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항일녀성영웅 문두찬의 일화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29

2019-03-11 08:29:15

셋째 삼촌 내외간은 두찬에게 친부모 같은 사랑을 몰부었다. 어느 날 두찬이는 엷은 옷차림에 코신을 신고 나섰다가 손발이 얼고 말았다. 삼촌내외는 손발을 주물러주다가 얼어든 손발을 콩자루 속에 넣어 천천히 녹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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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상처한 문두찬의 아버지 문창주는 딸이 딸린 녀인을 후처로 맞아 들이였다. 그들 오누이ㅡ문두찬과 동생 문두만은 녀동생이 한명 더 생겼다면서 친형제처럼 끔찍이도 어울렸다. 그때를 두고 문두찬의 남동생 문두만의 아들인 문명호씨는 “저의 할아버지이고 문두찬의 아버지인 문창주는 전에 홍범도 장군과 인연이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몇번 잡혀서 고생하셨다.”고 가족사를 돌이켰다.

문명호씨에 따르면 고모 문두찬이 6세가 될 때 홍범도 장군이 장인강의 문창주 댁에 들리면서 어린 문두찬도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1920년 10월 이름난 화룡 청산리전투가 끝나고 홍범도 장군이 로씨야로 전이한 다음 문창주는 로씨야 연해주에 가서 반일운동에 뛰여들었고 후에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여 다리가 불구로 되였다는 이야기, 그만큼 문창주는 열렬한 반일운동가로서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로어 4개 국어를 통달하여 문통사라고 불리였다.

그 후 조부모와 아버지가 선후로 세상을 뜨면서 마을의 셋째 삼촌 내외인 문창렬과 전근숙 부부가 두찬이와 두만이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소학교 졸업을 앞두고 문두찬은 한마을의 리영희와 자유약혼을 했다. 그 세월에는 남녀 15살쯤이면 의례 결혼해야 하는 줄로 알았다. 시집은 형편이 구차했지만 후에 어랑촌 13용사 가운데의 한사람인 리구희를 둔 혁명가정이였다. 당시 시집에는 시부모에 시동생인 리구희, 리창송, 리억손 셋과 시누이 한명까지 도합 7명이였다.

1930년 3월, 문두찬은 6년제 사립일신학교를 졸업한 후 리씨댁 며느리로 들어갔다. 그와 남편 리영희는 금슬이 좋았다. 대외로는 혁명조직의 지시로 마을에 남아 부녀야학생들의 선생을 맡았다. 야학실은 사회주의계몽운동의 중요한 형식이였다. 문두찬은 부녀들에게 어문과 산수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혁명사상을 애써 선전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그는 부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 헐벗고 굶주리지만 부러움없이 살아갈 좋은 사회가 꼭 옵니다. 그때면 밭갈이도 소에 가대기가 아니라 기계농사를 짓게 될 것입니다.”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 부녀들은 리해가 안 간다면서 웃고 말았다. 두찬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혁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예요. 일본놈들과 지주, 자본가의 압박착취에 반항하여 일어나는 것이 곧 혁명이지요. 우리 동지들이 마을에 왔을 때 콩을 닦아준다든가, 양말을 기워준다든가, 실과 바늘, 성냥 등을 지원하여주는 것도 역시 혁명입니다. 이런 혁명을 가리켜 ‘앉은 혁명’이라고 하지요.”

문두찬은 부녀들에게 알기 쉽게 해석해주느라 무척이나 고심했다. 그래서 부녀들은 두찬이의 말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말하였다.

두찬이의 활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마을의 소년들에게 혁명이야기를 해주고 혁명가요를 곧잘 가르쳤다. 그날의 인상이 하도나 깊어 당년의 소녀들이였던 장인강의 할머니들은 필자가 문두찬의 혁명투쟁력사를 취재했던  20세기 80년대 초기에 그제날의 두찬 선생을 회상하면서 그에게서 배운 <소년행진곡>을 불러주었다.


귀하고도 장하도다 우리 소년들

새 사회의 주인공 될 우리들이다

우리들은 뜨거운 피 식히지 말고

어서 바삐 현사회와 싸워봅시다.

……


6

1930년 6월에 문두찬은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나중에 중공평강구위 제1임 서기로 된 주현갑(항일렬사)과 리동선(항일렬사)이 직접 문두찬의 입당소개인으로 나섰다.

