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땅의 녀성혁명가 류성희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34

2019-04-15 08: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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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1926년 그 시절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는 조선인 양림, 리추악 부부와 더불어 박영, 류성희 부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양림 부부는 물론 박영 부부도 황포군관학교내에 이름이 뜨르르한 혁명가로 소문이 높았지만 박영의 안해 류성희는 남편의 그늘에 가리워 후세에 거의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름난 녀성혁명가이고 황포군관학교 활동가인 류성희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함은 우리 이 세대가 미룰 수 없는 사명감이라고 보아진다.

류성희를 알자면 그의 남편 박영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

1919년으로부터 1921년에 이르는 이 몇해 사이에 이른바 련합국군의 무력간섭으로 씨비리에서 활동하는 조선인혁명가들은 씨비리의 유격대, 홍군들과 배합하여 로씨야 백위군, 일본침략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로씨야 볼쉐위크당 당원인 조선인 박영이 1922년에 조선인 홍군부대를 지휘하여 울라지보스또크 7차례 쟁탈전에 뛰여들었다는 력사적 사실이 바로 그러하다.

알려지는 자료에 따르면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씨비리 그 시절, 울라지보스또크에서 가까운 한 지방에는 조선인 홍군부대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류성희라는 한 조선인처녀가 있었다. 류성희는 또 그 시절 씨비리 지방위원회의 열성적인 활동가이기도 하였다. 김산 구술, 님 웨일즈 저술 《아리랑의 노래》는 류성희를 두고 ‘류다른 가정출신’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녀자의 아버지는 북조선의 유명한 영웅인물로서 일명 ‘복면비적’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 빈민아동학교를 지탱해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부자집의 재물을 선후로 30차에 걸쳐 강탈하였다. 끝내 체포당하였으나 오직 씨비리에 가서 죽겠다는 일념으로 탈옥하여 씨비리에서 기구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여기 영웅인물의 딸이 류성희로 알려진다. 류성희의 고향이 어디며, 나이가 얼마며를 알리는 자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런 녀자가 아버지를 따라, 가족을 따라 울라지보스또크 부근 조선인 마을에서 생활하며 처녀로 자라났으니 자기 지방의 쏘베트위원회 한 구성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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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겨울의 어느 날 류성희는 지구 쏘베트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장소로 가자면 얼어붙은 한 강판을 지나야 하는데 류성희는 그만 조심하지 않아 얼음판에 미끄러 넘어지게 되였다. 이때 그의 뒤에서 얼음판을 지나던 한 남자가 선뜻 다가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지구 쏘베트회의에 참가하러 가던 쏘베트위원 박영이였다. 류성희는 대뜸 수집어하면서 “아이 참 미안해요!”라고 한마디 건넸다. 그 말이 사나이의 가슴에 사랑의 격랑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박영은 그날 쏘베트회의에 참가하였지만 마음은 하염없이 얼음판에 넘어졌던 처녀에게로 달린다. 어찌된 일인지 회의 내내 처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하염없이 보고 또 보았다. 그러면서 뭔가 결심을 내렸다.

그날 회의가 끝나고 또 그 얼음강판을 건너 돌아갈 때 박영은 일부러 그 처녀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무뚝뚝한 어조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가고 물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박영다운 구애의 표시였다. 하나 처녀로 말하면 너무도 뜻밖의 일이여서 순간이나마 놀라기도 하였으나 이내 고개를 다소곳하니 숙이더니 시원스레 대답하였다.

“네.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영이 못지 않은 류성희다운 녀성혁명가의 대답이다. 지구 쏘베트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홍군대오에서 활동하면서 류성희는 일대 위인 박영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 얼음판에서 넘어진 것은 류성희 처녀의 자작극이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30대 남자의 구애표시에 주저없이 대답을 할 때는 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틀 후 얼음판에서의 로맨스는 결혼으로 승화하였으니 박영과 류성희는 서로 헌신적으로 살뜰히 아끼며 사랑하는 혁명가 부부로 되였다. 박영은 그 후 몇해가 흐른 뒤 광주에서 이 로맨스를 김산에게 터놓았다. 박영이 류성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리는 대목이다.

