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를 굽히지 않은 기운정

2019-03-11 09:20:19

기운정

기운정은 원명이 기보청이며 1910년 산서 평요현에서 태여났다. 1927년에 북평중국대학에 입학했고 대학기간에 맑스주의 저작과 당간행물을 열독하기 시작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반제대동맹’ 등 당의 외곽조직에 참가했다.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3년 5월, 기운정은 당의 파견을 받고 공산당원 길홍창이 령도하는 항일동맹군에서 정치사업에 종사했다. 6월, 그는 동맹군 주력을 따라 북상하여 일본침략자를 반격했으며 부대에서 항일선전을 동원하였고 둬룬을 수복하는 전투에도 참가했다. 항일동맹군이 실패한 후 그는 태원으로 돌아가 혁명상호공제조합 사업을 책임졌고 지하공산당원들과 애국진보청년들을 엄호 구출하고 지하당조직을 회복 재건하였다.

중공산서사업위원회가 재편성된 후 기운정은 당조직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기타 당원들과 함께 염석산의 ‘중국청년구국단’과 ‘건설구국사’에 침투하여 공개적인 신분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또 태원국민사범학교의 교장을 추동해 태원에서 《향촌소학교육주간》을 창간하여 총편집을 맡고 공산당의 항일주장과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선전하였으며 민중들을 동원해 항일투쟁에 뛰여들게 했다.

1936년 2월, 중공중앙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추동하기 위하여 중공중앙은 장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한 홍1방면군이 중국인민항일선봉군의 명의로 동정을 시작하여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에 들어가 항일전선으로 나아가도록 결정했다. 이에 아주 두려워난 산서지방군벌 염석산은 반공법령을 발포하여 공산당원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었고 태원은 백색테로에 휩싸였다. 기운정은 위험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주보선, 뢰약우 등 지하당조직의 책임동지들을 성밖으로 이전시켰지만 자신은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1936년 3월 3일, 기운정은 불행하게도 체포되였고 태원경비사령부 군사재판소에 갇혔다. 적들은 높은 관직, 높은 봉록으로 그를 유혹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갖은 고문을 들이댔다. 그러나 그는 시종 굴복하지 않았고 적들의 파쑈폭행과 단호히 맞서 싸움으로써 한 공산당원의 확고한 의지와 품질을 보여주었다.

3월 26일, 반동군경은 그를 태원 대남문밖의 사형장으로 끌고갔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서 기운정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었으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한간, 매국노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 등 구호를 높이 웨쳤다. 기운정은 영용하게 희생되였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살밖에 안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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