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혈전,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35

2019-04-19 13: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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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연변 대지에는 군중적 5.30폭동이 맹렬히 일어났다. 그 시절 연변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 당원들로 말하면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하는 실천적 폭동이였다. 룡정방면의 폭동에서 주력으로 활약한 사람은 황기범(1906ㅡ1931)으로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연변내에서 조직한 5.30폭동지휘부의 한 성원이였다.

최문식, 김춘선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9의 황기범략전에 따르면 황기범은 1906년 평안남도 룡천군 룡송리 태생으로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 길림성 연길현 동성용촌에 이주했다. 그는 1928년에 이미 조선공산당 엠엘파의 주요활동가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탄생한 맑스- 레닌주의 정당으로 그 이듬해 1926년 5월에 흑룡강성의 주하현 일면파에서 산하 만주총국을 설립했다. 신생한 만주총국 총부는 녕고탑에 설치되고 총국 산하에 또 동만과 북만, 남만 3개 구역국을 두기로 하였다. 동만구역국의 창립은 1926년 10월로 알려진다. 이에 따른 흥미로움은 그 시절 연길현 동성용촌에 이주했던 어린 황기범이 20살의 젊은이로 자라나 조공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 엠엘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당년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는 조선인반일무장투쟁을 지도하는 전문군사부가 설치되였다. 엠엘계 만주총국 군사부장- 이름난 혁명가 박윤서는1928년 겨울에 룡정에서 황기범 등 7명으로 구성된 반일무장단체— ‘철혈단’을 묶고 자금을 준비하여 반일유격대를 내오며 특무, 주구를 숙청하며 무장투쟁을 진행하는 것을 주요과업으로 내세웠다. 연구자료로 알려지는 황기범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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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봄에 황기범 등 철혈단의 7명 동지들은 만주총국 군사부의 지시를 받고 북만의 녕안에 가서 강습반을 꾸리면서 수백명 남녀투사를 양성해냈다. 한편 동만과 북만 각지로 다니며 반동분자를 소탕하고 10만 여원에 달하는 고리대문서를 빼앗아 소각해버리고 부호의 곡물 300여석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0년 1월에 룡정에서는 그 전해의 12월에 이어 조선의 광주학생운동을 지지성원하는 반일학생시위투쟁이 맹렬히 일어났다. 황기범 등 철혈단의 동지들은 조직의 지시를 받들고 대성, 동흥, 은진, 명신 등 6개 중학교의 학생들을 선동하여 이 투쟁에 참가시켰다. 철혈단의 동지들은 모두가 호신용 권총을 갖고있었다.

그 나날 황기범은 강학제와 함께 군사자금 준비와 무장구입으로 동분서주하였다. 하루는 둘이서 천도경편 렬차안에서 일제놈 몇을 습격하고 질주하는 차창밖에 몸을 훌쩍 날리였다. 북만땅 녕안에서 한 동지가 놈들의 추격을 당하였을 때에는 혼자 길목을 지키는 강학제를 도와 원쑤를 쓰러눕히고 동지를 구하는데 힘을 보태였다.

1928년에 화룡현 개산툰(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에도 박윤서가 지도하는 반일무장단체-철혈단권총대가 조직되였다. 철혈단권총대의 주요성원도 강학제와 황기범이였다. 그들은 개산툰일대에서 일제주구들인 팔도하자 민회의사 김춘영과 공립11교교원 엄정을 처단하고 동성용지주의 보총 세자루를 탈취하였다. 적대투쟁의수요로개산툰 철혈단권총대는 개산툰에 관흥상점을 꾸리고 비밀활동거점으로 리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1929년의 일이였다.

1930년 2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의 지시에 의해 강학제, 황기범을 선두로하는 철혈단과 개산툰권총대가 해체되고 그 주요성원들이 가짜가정을 무어 북만의 녕안으로 전이하게 되였다. 그 다음으로 되는 무장활동이 전문 유격대활동으로 알려진다.  1930년 4월에 황기범은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은 특파원 박윤서의 소개로 강학제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비밀리에 녕안현 화검구(오늘의 강동향 해방촌)에 가서 새로운 투쟁에 뛰여들었다.

