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감옥가> 작사가 리진과 녀동생 리신옥

2019-04-08 08: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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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31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7면 기사-<연길감옥에>을 보면 “면회하러 갓선든 안해가 시체된 남편을 차저” 갔다면서 “지난 17일에도 또 화룡현 월신사에 사는 오창묵(21)이가 동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는 3개월 전에 공산당용의자로 동 심판청에 구금된 바 1주일 동안 병석에서 물 한목음 못 먹고  동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사실을 모르는 부모와 밋 미망인은 면회차로 음식을 가지고 심판청 문아페 당도하여 면회를 청한즉 동 심판청에서 시체를 차저가라는 말에 그의 부모와 밋 미망인은  너무나 긔가 막혀 따에 거꾸러져 세시간이나 대성통곡을 하얏는데 그 현장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를 물론하고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업나한다.”

1931년 3월부터 7월까지 사이 연길감옥 장질부사 관련 동아일보 몇몇 기사내용을 서술하여보았다. 동아일보 여러 기사들은 하나같이 연길감옥내 전염병-장질부사 상황이 아주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연길감옥에 투옥된 적지 않은 우리 민족 항일혁명가들이 적들의 비인간적인 취조와 장질부사로 쓰러졌으니 왕청현 대감자 출신 항일혁명가이고 <연길감옥가> 작사가인  리진도 그 가운데의 한사람이라고 보아진다.

당년 리신옥이 투옥된 연길감옥에는 리신옥 등 녀자 ‘정치범’ 8명이 있었다. 중공왕청현위 부녀위원 김영신(후날의 중공동만특위 부녀위원, 항일렬사), 공청단왕청현위 부녀위원 최선일과 옥중에서 뜨개보를 떠서 유명해진 후날의 연길현유격대 전사 김정길(항일렬사),  1929년 연변학생반일시위에서 소문 떨친 화룡현 장인강의 문두찬(렬사), 차정희, 정경옥 등이 그러하다

리신옥 등을 질색케 한 것은 자기의 상급이기도 한 공청단왕청현위 부녀위원 최선일이였다. 그는 연길감옥에 투옥된 후 혁명의 전도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외부의 혁명은 전부가 망가진 것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지금의 혁명은 ‘시기상조’라는 어구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혁명에 몸바친 리신옥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였다. 그는 성격이 콸콸한 화룡현 약수동 출신 정경옥과 같이 최선일이와 도리를 따지다가 실망한 나머지 옥중의 동지들과 “저 사람은 사상이 변했다.”고 찍어 말하였다. 1932년 봄 출옥한 후 최선일은 이해 겨울 희생된 중공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의 뒤를 이어 당동만특위 부녀위원으로 뛰기도 하였다지만 그 후 최선일은 과연 혁명을 견지하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옥중에서 정경옥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중공왕청현위 부녀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된 김영신이였다. 그의 고매한 인품과 혁명투쟁 경력은 리신옥과 정경옥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김정길도 리신옥의 존경을 받을 만한 동지였으니  어느 날 김정길은 간수를 통해 뜨개실과 뜨개바늘을 사서는 흰종이에다 연필로 도안을 그리며 뜨개를 뜨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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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신옥 등이 뜨개보를 떠선 뭘하는가고 묻자 정길이는 기념으로  뜨는데 죽은 후에라도 유물이 될 거라며 환히 웃는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자  뜨개보가 다 떠지고 뜨개보엔 한자 스물일곱자가 새겨졌다. 한자 스물일곱자를 번역하면  그 뜻은 이러하다.

“연길현 제4감옥에 갇힌 김정길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뜬 뜨개보, 청년녀성들이여 세계해방의 노래 높이 부르라.”

“야, 멋지다!”

리신옥도, 정경옥도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적들이 낌새를 채지 못하게 하려고 글을 밑에서부터 우로, 오른편에서부터 왼편으로 수놓은 자체가 걸작이였다. 리신옥은 김영신, 정경옥 등과 함께 서로서로 김정길의 두손을 꼭 잡으며 목숨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싸워가자고 속심을 터놓았다.

