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투사 오중화 형제들의 항일 비화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26

2019-02-25 08: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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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중화의 오씨 형제들 가운데는 공청단훈춘현위 서기와 훈춘현유격대 소대장으로 활동하던 오중협(吴仲协)이란 4촌동생이 있었다. 오중협은 일명 오일파(吴一波)라고도 하는데 1909년 왕청현 석현의 하목단촌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명함은 알지 못하지만 오중화네와 더불어 두만강 남안의 온성군 남양면 세선동에서 석현 일대 하목단촌으로 이주한 것은 틀림이 없다.

오중협은 석현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룡정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때 서울에 가서 중동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사촌형님 오중화가 석현에 돌아와서 석현과 월청 등지에서 혁명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중화 형님과 중협은 열살 차이로 나이격차는 많았지만 중화형을 친형처럼 몹시 따랐다. 중화형의 영향으로 중협은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석현에 돌아가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혁명활동에 나섰다. 1930년 5.30폭동 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이른 봄, 오중협은 중공동만특위의 위임으로 훈춘현 대황구에 가서 공청단훈춘현위 서기로 파견되였다. 이듬해 1932년 봄에는 대황구를 떠나 현안의 연통라자로 활동지대를 옮기였다. 1932년 4월 이후 오중협은 연통라자 서골에서 조직된 항일돌격대의 한 대원으로, 개편된 령남항일유격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훈춘현에서도 이른바 반‘민생단’이 고조를 이루었다. 령남유격대대 정위 박두남이 민생단으로 몰리다가 도주하여 변절한 후 훈춘현의 당원과 공청단원중 70%가 민생단분자라고 했다. 그 거센 회오리바람은 지식인이라고 평가받는 오중협한테도 몰아치니 ‘민생단감옥’이 그를 기다렸다.

그때 훈춘현에서 활동하던 오중협의 사촌형님 오덕천도 민생단이란 얼토당토않은 혐의로 심사를 받고 있었다. 오중협은 오덕천 형과 “민생단으로 몰리워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박두남처럼 변절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고 속셈을 터놓았다. 오덕천도 동생과 같이 “끝까지 혁명자답게 살아가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런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나가면서 “중국공산당 만세!”를 높이 불렀다.

그 후 1935년 5월 오일파로 불리운 오중협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4퇀으로 개편된 원 훈춘현유격대를 따라 왕청현 금창으로 전이하였다가 금창에서 민생단분자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총살당하였다.


2

중공훈춘현위 제5임 서기로 활동한 오빈도 오중화의 4촌동생으로 알려진다. 1904년생인 오빈은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세선동의 한 오씨네 일가에서 태여났으니 그의 아버지는 오의선으로 통하였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오의선은 그의 형제들이 분분히 왕청현 석현 일대로 이주할 때 그는 일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 대안의 화룡현 월청사 걸만동으로 갔다가 연길현 차조구로 옮겨 앉았다.

오빈은 조선 온성에서 소학공부를 하다가 중국의 룡정 동흥중학교에서 중학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러던 그는 사촌형님 오중화 등의 영향으로 혁명을 강단하다가 동흥중학교를 중퇴하고 연길현 옹성라자에 가서 본격적인 혁명활동에 나섰다. 오빈의 원 안해였던 김일권의 회고에 따르면 오빈은 옹성라자에서 툰장을 맡기도 하였다. 1928년경 한때는 왕청현 라자구에 가서 활동하였다.

1930년 6월에 오빈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선후하여 연길현 동성용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연길현 옹성라자에서 당구위 서기 책임을 짊어지기도 하였다. 1931년 봄에는 중공연길현위 비서로 전근하였다. 그때 연길현위는 구수하 태양묘ㅡ오늘의 조양천진 무산촌(태동 2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오빈은 현위 통신처인 김춘식 댁에 거처를 잡고 활동하였다.

1932년 2월에 중공훈춘현위 서기 허상범이 청수동에서 중국륙군대에 체포되였다.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연길현위 비서 오빈을 중공훈춘현위 제5임 서기로 파견하였다. 오빈은 안해 김일권 등과 함께 훈춘현 중강자로 갔다. 그는 중강자에서 인차 현위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주구청산투쟁 관련 결의를 지었다.