1930년 4월, 중공만주성위와 동만특별지부에서는 상해 5.30참안 5주년을 기념하면서 군중적폭동을 발기하였다. 본문 서두에서 이미 스치고 지난 것처럼 그번 폭동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넘기 위한 실천적 폭동이였다. 황기범은 강학제 등과 더불어 폭동에 필요한 무장과 작탄구입으로 분주하였다. 5월 하순에는 녕안의 동지들과 헤여져 동만행에 나섰다. 그때 동만행차를 앞두고 녀성혁명가인 강학제의 안해는 이미 임신한 무거운 몸이였고, 황기범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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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5월말에 오늘의 룡정시 광신향 하승리에서 김근을 총책임자로 하고 김철을 총지휘로 하는 동만 5.30폭동지휘부가 조직되였다. 실상 이 폭동지휘부는 중공동만특별지부의 협조하에서 조직되였지만 그 구성원 모두가 원 조공당 엠엘계통동지들이였다. 폭동지휘부에서는 룡정, 투도구, 천도철도연선을 중심으로 군중적 5.30폭동을 단행하기로 결의하였다. 황기범은 강학제와 같이 폭동지휘부의 주요지도자의 한사람으로서 무장대를 지휘하여 룡정방면의 폭동과 적들의 주요 요소에 대한 습격을 맡아나섰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5월 30일이 돌아왔다. 이날 밤, 자정이 지나자 싸창과 권총을 지닌 강학제와 황기범은 몇몇 유격대원과 더불어 일제놈들의 룡정동척회사판사처 사무실에 숨어 들었다. 뒤이어 2개의 작탄을 던지였다. 그중 하나가 폭발하였고 파괴력이 컸다. 이어 그들은 폭동대원들을 이끌고 룡정 거리마다에 삐라를 뿌렸다. 해란강을 가로 지른 룡정 서쪽 천도경편철도에도 불을 질렀다.

이날 그들은 여러 폭동소조 동지들과 함께 또 일제측 룡정발전소 배전판의 설비들을 짓부셔 룡정을 까막나라로 만들었다. 룡정의 몇몇 일제주구의 집에도 불을 지르고 룡정 동쪽에서 조선으로 통한 전선대를 끊어버리고 전화선을 절단해버리기도 하였다.

해란강을 계선으로 수남, 수북 2개 폭동대로 나뉘여진 투도구일대의 폭동도 순조로이 번져갔다. 연변 각지의 폭동은 모두 성공으로 막을 내리였다. 6월초의 어느날 5.30폭동지휘부에서는 다과회를 열고 피로를 풀었는데 그 장소가 어디인가는 알려지지 않는다. 폭동가운데서 강학제, 황기범 등이 이끄는 각지유격대와 적위대, 무장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일으켰으니 시흥이 도도해난 강학제는 다과회에서 즉흥노래를 지어 불렀다.

황기범 등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강학제는 즉흥노래에서 자기들 무장대를 중국로농홍군을 본받아 ‘붉은 군대’ 즉 홍군이라고 찍어 노래함을 잊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조직이 지도한 1930년 무장대ㅡ유격대를 흔히 홍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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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6월 10일 5.30폭동지휘부에서는 륙도하기슭의 하승리 서산언덕에 설치된 비밀아지트ㅡ ‘고동소리’신문사에서 강학제, 김철, 최형익, 황기범 등 동지들이 참가한 회의를 가지였다. 5월투쟁과 5.30폭동 차후투쟁에 관한 중요제의안 토론이였다. 하승리 서산언덕의 비밀아지트는 폭동지휘부에서 5.30폭동을 앞두고 세집으로 맡은 것이였다.

조직의 지시에 의해 주덕해의 숙부인 오원세가 이 비밀아지트를 마련하고 투도구방면의 폭동지휘의 한사람인 최형익과 차정숙(친척사이)을 가짜부부로 살림살이를 하게 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게 하였다. 5.30폭동지휘부가 수립되고 5.30폭동이 계획되고 지도된것도 바로 이 비밀아지트였다.

6월 10일 회의는 이튿날 새벽녘까지 계속되였다. 홀제 회의장소는 불의지변을 당했다. 간도일본총련사관의 순경 수십명이 와르르 덮쳐들었다. 비밀아지트의 식모가 밀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추측일 뿐 아직 확인되지 않고있다. 어쨋든 적들은 밤도와 포위진을 쳤고 날이 밝자 진공을 개시하였다. 이때의 회의참가 동지들에게는 동척에 던졌던 작탄도, 천도철도를 불지르던 때의 싸창도 어딘가에 파묻고 없었다. 유일한 무기는 강학제 수중의 호신용 단총뿐이였다.

