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항일녀성영웅 문두찬의 일화

2019-03-04 08:33:53

image.png

image.png

1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근무했던 김광현씨로부터 일찍부터 항일렬사 유가족인 그의 소학교 시절의 선생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련락을 받았지만 줄곧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8년 12월 29일부터 올 1월 15일까지 18일간 올해 첫 연변행을 하면서 항일렬사 유가족 방문과 항일력사유적지를 답사할 기회를 가졌는데 김광현씨 소학교 시절의 선생님과의 만남이 하나의 스케줄로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2019년 1월 7일 오후였다. 김광현씨의 안내로 연길시의 한 까페에서 항일렬사 유가족인 문해복(1942년생) 할머니와 문명호(1953년생)씨를 처음으로 만났다. 짐작 대로 두분은 그제날 화룡현 장인강 출신인 문두찬 항일렬사의 유가족으로서 문해복 할머니는 문두찬 렬사의 사촌동생이고 문명호씨는 문두찬 렬사의 친동생 문두만의 아들이였다.

인젠 근 40년 전의 일이지만 내가 정리한 문두찬 렬사 전기는 이모저모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과정에서 문두찬 렬사 관련 적잖은 항일투사들과 지인들을 방문하였지만 렬사 유가족으로서의 문해복 할머니와 문명호씨는 인연이 닿지 못하였다. 그때로부터 근 40년 세월이 흘러서야 두분 렬사 유가족을 만날 수 있었으니 렬사 유가족과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이틀 후인 2019년 1월 9일, 구름 한점 없는 해맑은 날씨였다. 이날 문해복 할머니와 문명호씨를 모시고 우리는 김광현씨 자가용으로 화룡시 서성진 장인촌 현지답사에 나섰다. 장인촌에 이르러 장인촌 혁명렬사비를 찾아 렬사비 비문에서 이름난 항일영웅 문두찬 렬사의 이름을 찾아본 후 귀로에 원 룡문향 아동촌을 거쳐 곧추 아동과 서성 사이 언덕을 넘어 서성진 어랑촌을 바라고 달렸다.

어느덧 장인골과 아동저수지를 벗어난 차는 서성진을 지나고 장항촌을 지나고 와룡촌을 지나 어랑촌에 이르렀다. 새로 일떠선 13용사기념비 구내에 들어서니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안내비와 어랑촌 13용사기념비 안내비가 선참 우리를 맞아준다. 광장 뒤로는 하늘을 치솟은 락엽송들이 울울창창 숭엄한 기분을 더해준다.

두 안내비 구간을 지나면 새로 꾸며진 널직한 돌계단길이 산중턱으로 올리 치닫고 비탈진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든 산중턱 광장에 오르면 정면으로 산뜻한 새 13용사기념비가 안겨진다. 13용사기념비를 중심으로 한 왼쪽은 원 화룡현 유격중대 첫 중대장 김세 렬사묘이고 오른쪽은 추모공간집으로 이루어져 참관자들의 발목을 잡는다.

13용사기념비 뒤면 비문에는 13용사의 한 사람이고 화룡현유격대 제1소대 소대장인 리구희 렬사 이름도 새겨져있었다. 리구희 렬사는 장인강 출신이고 문두찬 렬사의 시동생이지만 이를 아는 이는 많지가 못하다. 우리는 1월 7일과 1월 9일의 방문과 현지답사를 거치면서 전에 알지 못하던 문두찬 렬사 가족관련 새 이야기를 적잖게 들을 수가 있었다.


2

알고 보면 문두찬(文斗赞, 1912ㅡ1932)은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20년대말과 30년대초 반일시위투쟁에서 벌써 굉장히 소문난 녀성이였다. 1912년에 화룡현 장인강 도대구(倒大沟)의 한 가난한 조선이주민 농가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문씨는 항렬 5형제의 맏이이고 문씨의 셋째 동생 문창렬이 조선에서 부모를 따라 장인강 신동촌으로 이주한 전근숙을 안해로 맞아들이니 이들 부부간이 지난 1월 연길에서 만난 문해복 할머니의 부모님으로 된다.

문두찬에게는 두만이라고 부르는 친 남동생이 있었다. 두찬이 1912년생일 때 두만이는 1917년생, 오누이였으니 두만 동생은 바로 지난 1월 7일과 9일에 연길에서 만난 문명호씨의 아버지였다. 그러면 문해복 할머니한테는 문두찬이 사촌언니로 되고 문명호씨한테는 문두찬이 친고모로 된다.