1932년 3월에 괴뢰만주국이 서면서 특사령이 내렸다. 김영신, 김정길, 문두찬, 정경옥, 최선일 등은 특사를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갔다. 그러나 무기형에 언도된 리신옥은 특사를 받지 못하였다. 지난 1990년말에 정리한 ‘리진이 지은 <연길감옥가>’에서는 리신옥도 특사로 풀린 것으로 되여있지만 리신옥의 딸 박정숙씨는 1932년 봄이 아닌 1934년 가을, 즉 음력 9월 27일에 석방되였다고 회고하였다.

박정숙씨의 회고에 따르면 어머니 리신옥이 이른바 무기형 4년 만에 풀리기까지는 감옥당국과 중국어로 변호를 잘한 덕, 어머니는 자기의 드센 입덕으로 나오게 되였다고 한다. 이는 중국어도 마음 대로 구사하는 리신옥이 감옥당국과 설전을 벌이여 무기형을 4년 유기형으로 대폭 감형하였음을 잘 알려준다.

리신옥은 연길감옥에 투옥된 4년간 적들의 악랄한 취조와 렬악한 감옥내 상황으로 하여 이발은 모두 부서지거나 끊어진 상황이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석방될 때 남편 박창렬과 남편의 둘째 형님 박창석, 여러 친척들이 연길감옥으로 몰려갔다. 시형 박창석이 연길감옥 안에 들어가서 제수를 업어내오고 준비한 마차로 국자가의 집으로 돌아갔다.

1931년 9.18사변 후 석인구 세전동이 일제놈들에 의해 불바다가 된 데서 리신옥 시집은 국자가에 내려와 생활하고 있었다. 지금의 연변병원 바로 앞이였다. 그때 연길감옥에서 풀린 리신옥은 하얀 광목치마저고리를 입고 맑스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공산당 리신옥을 보겠다고 중국사람이고 조선사람이고 숱한 사람들이 창문 창호지에 침으로 구멍을 내고 들여다 보기가 일쑤였다.

“야, 이거 못살겠구나!”

박창렬은 안해 리신옥과 같이 텅 빈 집터 뿐인 석인구 세전동으로 옮겨 앉았다. 목수조예가 있는 큰형님이 도와 나서니 초막집이라고 살림살이를 차릴 수가 있었다. 그때가 1935년 봄의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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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가에서 맏이인 박정숙을 임신하고 이주하였다가 국자가 큰집으로 돌아와서 출산하고는 다시 세전동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마을은 차차 39호 동네로 늘어났다. 리신옥은 남편 박창렬씨와의 금슬이 좋아 맏이 박정숙에 이어 10년 사이 딸만 줄레줄레 넷을 낳았다. 그중 둘째와 셋째를 잃고 맏이와 막내 둘만이 살아 해방을 맞이하였다.

지난 세기 30년대 중반은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 현 항일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개편되여 여러 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보다 광활한 지역에서 활동하고 지방의 당조직과 혁명단체는 모두 파괴된 뒤였다. 그 같은 와중에도 산속 항일무장은 련락원을 보내 리신옥과 련계를 가지였다.

리신옥은 마을에서 툰장직을 맡고있는 시동생 편을 통해 배급제를 실시하는 소금이랑, 헝겊신이랑 모아서는 산속 련락원에게 넘겨주었다. 리신옥은 바로 걷지도 못하는 무릎걸음 신세가 되였어도 항일혁명가로서의 마음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리진과 리신옥의 영향으로 신옥의 친정집은 모두가 항일무장투쟁을 후원하여 나섰다. 개산툰 삼동포의 4촌, 6촌네 형제들인 리동원, 리동철들도, 리동원의 안해 방주옥도 일찍 항일혁명가, 항일렬사들이였다.

혁명에 대한 굳은 절개로 하여 리신옥은 산간마을로 이사한 후에도 적들의 시도 때도 없는 시달림과 행패질을 당하여야 하였다. 그 나날이 하루이틀도 아닌 장기간 이어졌다. 리신옥은 또 별수없이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모는 소수레에 앉아 석인구 골안의 삼도만과 의란 쪽 바위구간에 가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가족이 고사리나 산나물을 캔 후에야 그는 소수레에 앉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모진 세월은 하루 또 하루 흘러갔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르니 일본놈들이 패망을 한해 앞둔 1944년이 돌아왔다. 이해 봄에 리신옥의 시아버지  박대동은 무릎걸음을 하는 며느리 다리를 펴보고 싶었다. 민간료법에 따르면 독학나무 뿌리가 좋다고 했다.