분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김철이 단총을 들고 나설때 강학제는 그의 손에서 단총을 앗아 내면서 어서 포위를 헤쳐나가라고 등을 밀었다. 그리고는 “혁명자의 경우가 본래 이러하오. 우리는 혁명을 위하여 죽을뿐이요!”하고 소리치면서 단총을 들고 동지들의 포위돌파를 엄호하였다. 그가 홀몸으로 막아서며 걸싸게 답새기는 통에 놈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한채 맹렬히 총질을 해댔다. 총이 없는 황기범 등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강학제는 홀몸으로 두시간 남짓이 견디여 냈다. 김철이 적들의 주의력을 끌고저 선참 뒤문을 열고 산쪽으로 올리달렸다. 과연 적들의 사격은 김철에게로 집중되였다. 황기범은 이틈을 타서 뒤문을 박차고 나가 아래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럴 때 김철이 갑자기 푹 꼬꾸라졌다. 그는 왼쪽 어깨와 오른 무릎(무릎에 각각 두방 맞음) 등 세곳에 총상을 입었다. 최영익은 미처 빠지지 못하고 기여서 부엌에 숨었다.

강학제도 복부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지하족 한쪽이 벗겨져 나간줄도 몰랐다. 나중에 그는 놈들에게 더럽게 죽지 않으려고, 량심과 지조에 그늘이 지지 않게 하려고 최후의 일탄을 남겨서 자결로 24살의 순결한 삶을 마감지었다.

강학제의 총소리가 멎자 2명의 중상자를 낸 적측에서 집안에 들이닥쳤다. 부엌에 숨었던 최영익과 몸에 중상을 입은 김철이 산기슭에서 체포되였다. 적들은 기고 만장해서 마차에 김철, 최영익과 강학제의 시체를 싣고 룡정으로 내려갔다.

김철은 룡정의 총령사관 지하실에 갇히였다. 적들은 그에게서 무슨 단서라도 얻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였지만 끝끝내 그의 입을 열지 못하였다. 김철은 상처의 모진 아픔을 참으면서 일주일간 단식투쟁을 견지하다가 일제를 단죄하는 혈서를 쓰고 29살을 일기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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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6.10혈전의 진실한 내막이다.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연변항일무장투쟁사상 처음으로 일제놈들과 피어린 싸움을 벌린 장거라고 할 수 있다. 동지들의 가슴을 갈피갈피 저미는 6.10혈전 관련 절통한 이 소식이 북만에 전해졌다. 황기범 등 200여명의 동지들은 녕안 모 지점에 집결하여 추도식을 가지였다. 동만 당조직에서는 추도삐라를 민중에게 널리 살포하였다.

《조선일보》 등 서울 여러 신문에서 강학제의 비장한 최후를 실었으며 《간도신보》는 이튿날 소식을 보도하였다. 특히 《간도일보》는 호외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황기범 등 학제의 동지들은 1930년 안으로 렬사의 략전, 시와 동지들의 회억문, 일화, 가송 등을 한데 묶어서 《상야의 붉은 피》라는 소책자를 묶었다.

지난 80년대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필자는 강학제 렬사의 조카를 통하여 필기본으로 된 이 《상야의 붉은 피》를 접하게 되고 강학제와 황기범의 빛나는 혁명활동 내막을 알게 되였다. 《상야의 붉은 피》는 여기까지이고 관련 애도식 외 황기범이 6.10혈전에서 탈출한 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내내 모르고있었다.

지난 2017년 8월 초 연길에서 친구를 통하여 연변인민출판사 출판(2016년 12월 출판)으로 된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9에서 황기범략전 부분을 보고서야 최후 관련 약간한 소식을 알게 되였다. 황기범략전에 의하면 1930년 9월, 황기범은 연길현로농반일적위대에 참가하여 당지부 선전위원 책임을 맡았고 그해 10월 당조직의 파견으로 흑룡강성 녕안일대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10월에 있은 적들과의 한차례 반격전에서 불행히 적탄에 맞아 희생되였다고 서술되여 있다.

2016년과 2017년, 2018년 3년간의 연변행에서 필자는 번마다 1930년 5.30폭동의 중심지 룡정과 그 주변을 찾았다. 지난해 2018년 7월 1일에는 1930년 6월 10일 5.30폭동지휘부가 설치된 륙도하기슭의 하승리 서산언덕 등지를 현지답사하면서 깊은 감개에 젖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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