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동 정씨가문의 항일렬사들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36

2019-04-28 08: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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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던 그제날 화룡현 약수동은 100세대도 안되는 마을에 60여명의 항일렬사를 낳은 유서깊은 고장이다. 그중에는 아들딸과 며느리 여섯을 항일에 내세우고 뒤바라지를 하다가 장렬히 희생된 정태준(郑泰俊, 1872ㅡ1932)로인이 들어있다. 아래 정태준로인부터 이들 약수동 정씨가문의 항일렬사 6명을 한분한분 소개하고저 한다.

정태준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상운북면에서 태여났다. 그는 15살 되던 해에 장가들어 딸 보옥이를 보았는데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헌데 왜세의 침투로 장장 490여 년이나 내려오던 리씨조선은 국운이 쇠잔해지며 나라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농사마저 비틀려 나라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였다. 18세기 90년대에 이르러 살길을 찾아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정태준도 이주민 속에 끼이였다.

1890년경에 정태준은 아버지, 어머니와 안해 그리고 3살배기 딸 넷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오늘의 룡정시 조양천진 덕신촌에 괴나리보짐을 풀어놓았다. 그때 지금의 덕신골안을 큰물레거우라고 불렀다. 큰어미사슴골이란 뜻인데 한자 대모록구(大母鹿沟)가 조선이주민들 입으로 번져져 물레거우로 굳어져버렸다. 정태준은 이 마을의 중국인지주의 밭을 소작 맡고 억척스레 일해나갔다.

딸애 보옥이가 6살 나던 해, 그러니 이주하여 3년만에 애엄마는 병으로 저 세상사람이 되여버렸다. 이듬해 후처를 맞아들였지만 땅없는 소작살이가 신물이 났다. 그래서 정태준은 1898년경에 일가식솔을 휘동하여 연길현 수신향 약수동으로 옮겨앉았다.

그때만해도 약수동은 나무가 우거진 한적한 고장이였다. 정태준은 아버지와 함께 그 자리에서 나무를 찍어 초가삼간 지어놓고 살림살이를 시작하였다. 뒤미처 입적하고 자작농이 되닌 셈평은 날로 펴이여갔다. 그후 한세대, 두세대 조선이주민들이 밀려들더니 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촌, 중촌, 하촌을 가진 수십세대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정태준일가는 중촌에 자리 잡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물레거우집’으로 불렀다.

어느덧 생활은 윤택이 돌기 시작했으나 망국노의 설음은 어딜가나 매일반이였다. 워낙 성정이 강의한 정태준은 현상태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마침 삼천리강산을 들었다놓은 1919년 3.1운동은 두만강너머 연변땅도 부글부글 끓어번지게 하였다. 정태준은 마을사람들을 불러일으켜 투도구로 내려가 수천명 반일대시위에 뛰여들었다.

정태준은 이제야 살길이 열린다고 기쁨을 금치못하였다. 허나 조선독립이 래일, 모레 같더니 며칠이 지나지 않아 거족적인 반일운동은 갈앉고말았다. 이때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 등이 흥기하자 정태준은 주저없이 광복단에 참가하여 반일의 기치를 들었다. 광복단의 물결이 지나니 정태준은 또 주저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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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구러 세월은 흘러 정태준은 50고개를 넘어섰다. 그는 선후로 자식 7남매를 보았는데 우로 내리 셋은 줄줄이 딸이였다. 전처의 소생인 맏딸 보옥이는 세린하 심씨댁의 며느리로 되고 둘째는 장인강에 시집갔다. 셋째 감장녀도 남의 집 문턱을 넘어섰다.

1925년에 항렬로는 넷째이고 맏아들인 정룡이 제 또래들인 박세진(렬사), 박상활(렬사) 등과 함께 이도구사관학교에 가서 정치와 군사를 배우고 돌아오더니 마을에는 사립약수학교가 일어서고 혁명의 기운이 뻗치기 시작하였다. 레닌선생이요, 10월혁명이요, 사회주의 쏘련이요 하는 말들이 가끔 들리였다. 정태준은 다시금 기를 펴게 되였다.