과연 어느 날 박대동은 왕청현 하마탕에 가서 독학나무 뿌리를 캐여왔다. 그리곤 독학나무 뿌리에 검정기장을 넣어 술에 고아놓았다. 이 술은 독하여 한잔 정도 마셔야 하는데 리신옥은 시아버지 성의가 고맙다며 1944년 음력 4월 20일 저녁에 련속 몇잔을 마시였다.

헌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리신옥의 피부가 대면적으로 검은 색으로 변해가더니 이튿날 새벽 2시경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가족들과 급보를 받고 달려온 친척들은 리신옥을 밤새 지켰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는 자기의 소홀로 며느리가 제명을 다 하지 못하였다며 락루했다. 때는 리신옥이 만 29살을 잡은 1944년 음력 4월 21일 이른새벽이였고 막내딸 박월순은 두돌이 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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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의 준동으로 얼룩진 험악한 세상, 리신옥의 시집은 물론 리신옥의 친정집도 그 험악함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행패를 일삼는 적들을 피해 리신옥의 친정집은 선후 9차례나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친정어머니는 리신옥의 막내딸 박월순(지금 할빈에서 생활)을 업고다니며 2년간 키워주다가 무서운 전염병ㅡ장질부사로 하여 해방을 며칠 앞둔 1945년 8월 10일에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리신옥은 사망 후 석인구 세전동에 묻히였다. 어린 두 딸은 아버지 박창렬씨와 같이 생활하다가 박정숙은 11살에 해방을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재혼한 뒤 막내딸을 데리고 그대로 세전동에서 생활했고 박정숙은 1949년에 둘째 큰아버지 박창석씨가 생활하는 연길로 와서  연길시중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정숙은 몸이 허약해서 연길시중앙소학교에 다니다가 한해 정도 휴학하여야만 하였다. 1954년에 끌끌한 젊은이 리덕수를 만나 결혼했고 남편 리덕수는 결혼 이듬해 1955년에 할빈병기공장으로 출근하게 되였다. 박정숙도 가족으로 할빈병기공장에 출근했으며 병기공장 3.8홍기수, 할빈시 로력모범 영예를 줄줄이 따냈다.

1961년에 박정숙은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업처로 전근한 남편 리덕수를 따라 다시 연길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9년에 돈화로 하방하였다가 1974년에 연길로 돌아오니 남편은 연길방직공장 주비처를 거쳐 자료과 과장을 지내다가 1983년에 정년퇴직했다.

박정숙은 남편과의 사이에 딸 둘에 아들 둘을 두었으니 맏딸 리옥자(1954년생)는 연길시국토자원국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고 둘째 딸 리순자(1958년생)는 연길시문화관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퇴직하였으니 이 둘째 딸이 바로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김광현씨의 안해이다.

김광현씨는 때때로 안해를 통해 장모님의 연길감옥이요 하는 말들을 듣다가 2019년 1월 27일, 연길ㅡ훈춘행에서 이 일을 필자와 터놓게 되고 그날 저녁으로 장모 박정숙이 당년 연길감옥 8명 녀자정치범중의 한사람인 리신옥의 딸임을 확인하게 되였다.

2019년 1월 29일 오전, 연길시에서 박정숙씨 제1차 인터뷰가 시작되고 모자라는 부분은 박정숙씨 둘째 사위인 김광현씨를 통해 계속 보충받기로 하였다.

1월 29일 비행기편으로 귀가하는 필자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다. 연변행의 두번째 걸음에서 연길감옥가 작사가 리진과 그의 녀동생 리신옥의 유가족을 찾게 된 상상밖의 성과를 거두게 되였으니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 우리 항일사연구를 시작하던 그 초심의 나날로 돌아간 기분이였다. 연길감옥 항일투쟁연구는 새 성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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