1922년 10월에 백파군이 극동지역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일제침략군이 전부 물러간 후 박씨네 형제들은 극동(원동)쏘베트정부로부터 전투공훈상으로 토지를  분배받기도 했다. 남편인 박영이 로씨야 극동민족쏘베트위원회 위원, 주석으로 활동했지만 류성희의 마음은 100% 개운하지가 못했다. 해방된 강산에 시댁의 어르신들을 모시였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러한 소원은 그대로 중국의 남녘땅 황포군관학교 시절 가까운 동지들을 통해 알려졌다.

1922년 10월 이후 쏘베트사회주의련맹(즉 쏘련)이 정식으로 탄생한 후 류성희는 남편과 함께 쏘베트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힘다하면서 씨비리 조선인사회를 안정으로 이끌어갔다. 그렇게 여러해가 흐른 1926년 가을 남편 박영이 전우인 광주 국민혁명군 포병대 대장 리용의 편지를 받았다. 중국 남녘땅에서 혁명의 봉화를 보게 된 박영은 안해에게 속셈을 터놓았다. 류성희는 남편의 결심을 한마음으로 지지하여 나섰다. 이렇게 되여 박영은 두 동생인 박근만, 박근수와 안해 류성희와 함께 지체없이 광주로 달려갔고 황포군관학교 교도퇀에 편입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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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군관학교 시절 류성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박영 혁명가의 안해로서 내조를 잘하여 남편과 두 시동생이 가족의 뜨거운 사랑에 받들려 시름 놓고 군사와 정치를 배우도록 가족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와 더불어 혁명가의 안해 신분만이 아닌 녀성혁명가의 신분으로 황포군관학교 교도퇀과 조선인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기여를 다하였다.

1926년 5월과 7월에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이 북벌군의 선견대로 호남에 진출하고 국민혁명군 8개 군의 10만명 부대가 서로, 중로, 동로 세갈래로 나뉘여 정식으로 북벌을 개시한 후 중국혁명의 중심은 점차 광주의 주강류역으로부터 무한의 장강류역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류성희와 남편 박영은 물론 두 시동생도 모두 중공당조직의 지시로 활동지역을 광주로부터 무한으로 움직이면서 황포군관학교 분교로 불리우는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 훈련부에 편입되였다.

1927년 5월,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의 학생들은 중앙독립사로 편성되였다. 이달에 반동군벌 하두연, 양삼이 반혁명무장을 동원하여 국민정부가 자리잡은 무한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혁명과 반혁명과의 생사박투에서 조선인 학생들은 용감성과 헌신성을 떨치였다. 이 생사박투의 싸움터에 박씨네 삼형제도 뛰여들었다. 그들의 뒤에는 안해이고 형수인 녀성혁명가 류성희가 서있었다. 토지당전투, 악서전투의 세례를 거쳐 시동생들인 박근만과 박근수가 이해 6월 5일에 영예롭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니 류성희는 그리도 기쁠 수가 없었다.

1927년 4월 12일,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개석이 상해에서 혁명을 공개적으로 배반하고 7월 15일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도 무한에서 혁명을 배반하자 중국의 절반땅을 휩쓸던 북벌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류성희 등 박씨가문의 네 사람은 다시 당조직의 지시를 받고 장발규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의 제4군 군관교도퇀에 들어갔다. 군관교도퇀 퇀장은 공산당원 엽검영이고 이 교도퇀이 남하하여 10월초에 광주 사표영(四标营,오늘의 韶关市浈江区峰前街韶州师范学校内)에 진주하였고 남편 박영이 교도퇀 교도대 대장을 맡아나섰다. 류성희도 교도퇀의 한 녀전사였다.

1927년 12월 11일 새벽 2시 반에 제4군 군관교도퇀 주둔지 사표영에서 광주봉기 선서대회(誓师大会)가 열리였다. 조선인 오성륜과 양달부, 김산 셋이 선서대회가 열린 교도퇀사령부로 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만났다. 이때의 흥분과 감격을 김산은 《아리랑의 노래》에서 토로하고 있다.


우리 세 사람은 곧 박씨 삼형제를 비롯한 67명의 조선동지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우리를 얼싸안으며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나는 흥분과 감격에 목이 메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이 력사적인 순간에 대해  나의 감개는 그토록 무량한 것이였다.