20세기 10년대 그 시절 장인강 문씨인 문두찬네는 살림살이가 푼푼하지는 못하였으나 두찬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계시는 것이 다행이였다. 로소 3대가 동고동락하는 문씨 일가는 단란한 가정으로 장인강 동네방네에 소문이 났다. 그리하여 두찬이는 어려서부터 활발한 녀자애로 자라날 수가 있었다.

조부모님의 심목중에 깜찍한 손녀 문두찬은 둘도 없는 사랑둥이였다. 이 사랑둥이를 천주교인으로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예닐곱살 때 조부는 벌써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다독이면서 천주교를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헌데 손녀는 발딱 일어서더니 “안 믿습니다. 그것을 믿어서 밥이 나옵니까?!” 하고 되알지게 내뱉었다고 한다.

전혀 뜻밖이였다. 조부는 요놈이 커서 큰일을 할 손녀라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이 말이 한입두입 퍼지자 마을의 한 부자집령감이 두찬이를 떠보았다. 두찬 조부의 말은 틀림이 없었고 어린 두찬이 하는 말은 과연 앞뒤말이 리치에 맞게 어울렸다. 그래서 부자집령감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얘, 이제 커서 돈과 쌀이 많은 우리 집에 시집오지 않겠니?”

“아니, 잘사는 부자집에는 시집가지 않을래요.”

부자집령감은 입을 딱 벌리였다. 철부지로만 볼 두찬이가 아니였다.

1919년 3월을 맞으면서 룡정 쪽에서 반일만세시위가 세차게 터지면서 투도구도 례외가 아니였다. 할아버지는 장인강 여러 마을 사람들과 함께 투도구로 내려가 만세를 부르더니 장인강 골안을 오르내리면서도 만세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나섰다. 한데서 룡정의 일본 총령사관에 3차나 검거되여 시달림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반일거동은 어린 두찬의 반일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치였다.

열두살 되던 해 두찬이는 투도구 약방에 가 약봉지를 사들고 왔다. 아동 아래 진화촌을 지날 때 한 찌들어가는 초가집에서 웬 울음소리가 들리였다.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들어가 사연을 물으니 구들에 누운 그 집 세대주는 돈이 없어서 약을 짓지 못하고있었다. 마침 같은 병이라 두찬이는 자기 약봉지를 서슴없이 내놓고 돌아섰다. 후에 그 집에서는 두찬의 할아버지를 보고 고마운 인사를 거듭 올리였다.


3

문두찬이는 여간내기가 아니였다.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마을의 사립일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다른 세상에 들어선 기분이였다. 때는 20년대 중기라 로씨야 10월혁명의 사상과 맑스주의사상은 세찬 물결마냥 장인강 긴긴 골안을 휩쓸었다. 그 진두에는 룡정의 조선공산당동만도 화요계렬의 동지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비암산너머 내풍동을 거쳐 줄을 뻗쳐오더니 마을마다 야학실이 꾸려지고 학교에서는 토요일마다 강연회가 열리였다. 그때마다 문두찬은 곧잘 연단에 나섰다.

그는 번마다 발언고도 없이 연단에 올랐다. 일제놈들을 거꾸러뜨리지 않고서는 망국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뭉쳐 일어나 용감히 싸워야 한다.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울면서 성토할 때면 청중들 모두가 눈굽을 찍었다. 군중들은 두찬이를 보통내기가 아니라면서 혀를 찼다.

한창 소녀나이 문두찬은 벌써 장인강 골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던 그가 크게 소문이 난 것은 1929년 겨울 반일시위 때보다도 썩 앞선 시기의 일이다.

1927년에 룡정에 본부를 둔 동만청년총동맹에서는 간도청소년웅변대회를 소집하였다. 이 청년총동맹은 온 동만에 11개 가맹에 102개 지방청년회, 5000여명의 회원을 둔 혁명단체였다. 장인강지역을 대표하여 그번 웅변대회에 참가한 문두찬은 웅변시작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우리 녀성들은 왜 이중삼중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까? 어찌하여 녀성은 3등급을 매기여 1등 녀자는 300원, 2등 녀자는 200원, 3등 녀자는 100원으로 정하여 례장받고 우마처럼 매매당해야 합니까?