잇달아 중강자학교에서 군중대회가 열리고 주구 다섯놈을 투쟁하였다. 대회에 참가한 오빈은 적대투쟁의 수요를 고려하여 주구를 투쟁하되 너무 드세게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는데 혁명군중들은 그만 주구 5명중 4명을 사살하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놈이 기여나가 적토벌대와 련락한 데서 나흘 만에 훈춘령사분관 경찰서놈들과 무장자위단이 달려들어 미처 피하지 못힌 80여명 동지들이 불행히 체포되였다.

80여명중 현으로 압송되는 도중 30~40명 동지들이 도주하고 1년 후 5명외 전부가 풀리여나왔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하여 ‘죄’를 범한 오빈은 현위서기 직무에서 해임되고 현위위원 서광이 제6임 서기로 임명되였다. 오빈은 당조직의 파견으로 훈춘현 동흥진 분수령(지금의 춘화진)에 가서 훈춘의 구국군 두령 왕옥진을 쟁취하는 간고한 사업에 나섰다.

결과 왕옥진은 우리 당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공동히 항일하는 데 동의하고 나섰다. 1932년 9월에는 연통라자 마적달소학교에서 열린 3000여명 병민련합대회에도 구국군을 파견하며 축하편지까지 보냈으나 후에는 일제놈들의 위협과 매수, 대지주 양락도의 유혹에 넘어가 우리 유격대와의 합작을 거절하고 투항하여 버렸다. 이것도 오빈의 ‘죄’로 되였다.


3

1933년 9월, 중공동만특위에서는 항일유격대와 항일구국군이 참가한 동녕현성 진공전투를 벌리였다. 왕청현유격대와 훈춘현유격대가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오빈 등 27명의 훈춘현유격대 대원들이 선발되였다. 오빈은 훈춘현유격대 2소대 전사로 강직되여 활동하고 있었다.

동녕현성 전투는 1933년 9월 6일 밤에 시작되였다. 전투의 주공방향은 서산포대였다. 오빈은 서산포대를 진공할 때 작탄을 품고 앞장에서 돌격로를 헤치여 대번에 소문이 났다. 이 전투는 이튿날 낮에 끝났는데 전투 후 동만 2개 현 유격대는 로흑산일대서 약 한달간 활동하다가 왕청현 라자구에서 동녕현성 전투승리 경축모임을 가지였다. 경축모임에서 오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축모임이 끝난 후 훈춘현유격대는 대황구에로의 귀로에 올랐다. 2일 간의 강행군을 거쳐 대황구에 이른것 은 10월 6일(음력 8월 17일) 저녁 무렵이였다. 유격대는 주둔지의 한 농가에서 단잠에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새벽 유격대주둔지는 적들의 불의습격을 받았다. 이날 10월 7일, 훈춘과 밀강, 마적달 3개 방면에서 덮쳐든 훈춘토벌대와 일본군수비대 및 밀강무장자위단 놈들은 청수동을 거쳐 대황구에 덮쳐 들었는데 청수동 첫번째 보초선의 두 녀성회원이 그만 적들에게 체포된 데서 미처 적정을 알릴 수 없었다.

유격대주둔지의 앞산에서 보초를 서던 신입대원 김재근이 적정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전투경험이 없는 김재근은 총을 발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달아와 “토벌대가 왔다!”고 소리쳤지만 귀중한 시간을 놓치였다.

금방 보초를 교대하고 돌아선 오빈은 인차 동지들을 깨우며 구들에서 뛰여내렸다. 찰나 적들의 기총소사와 적탄통, 수류탄은 유격대 주둔지를 발칵 뒤흔들어놓았다. 어느 결에 오빈은 복부에 적탄을 맞았다.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오자 오빈은 한손으로 밀어넣으며 다른 한손으로 련발사격을 가하면서 동지들의 철퇴를 엄호하였다. 그는 주둔지 앞 30메터가량 지쳐나갔다가 그만 쓰러졌다.

