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감옥가> 작사가 리진과 녀동생 리신옥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32

2019-04-01 08: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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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이면 1월 27일이다. 연변텔레비죤의 기자출신 김광현씨 자가용으로 이름난 항일련군 장령 박길송의 누이동생 뵈러 훈춘으로 달리게 되였다. 김광현씨와는 일찍 복건성 영안과 장정, 강서성 서금과 그 일대까지 다녀오며 홍군 장령들인 양림, 무정, 최음파 등 발자취를 함께 추적했던 사이이다. 대화 가운데 어제 오후 만난 김진옥씨와 연길감옥 이야기가 나오니 김광현씨가 인차 뒤를 물었다.

“우리 장모님이 일찍 연길감옥에 대해 말씀이 있었는데 늙은이들 얘기겠지 하고 주의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

“연길감옥? 그런 말씀이 나올 때엔 필경 연유가 있겠는데요.”

“장모님의 어머니가 연길감옥과 관련이 있다고 하던데요. ”

“그래요? 오늘 돌아가서 인츰 문의해보세요. 연길감옥 투옥이 사실이라면 단언컨대 당년 연길감옥 8명 녀항일투사중 한 사람일 겁니다! ”

“설마요? ”

“연길감옥 얘기가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

이야기 속에 빠져든 우리는 저마끔 흥분 속에서 들떠있었다. 김광현씨는 장모님의 어머니가 연길감옥 8명 녀항일투사 가운데 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으로 흥분했다면 나는 지금껏 모르던 8명 녀항일투사중 한 분을 발굴하게 되면 연길감옥 항일사 연구를 보다 추진할 수 있게 된다는 데서 흥분했다.

그러면서 근심도 없지 않았다. 만약 8명 녀항일투사중 최선일이라면 어찌할가, 항일의 장래에 비관하다가 출옥 후 결국 혁명을 견지하지 못하였다고 하던데…

그러나 나의 근심은 부질없는 것이였다. 그날 우리가 훈춘시에서 박길송 렬사의 녀동생 박순금(올해 85세)씨를 만나뵙고 귀로에 오른 뒤 미구에 저녁쯤 김광현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좋은 소식입니다. 장모님의 어머니가 연길감옥에 갇힌 분이고 성함은 리신옥이라고 합니다.”

“진짜 좋은 소식이네요. 리신옥이면 당년 연길감옥 8명 녀항일투사 가운데 한 분이고, 유명한 연길감옥가 작사자 리진 렬사의 녀동생입니다!”

“와아ㅡ”

우린 약속이라도 하듯 탄성을 질렀다. 나로서는 1981년초에 연변 룡정에 가서 항일투사 차정희 녀사를 방문하면서 연길감옥가의 작사자가 리진, 즉 리선재이고 리진의 녀동생이 리신옥이라는 것을 처음 듣고 세상에 처음으로 알리였는데 리진과 리신옥의 래력과 가족관계 등을 밝히지 못한 것이 깊은 유감으로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38년이 흐른 뒤 종내 이들의 유가족을 알게 되고 가족관계를 밝히게 되였으니 탄성이 터질 만도 하였다.

김광현씨의 초대로 1월 29일 오전 연길시에서 녀항일혁명가 리신옥의 딸 박정숙씨를 방문취재하게 되였다. 박정숙씨는 리신옥의 맏딸로서 1935년생이였다. 가족관계 관련 리신옥을 두고도 생생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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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숙씨 인터뷰에 따르면 어머니 리신옥 녀사 남매는 모두 7명이라고 한다. 남매들 맏이가 제일 큰언니일 때 그 아래로 맏오빠 리진 즉 리선재이고 남매들 셋째가 둘째 오빠 리명덕, 넷째가 둘째 언니로 된다. 남매 중 다섯째가 어머니 리신옥이였다. 리신옥의 아래로 또 여섯째 리명재와 일곱째 리금순(지금 할빈에서 생활하고 있음)이 있었다.

지난 세기 20년대 중반까지만도 이들 리씨 가족은 함경북도 명천군 연덕동(渊德洞)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터전을 옮긴 것이 1928년경. 처음에는 두만강 중류 북안의 개산툰의 삼동포에 한동안 머무르다가 다시 왕청현 대감자(大砍子)로 이주했으니 그때가 1929년으로 헤아려진다. 남매에서 다섯째인 리신옥은 그해 15살의 소녀이고 남매에서 둘째인 리진 오빠는 신옥이보다 8살 우였다.

