였다는 전순철 두 항일렬사의 빛나는 형상이 서로의 가슴가슴에 흘러들었다.


①고려툰 남쪽 고려령 산중턱에 위치한 항일렬사 연희상 묘소 렬사비. (2019년 1월 6일 현지촬영)
②일찍 남봉오동으로 불리운 오늘의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고려툰 모습. (2019년 1월 6일 현지촬영)
③고려툰 가까이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항일렬사 전순철 묘소. (2019년 1월 6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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