1925년이후 약수동에 조선공산당 동만도 엠엘계통의 줄이 뻗쳐오더니 맏아들을 선두로 농민협회, 부녀회, 소선대, 아동단 등 군중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다. 정태준은 선참으로 농민협회에 가입하고 마을에 설치된 지하교통소 책임을 맡아보았다. 그와 맏아들 정룡의 영향하에서 정룡의 아래인 딸 정보배와 정경옥, 막내 정창근 등 자식들이 모두 선후로 혁명의 길에 올랐다. 후에는 며느리로 들어선 김옥주와 복정순도 혁명의 일익을 맡아나섰다. 정태준의 일가는 명실공히 약수동의 첫째가는 혁명가정으로 발돋움하였다.

1930년 봄이후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제 원칙이 철저히 시달되면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섰다. 1930년 5.30폭동의 세례를 거쳐 정태준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그의 집은 의연히 중공당조직의 지하교통소로 은밀히 쓰이였다. 오고가는 혁명동지들은 모두 지하교통소를 거치였는데 많을 때는 10여 명에 달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며느리들을 내세워 주숙과 식사를 빈틈없이 막아나섰다. 그가 약수동의 호주인 (户主人,조선이주민들이 입적한후의 마을가장) 노릇을 하니 투도구령사분관 경찰서놈들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였다.

이듬해 봄에 집에는 쌀이 거덜이 났다. 정말이지 당분간은 아무런 방도도 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들딸 같은 자기 사람들을 굶길 수는 없었다.

“옳지, 이것이 방법이로다.”

못내 고민하던 정태준은 무릎을 쳤다.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한창 밭갈이하는 집의 암소를 끌고 10여 리 떨어진 이도구 장터에 가서 팔아 식량을 마련하였다. 정태준은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

그 나날에 정태준의 아들딸과 며느리 모두가 혁명에 투신한데서 집에는 그들 량주와 어린 것들밖에 없었다. 둘째며느리 복정순이 집에 남았으나 맡은바 혁명사업으로 농사일을 돌볼 수가 없었다. 한데서 집식구들이 먹을 쌀도 실상은 딸리는 형편이였다. 후에야 동지들은 정태준 로인이 밭갈이암소를 팔았다는 것을 알고 송구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정태준의 말 또한 감동적이였다.

“자네들은 내 아들딸과 같네. 아들딸을 받드는 것이 부모된 도리가 아닌가!”

정태준 로인이 이토록 동지들을 친자식처럼 대해주니 외지혁명자들도 그의 집에 오면 어려운 줄도, 구속스러움도 몰랐다. 동지들은 번마다 새 힘을 안고 항일의 싸움터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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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동은 그야말로 30년대 초기 동만혁명의 대본영이였다. 1930년 5월 27일에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ㅡ약수동쏘베트도 이곳에서 탄생하였고 1930년 8월 13일에 동만혁명의 수뇌부ㅡ중공연화중심현위도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연화중심현위가 지도하는 동만 4개 현의 산하 9개 구위도 이곳 지하교통소를 통하여 현위와 련계하고 새과업을 받아안았다. 동지들은 이곳에서 투쟁과업을 안고 동만 각지로 달려갔으며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북부일대로 뻗어갔다. 그만큼 약수동과 그의 지하교통소가 일으키는 역할이 막대하였다. 이 가운데서 정태준과 그의 일가는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정태준의 맏며느리 김옥주는 연화중심현위시기 현위통신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 중공동만특위가 탄생한 후에는 특위기관을 따라 국자가, 조양천 무산촌에 가서 특위통신원으로 뛰였다. 옥주의 남편 정룡이는 안도를 거쳐 남만으로 파견되여 갔다. 넷째 딸 정보배는 달라자구에 가서 활동하고 다섯째 딸 정경옥과 막내아들 정창근은 적들에게 체포되여 연길감옥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풀려나온 후에도 투쟁을 견지하였다. 다만 막내며느리 복정순이 집에 남아 시아버지를 도와 후근사업에 몸을 잠글 뿐이였다. 이들 모두가 중국공산당 당원들이였다.