입당한 후 별호 쟁굴이로 통하는 문두찬은 당조직의 배치에 의해 장인강 봉의동공청단지부 선전위원 책임과 봉의동부녀회 회장 책임을 맡았다. 그해 7월20일경에는 약수동에 가서 공청단평강구위원회를 선거하는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공청단평강구위 소선대 총책임자로 선출되였다. 그의 활동무대는 곱절이나 늘어났고 구위간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1930년 7월말에 평강구유격대가 강건너 조의구(朝义沟) 산속에서 조직되였다. 시동생 리구희도 구유격대원으로 되였는데 이름은 ‘로농홍군’이라 불리였다. 대외로는 연화유격대로 통하였다. 8월초에 이 유격대는 군사총지휘 신춘의 인솔하에 장인강일대를 떠나 골안치기를 넘어 도목구(倒木沟) 일대로 전이하게 되였다. 두찬이는 부녀회원들과 함께 밥과 채를 해가지고 함지 등에 담아 이고 유격대가 머무르고 있는 남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유격대가 도목구 상촌에서 중국륙군대의 포위에 들어 큰 손실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에 치를 떨었다. 이어 문두찬의 삼촌댁인 전근숙의 사촌동생 전형기가 희생된 비극이 일어났다.

사연은 이러하였다.

이해 1930년 가을 평강구유격대 주요 책임자의 한사람인 로창호가  늘 장인강으로 다니며 이곳 주둔 중국륙군대의 총을 빼앗을 기회를 노리였다. 마침 이해 음력 9월 3일은 장인강 도대구 혁명자 문화준의 조부 생일날이라 조선 흰두루마기를 입은 륙군대 몇몇이 문화준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날 아침 로창호는 구유겨대 대장 차남균 그리고 장인강의 리명희, 리구희, 리동희, 전형기, 문화준 등 동지들과 함께 리명희 집에 재빨리 모여앉았다. 로창호와 차남균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면서 급히 행동하기로 하였다. 전형기, 문화준을 중심으로 한 무기탈취소조가 인차 무어졌다.

음력 9월 3일 아침, 무기탈취소조는 쥐도새도 모르게 문화준의 집을 에워쌌다. 형기와 화준이 로창호와 차남균의 권총을 몸에 지니고 형기가 작탄 하나를 더 휴대했다. 미구에 형기가 방문을 열어제끼면서 “꼼짝 말앗!”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헌데 “땅!”하는 소리와 함께 전형기가 륙군대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륙군대 병사 한명이 총을 잡고 있는 줄을 미처 몰랐었다. 의외의 사태에 뒤문으로 뛰여든 문화준은 급한 김에 총을 쏜다는 것이 천정을 맞히고 말았다. 륙군대가 행동하는 통에 무기탈취소조는 쓰러진 전형기를 뒤에 남기고 줄행랑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전의 정찰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실수였다. 동지들은 아쉽게도 전형기를 잃고 말았다. 로창호 등은 로창호가 갖고다니던 등사기와 작탄제조용 약 그리고 망원경을 당지 한 동지의 집에 보관시키고 장인강을 떠났지만 장인강은 자기 동지 전형기를 잃은 손실을 입었다. 문두찬은 동지들과 함께 전형기 가족을 위문하는 한편 삼촌댁 전근숙도 찾아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7

그럴수록 두찬이는 혁명사업에 더욱 열성을 냈다. 그의 발자국은 장인강의 마을마다와 열두시렁(세린하), 약수동, 소오도구, 내풍동, 룡정, 개산툰, 달라자 등지에 또렷이 찍히였다. 문두찬의 눈부신 활동은 적들의 주시를 받았다.

1930년 가을의 어느날 두찬이는 바깥으로 돌다가 도대구의 집에 잠간 들렸는데 밖에서 ‘곰’이라고 부르는 집의 개가 갑자기 왕왕 짖어댔다. 투쟁의 수요에 의해 길들여진 개인데 군복을 입고 총을 멘 낯선 사람을 보아야 짖어대군 한다. 그러니 틀림없는 놈들이였다. 두찬이는 제꺽 뒤문으로 나가 짚단을 세워놓고 그속에 숨었다.

또 한번은 투도구 령사분관 경찰놈들이 달려들었다. 개가 짖어대니 그는 역시 뒤문으로 빠지여 김치움속에 들어갔다. 벼짚을 묶어 만든 두지를 덮어놓으니 적들은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그 세월에 셋째 삼촌 내외간은 두찬에게 친부모같은 사랑을 몰부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윙윙 불어치던 어느날 두찬이는 엷은 옷차림에 코신을 신고 나섰다가 손발이 얼고말았다. 삼촌내외는 너무도 가슴 아파 급히 손발을 주물러주다가 얼어든 손발을 콩자루속에 넣어 천천히 녹여주었다.