김산의 이 감격적인 회고는 그날 교도퇀사령부에서 가진 선서대회에 오성륜과 양달부, 김산 그리고 박씨네 삼형제 등 70여명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류성희는 씨비리에서 온 녀성혁명가이지만 탄알이 빛발치는 광주봉기 싸움터에는 나서지 않았음도 알리고 있다. 류성희는 황차 임신한 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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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대회가 시작되자 광주봉기 지도자들인 장태뢰와 운대영, 엽정이 선후하여 연설을 하였다. 장태뢰는 봉기 동원보고를 하면서 교도퇀의 각급 지휘관들의 임명사항을 선포하였고 엽정이 전투포치를 하였다. 임명사항 선포 결과 엽용이 교도퇀의 신임 퇀장으로 임명되고 조선인 공산당원 리용이 엽용의 군사정치고문, 즉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리용은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사람으로서 류성희의 남편 박영과는 씨비리 조선인 홍군시절의 전우였다.

선서대회에서는 교도퇀을 선두로 하는 봉기참가부대를 ‘로농홍군’이라고 부르면서 로농홍군의 기치를 내들었다. 선서대회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가들은 모두 광주봉기의 책임적인 부서에서 중임을 맡아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류성희는 비록 녀성의 몸으로 선서대회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남편과 시동생들을 배웅하여 나선 류성희의 마음도 같이 높뛰였으리라.

1927년 12월 11일 새벽 3시 반에 위대한 광주봉기가 폭발하였다. 봉기가 시작되자 오성륜과 박씨네 삼형제는 장발규와 그의 참모들을 체포할 과업을 지니고 같은 파견대와 함께 트럭에 올랐다. 그들은 장발규의 사령부를 기습하였으나 혼비백산한 장발규는 이미 줄행랑을 놓은 뒤였다.

광주봉기는 파죽지세로 진척되고 광주로농민주정부—광주쏘베트정부가 설립되여 12월 12일 점심에 1만여명의 혁명군중들이 시안의 서과원광장에 모여 광주쏘베트정부 옹호 대회까지 가지였으나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의 반격하에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교도퇀 제2영 5련은 전부가 조선동지들이였다. 로농홍군의 철거 후위과업을 맡은 그들은 사하전투에서 조선인 전사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였다. 주강을 건너갔던 박영 등 100여명 돌격대는 벌써 여러 날을 굶은 데다가 탄알마저 떨어졌는데 위급한 관두의 광주봉기 총지휘부는 그들을 잊고 철퇴명령을 내리지 못하였다. 결과는 비참하여 조선인 전사 50~60명이 또 관음산전투에서 돌격대 전우들과 함께 피못에 쓰러졌다.

선후하여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광주봉기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류성희의 두 시동생은 이들 교도퇀 제2영 5련과 돌격대에 소속되지 않아 희생을 면하였지만 200여명 희생자들 속에는 남편 박영이 들어있었다. 비보를 접한 류성희의 마음은 어떠했을가, 류성희가 그때 광주 어느 곳에 거처하였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으나 김산의 《아리랑의 노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 그(박영이를 가리킴)의 처는 잉태중이여서 그는 맏아들을 보게 되였다고 못내 기뻐하고 있었다. 광주봉기 당시 그는 령남에서 그 용감무쌍한 ‘불운의 대대’를 지휘하여 고군작전하다가 영용히 희생되였다. 그의 충실한 안해는 이 비보를 접하고 슬픔에 잠겨있다가 아직 세상에  태여나지도 않은 애기를 배속에 품고 씨비리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황포군관학교 활동가이고 녀성혁명가이며 교도퇀의 녀전사이고 박영의 안해인 류성희를 알리는 귀중한 한단락이다. 임신한 몸으로 홀로 씨비리로 돌아갔다는 소식이다. 우리는 녀성혁명가 류성희에 대하여 그 이상 더 모르고 있다. 만약 씨비리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사실이라면 그 후 10년 뒤인 1937년에 류성희는 그 시절 쏘련내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지 않았으면 1937년 조선인들에 대한 쏘련의 강제이주정책을 피해 흑룡강 쪽으로 넘어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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