우리 로고대중은 새벽에 별을 이고 나가 저녁에 달을 지고 들어오며 하루 근 20시간이나 뼈 빠지게 일하여도 왜 헐벗고 굶주려야 합니까?…


두찬이의 격앙된 열변은 청중들의 가슴가슴에 세찬 격랑을 일으켰다. 사회모순을 폭로할 때마다 감독차로 나온 령사관의 경찰들이 펄쩍 뛰며 세번이나 제지시키였다. 그래도 두찬이는 계속 열변을 토하였다. 나중에 경찰놈들은 두찬이를 령사관으로 끌고가 호통쳤다.

“이년아, 이 강연고는 누가 작성했느냐?”

“내가 작성했어요.”

“정말 내가 작성했어요.”

처음 말이자 마지막 말이였다. 별수 없이 놈들은 문두찬을 한동안 구류시키다가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강 문두찬은 대번에 온 연변에 소문이 났다. 키는 작은편이고 얼굴색이 철색이기는 하나 혁명동지들에게 있어서 그는 흠모와 선망의 대상이였다. 이는 16살 때의 일이라 소녀 두찬이는 앞길이 창창한 소녀로 커가고 있었다.


4

90년 전인 1929년말에 연변에서는 대중적 반일 학생시위 투쟁이 드세게 일어났다. 룡정과 평강벌 각지의 사립학교 학생들이 분분히 일떠나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시위투쟁에 나설 때 문두찬은 장인강일대의 학생시위자들과 함께 투도구로 달려갔다. 그는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 ‘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 철페하라!’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며 시위대렬들의 앞장에서 나아갔다.

1930년 3월에 이르러 반일시위투쟁은 더욱 세차게 번져갔다. 이해 3월 1일에 문두찬은 일신학교와 신광학교의 사생 200여명과 같이 조개떡으로 점심을 준비해가지고 또 투도구로 향하였다. 남학생들은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고 녀학생들은 치마자락에 싸가지고 저마다 삼각 붉은기를 들고 시위대렬에 가담하였다. 시위대렬의 선두에는 문두찬이 서있었다.

투도구 령사분관의 경찰놈들은 시위대렬을 해산시키려고 애썼다. 시위학생들은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돌멩이로 령사분관과 민회를 습격하여 유리창문을 여지없이 들부셔놓았다.

악이 난 놈들은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김기범 선생이 박투하다가 밑에 깔리니 문두찬 등은 와락 달려들어 우의 경찰놈을 진흙탕에 처박았다. 끝내 40여명의 사생들이 체포되였다.

3월 2일에 문두찬은 100여명의 학생들을 이끌어 동지석방투쟁을 벌리였다. 그들이 투도구의 진란촌을 지나 령사분관 쪽으로 움직일 때 여러 사립학교의 학생들이 달려와 합세하였다. 놈들은 주모자와 골간들을 붙잡으려고 시위대오에 붉은 잉크를 내뿜었다.

이날 문두찬 등 여럿이 또 체포되였다. 녀자는 고작 2~3명인데 그나마 체포된 골간들은 2~3일 만에 모두 풀려나왔으나 문두찬을 쉽사리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놈들이 두찬이의 치렁치렁한 머리태를 거머쥐고 때리며 끌고갈 때부터 두찬이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는 놈들이 때릴수록 떳떳이 고개를 쳐들고 반일구호를 더 높이 불러댔다. 투옥된 뒤에도 “누가 시킨 것이냐?” 하는 심문에 “누가 시키긴? 닭은 누가 울라고 해서 우는가?” 하고 되알지게 쏘아주었다.

“이년, 시집은 가지 않고 뭘 하려고 미쳐날뛰며 야단이냐?”

“흥, 너 같은 놈들을 낳을가봐 시집 안 간다!”

“뭣이?!”

분이 상투밑까지 치민 놈들은 마구 구타를 들이댔다. 두찬이는 의연히 굴할 줄 몰랐다. 놈들은 한주일이 지나 문두찬이를 석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령사관에서 놓여나온 후 놈들의 더러운 손아귀에 잡히웠던 머리태라며 아예 뭉청 잘라버리고 단발머리를 했다. 그때 혁명자들은 단발머리를 ‘맑스머리’라고 불렀다.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