최후를 각오한 오빈은 총의 유조를 빼여 던진 후 총을 깔고 누워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날 반격전에서 박광영, 강창운 등 동지들은 적들과 피어린 혈전을 벌리며 안전하게 뒤산에 올랐으나 오빈, 박진흥(중대장) 등 13명 동지들은 가렬한 싸움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적들이 물러가자 유격대와 군중들은 오빈 등 13용사들을 주둔지 서쪽 언덕 밑에 고이 모시였다. 오빈은 이렇게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갔다.


4

오중화의 사촌형제들 가운데는 오창락의 자식들로 알려진 오중흡과 그의 두 동생들인 오중선과 오중보가 있으니 오중흡 형제는 손에 무기를 잡고 일제놈들과 싸운 이름난 유격대 출신이요 항일련군 전사였다.

오중흡(1910ㅡ1939)은 오중화와 나이 격차를 둔 사촌 동생으로서 1910년 7월에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세선동의 오씨네 댁에서 태여났다. 1914년 2월에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 석현 남양툰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오중흡은 근근히 소학교 공부를 하였지만 가난한 생활로 중학교공부를 할 수 없었다.

1930년 5.30폭동을 전후하여 오중흡은 사촌형 오중화의 영향으로 농민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오중흡은 오씨네 일가 28명중 일원으로 소왕청근거지로 전이한 후 소왕청근거지에서 여러 형제들과 함께 왕청현유격대에 참가하였다. 유격대에서 오중흡은 중대의 청년간사로 활동하다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6년 3월 이후 오중흡은 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제7퇀 패장, 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36년 4월부터 8월에 이르는 사이  소속부대와 더불어 무송현과 장백현을 중심으로 하는 장백산지대로 진출하면서 동강전투와 만강전투, 로령전투, 서남차전투, 서강전투, 무송현성 진공전투 등에서 위훈을 떨치였다. 1937년 6월을 전후로 조선 보천보전투 등 일련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8년 여름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7퇀 퇀장으로 부임하였다.

1939년 5월 이후 오중흡은 제2방면군 부대를 따라 조선 무산지구 진공전투, 화룡현 올기강전투, 돈화 륙과송전투에서 다시 불멸의 위훈을 떨치였다. 그러던 그는 1939년 12월 17일의 돈화 륙과송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는 일제놈들과의 피어린 혈전에서 안해와 딸, 어린 누이동생 모두를 잃었다. 이제 새로 정리한 오중흡의 전문 전기는 따로 싣게 된다.

오중흡의 동생 오중선(吴仲善,일명 吴世英,1913ㅡ1940)은 형님 오중흡과 더불어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세선동 출신이다. 철모르던 시절 가족을 따라 두만강 북안의 왕청현 석현 남양툰에 이사한 후 석현 관립소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사촌 형님 오중화와 형님 오중흡의 영향으로 아동단에 가입하였다.

1933년 5월, 오씨 일가를 따라 소왕청근거지로 전이한 후 선후로 왕청현유격대와 새로 개편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퇀 제5련에 편입되였다. 부대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5년 가을 왕청으로부터 길동지구에 있는 후일의 항일련군 제5군에 파견되였다. 1936년 가을에는 다시 항일련군 제3군에 전근되여 3군 3사 련지도원, 3사 2퇀 정치부주임으로 나섰다.

그후 1939년 3월, 오중선은 항일련군 제3로군 제12지대 제34대대  정치지도원, 지대당위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 1940년 10월 17일, 오중선은 북만의 조원현 오목대에서 소속 부대를 지휘하며 1000여명의 절대적으로 우세한 일위군과 싸우다가 영용히 희생되였다.

오중흡의 동생 오중보도 항일렬사라고 한다. 여기까지 이르면 오중화와 그의 오씨 동생들 가운데는 오씨네 항일렬사만 17명을 이룬다. 그야말로 전설같은 이야기다. 이들은 모두가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항일의 피어린 싸움터에서 쓰러졌다. 17명 항일렬사외 오씨네 가족들도 모두가 항일을 지지 성원하면서 항일의 위업을 받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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