그러면 리진은 1907년생이고 리신옥은 1915년생으로 된다. 그때 세상에 태여나지도 않은 박정숙씨는 어머니 리신옥과 큰아버지 리진의 교육상황은 알 수가 없다. 1981년초 룡정에서 방문한 차정희 녀사의 회고에 의하면 연길감옥 투옥시절 리진은 20대 중반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연길감옥가>도 척척 지어냈고 리신옥도 지식형 소녀였다. 이런 회고는 리진과 리신옥이 중학교나 소학교 교육 정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리진은 물론 리신옥은 중국어 구사도 제법이였다. 조선이주민들에게 달캉재라고 불리운 대감자에는 중국인들도 적지 않아 조선이주민들에게 중국인으로 불리운 한족들과 어울리면서 중국어를 배운 모양이였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왕청현 대감자에도 조선공산당 화요파 당원들이 활동하면서 조선공산당 지부가 조직되였다. 1930년 대중적 5.30폭동 이후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대감자에도 중국공산당 지부가 생겨났다. 조선공산당 당원 리진은 첫패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리신옥도 소선대원으로, 공청단원으로 자라났다.

1930년 가을 연변땅에는 대중적 추수폭동이 맹렬히 일어났다. 왕청현 대감자도 례외가 아니였다. 리신옥은 오빠 리진을 따라 600여명이 참가한 추수폭동에 궐기하여 나섰다. 이어 투쟁골간들과 더불어 대감자 공안분주소 앞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놈들이 총을 발사하면서 탄압하는 통에 오빠 등과 함께 불행히 체포되여 그해 겨울에 연길감옥에 투옥되였다.

맏오빠 리진은 언녕 결혼한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중손이라는 3~4살 정도의 아들애가 있었다. 리진의 안해 되는 사람은 남편을 따라 혁명의 장도에 오른 당원이고 녀성혁명가로서 추수폭동 때 공안분주소 놈들의 탄압이 시작되니 잰솜씨로 업은 아들애를 울바자 너머 짚더미에 밀어넣었다. 그 통에 어린 아들애는 척추를 상하여 비실비실 앓음자랑 하다가 외할머니 갖은 노력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네댓살 때 어린 생명을 마감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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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추수폭동 때 리진의 안해는 아들애를 시집에 맡겨두고 그 걸음으로 라자구유격대 즉 왕청현유격대 재봉대에 참가했는데 그후 종무소식이다. 리신옥과 오빠 리진은 폭동시위자 40여명과 함께 체포되여 왕청현성인 백초구로 넘어갔다가 리진, 리신옥 등 12명은 방화범 등 이른바 죄명으로 연길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12명 가운데서도 주동자인 그들 오누이는 무기형에 언도되니 이해 리신옥은 16살의 소녀였다.

16살 소녀를 어리다고 보지 마시라. 1930년 이해 16살인 리신옥은 그 세월 모두가 그러하듯 자기보다 다섯살 이상인 박창렬과 결혼했으니 새 신랑 되는 이는 고향 명천에서부터 한마을에서 살다가 더불어 두만강 이북 이주길에 오른 박씨네 박대동의 아들이였다. 이들 박씨네도 대감자의 한마을 사람이라고 하지만 기실은 연길현 석인구 쪽 사람으로 알려진다.

1930년 이해 봄인가 결혼한 후 리신옥은 석인구 세전동(복흥)에서 시집살이를 하게 되였다. 시집 쪽에서도 리신옥은 혁명가의 본성 그대로였으니 ‘뾰족산 우 녀자변호사’라는 별명이 이를 잘 말해준다. 1981년초 연변 룡정에 가 녀항일투사 차정희 녀사를 방문할 때 리신옥이를 가리켜 ‘뾰족산 우 녀자변호사’라면서 이는 리신옥만을 뜻하는 별명이라고 하였다. 뾰족산에 올라 적들 쪽에 대고 함화공작을 들이댈 때면 그의 지식, 그의 조선어, 중국어 말재주가 은을 냈다는 얘기다.