한번은 엄동설한에 외출한 두찬이가 며칠이 되여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든 삼촌내외는 마을 안팎과 린근 산야를 누비다가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움직이기 어려워하는 두찬이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조카를 업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하면서 간신히 집에 돌아온 다음 콩자루에 손발을 넣어 몸을 녹여주었다. 그리고는 마당의 마른 가지나무를 가져다가 삶아 그 물로 언 독을 빼주었다. 조카가 소생하니 삼촌댁은 눈물을 글썽이였다. 그러는 삼촌네를 보고 두찬이는 맑게 웃어보이며 <소년행진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 바위라도 한번치면 부셔지리라

왜놈들을 남김없이 때려부시자…


문두찬에 대한 삼촌내외의 사랑과 아낌은 그뿐이 아니다. 어느날 투도구 쪽에서 느닷없이 적들이 덮쳐드는데 미처 피할 사이가 없다. 급한 나머지 두찬의 삼촌댁ㅡ문해복의 어머니 전근숙은 가마목을 찾아 가마를 훌렁 들어냈다. 두찬이가 부엌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가마에 물을 부어넣었다. 적들이 두찬이의 삼촌집에 들이닥쳤을 때는 두찬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들이 물러간 후 문두찬은 부엌안에서 나왔지만 두찬이의 머리가 그을어 볼품 없었다. 다리랑 여러 곳이 데여 보기에도 끔직했다. 삼촌댁은 두찬의 얼굴도 닦아주고 덴 곳에 토장도 발라주며 락루하였다. 문두찬은 두찬대로 “이것이 항일 혁명가의 락”이라면서 삼촌댁을 보며 호호 웃었다. 그에게서 실망이나 비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8

항일에 온몸을 내번진 문두찬으로 하여 삼촌집은 말이 아니였다. 어느 날 적들은 문두찬을 붙잡으려다가 잡지 못하니 두찬의 삼촌내외와 문두찬을 내놓으라고 야단을 쳤다. 적들은 비밀아동단원으로 활동하는 두 찬의 남동생 두만이도 찾지 못하게 되자 삼촌집에 거처하던 문두산의 두손을 말꼬리에 잡아매고 마을이고 가시밭이고 마구 끌고다녀 말이 아니였다.

문두산은 문두찬의 아버지 문씨의 다섯째 동생, 즉 막내동생의 아들이다. 두찬이와는 사촌 관계인데 두살 때인가 부모를 잃고 셋째 큰아버지 문창렬의 집에서 자라게 되였다. 두찬 누나의 영향으로 마을의 아동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적들에게 굽히지 않는 굴강한 성격을 키워왔다. 적들의 말꼬리에 끌려 다니면서도 비겁하게 놀지 않았다.

이 문두산이 자라서 1945년 8.15를 맞이하더니 총을 메고 연변의 토비숙청에 뛰여들었다. 그러다가 1945년 그해 11월 15일에 토비놈들에게 피살되니 해방전쟁 렬사이다. 누나 문두찬의 손과 발이 되여 뛰여다니던 그제날 항일아동단원의 빛나는 발자취다.

1931년 봄에 문두찬은 화룡현 비암촌 부근의 개척 포지골에서 열린 평강구 당확대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헌데 회의지점이 드러나 그와 여러 동지들은 개척의 공안분주소 순사들에게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압송되였다. 그때 옥중에는 문두찬과 중공왕청현위 부녀위원 김영신, 김정길 등 8명의 녀성혁명가들이 갇히였다. 두찬이는 3년 형에 언도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옥중에서 몸까지 풀어야 했다.

작은 생명의 도래는 옥중의 녀성들에게 환희를 갖다주었다. 사랑스런 녀자애였다. 녀성들은 자기들이 적게 먹으면서 차례지는 음식물을 산모인 두찬에게 남겨주었다. 녀성들의 뜨거운 사랑 속에서 그는 인간애의 따사로움을 한껏 느끼며 갓난애를 품에 꼬옥 그러안았다. 어머니로 된 기쁨이 온몸을 전률케 하였다. 하지만 투쟁의 간고성을 헤아린 두찬이는 모성애의 강렬한 정감을 억누르고 면회하러 온 시어머니에게 어린 것을 넘겨주었다.

1932년 3월에 이른바 만주국이 서면서 문두찬은 여러 녀성혁명가들과 함께 특사령을 받고 앞당겨 출옥하였다. 고향에 돌아오니 셋째 삼촌은 적들에게 끌려가 고문 끝에 반신불수가 되였고 집까지 불에 타버렸다. 다른 한 오막살이에 거처하다가 그들은 또 불의 세례를 받았다. 시동생 리구희도 연길감옥에 갇혔다가 대사를 받고 나오는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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