그러던 리신옥은 1930년 연변의 추수폭동 때 당조직의 지시로 대감자  추수폭동에 나서게 되였다. 그의 대감자행은 비밀행동이여서 리신옥은 폭동 전날 시아버지 박대동씨와 대감자 친정집으로 다녀와야겠다고 여쭈었다. 시아버지는 두말없이 황초동과 구룡평, 백초구 령을 거치면서 며느리를 꽤나 먼거리의 대감자로 데려다 주고 하루밤 쉬고 이튿날 아침 떠나면서도 며느리가 떠나는 날 추수폭동에 참가하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리신옥이 연길감옥에 투옥되여 무기형을 받은 후 주변사람들은 리신옥의 남편 박창렬과 그 오랜 기간을 어떻게 기다리냐며 재혼을 권고하였지만 박창렬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린다는 남편, 보통 농사군의 신분으로 말없이 자기의 혁명사업을 내조하던 남편이 그지없이 고맙기만 하였다.

앞에서도 스치고 지났지만 차정희 녀사는 리신옥의 오빠 리진은 옥중 악형에 의한 시달림과 장질부사에 모대기다가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년 연길감옥 파옥을 다루면서 김병수, 리철준의 집필로 된 항일실화집ㅡ《파옥》(료녕민족출판사, 1985년 8월)에서는 <연길감옥가>가 리선재가 1932년에 사형장으로 나가기 전날 밤 지어 부른 노래라고 밝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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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숙씨의 회고는 이와 전혀 다르다. 리진이 희생된 후 옥중의 그의 자리에서 <연길감옥가> 가사를 발견하였고 옥중동지들이 이 가사에 곡을 붙여 노래화 하였다는 것이 박정숙씨 주장이다. 그러면서 큰이모한테서 들은 바로는 리진의 유체 담은 관이 마차에 얹혀 하남다리를 건널 때 마차우 관에는 ‘리진’이라는 이름패가 걸리였다고 했다. 그때 마침 리진의 아버지 리춘삼이 호출장을 받고 연길감옥으로 가다가 하남다리에서 마차와 맞띄였고 그 마차를 넘겨받아 그대로 몰고갔다고 한다.

리진 항일렬사가 연길감옥에서 엄중한 취조와 잇달아 닥친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을가, 아니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가, 이는 계속되는 연구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그렇다 할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차정희 녀사는 장질부사라고 했다.

하다면 연길감옥내에서 장질부사가 어느 정도 만연하였을가. 이는 그 시절 동아일보에 많이도 실리였으니 동아일보 몇몇 기사를 살펴보자. 먼저 1931년 3월 26일자 2면 동아일보 기사ㅡ<연길간수소에>의 내용이다.

동불사 관내 소북동(小北洞)에 거주하는 허세호(许世镐, 24세)와 세린하에 거주하는 리두용(李斗用,26세) 두 청년은 지난 15일 연길간수소 암흙철창에서 무참히 이 세상을 떠났다.

이날 기사에 따르면 허세호와 리두용 두 청년은 얼마 전에 공산당 혐의로 중국군경에 검속되여 투옥되였고 엄중한 취조를 받다가 감옥 안 전염병이 만연되여 사망하였다. 리두용은 3대 독자로 집에는 늙은 부모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안해가 있을  뿐이다. 이날 기사는 계속하여 연길감옥내 장질부사 상황을 밝히고 있다.

동 감옥에는 공산당혐의자 230여명이 류치되여있는 터로 60여명이 전염병에 걸려 신음하는중. 현재 위독한 환자로 15명이나 된다 한다.

연길감옥 230여명 공산당혐의자 중 장질부사로 신음하는 자 60여명은 연길감옥내 상황이 아주 나쁨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다. 1931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ㅡ<연길감옥>는 지금까지 장질부사로 “사망한 자 총수가 16인이라 하며 아직도 230여명이 태반이나 환자라는데 사망자는 대개 조선사람이라 한다.”고 기사화하였다.

1931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ㅡ<연길감옥에>은 연길감옥내 장질부사 만연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년 5.30폭동사건 후 공산당혐의로 검거된 이래 연길감옥내에서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 자외 일반 죄수 합 500여명을 수용한 암흙철창에 장질부사가 침입하여 방금 장질부사 환자 40여명이고 사망자가 2명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사망자 2명은 동불사 요구에 거주하는 김철우(李哲宇)와 봉림동 리종렬(李锺烈)이라고 밝혀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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