1930년 가을 이후 일제놈들의 거듭되는 ‘검거’로 하여 당조직과 혁명단체들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정태준은 더욱 열심히 뛰며 파괴된 지방의 남아있는 동지들을 찾아 조직선을 이어주었다. 1932년 봄에 달라자에서 활동하던 화룡현위 기관이 약수동으로 옮겨왔다. 정태준의 활동범위는 넓은 지대에로 뻗쳐갔다.

이해 봄의 어느날, 현위에서는 개산툰구에 긴급통지를 띄우게 되였다. 시간이 급한데다가 임무 또한 중하여 현위에서는 통신담당자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때 정태준이 나섰다. 그는 자기가 길도 알고 나이도 많아 적들의 주시를 덜 받을 수 있다고 재삼 청구하였다. 현위에서는 정태준 로인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개산툰구로 가자면 적들이 욱실거리는 룡정을 거쳐야 했다. 한데서 로인이라 하여도 시름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정태준은 만일을 고려하여 룡정시가지 밖으로 에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 마침내 그는 개산툰 후동에 무사히 이르러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였다.

정태준은 약수동의 호주인과 지하교통소책임외에도 ‘우리 아바이’란 부름을 한몸에 받아안았다. 정태준의 사람됨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동지들의 친절한 부름이다.

그때 투도구에는 사립약수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던 중공당원 전병화가 꾸리는 상점이 있었다. 그는 당조직에서 파견한 사람으로서 조직에서 수요하는 물품들을 구입하여 두군 하였다. 그런데 놈들의 경계가 심하여 수송이 문제로 나섰다. 이때에도 정태준이 이 간거한 후근물자공급을 도맡았다.

1932년 가을에 평강구유격대가 약수동에서 재조직되였다. 군복 등이 급히 수요되였다. 약수동의 공청단원 허정숙이 세린하자위단 단장의 딸로 꾸미고 투도구에 가서 물품을 빼내오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당조직에서는 허정숙의 계책대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정태준이 달구지를 몰고 동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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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숙은 과연 투도구 어느 상점에 들어가 뜻대로 유격대에서 급히 수요되는 국방색천, 종이, 등사원지, 신발 등을 내오는데 성공하였다. 이번에는 정태준의 차례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한데다가 약수동의 호주인이여서 적들의 검사소를 무난히 넘기였다. 적들은 그를 자기들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으로만 알았었다. 그놈들이 알아차렸을 때는 정태준의 달구지가 이미 근거지에 들어선 뒤였다.

투도구령사분관 경찰서놈들은 저들의 끄나불을 통하여 약수동에 중요한 기관들이 활동하고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자들은 약수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다가 1932년 음력 10월 하순부터 11월초순 사이에 련속 세차례의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1932년 음력 10월 22일 (양력 11월 19일) 아침, 수십 명의 일제수비대와 경찰놈들이 이리떼마냥 약수동에 덮쳐들었다. 당현위와 우리 동지들이 급보를 받고 약수동을 빠져나간데서 적들은 헛물을 켰다. 이날 장인강에 가서 회의를 하고 돌아오던 약수동적위대 대장 황룡정이 대황구  령마루에서 일제토벌대와 맞띄워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정태준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런데 10여일이 지난 음력 11월 4일(양력 12월 1일) 이른새벽에 근 200여명이나 되는 일제수비대, 경찰, 자위단놈들이 또 갑자기 약수동을 3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놈들이 어둠을 타서 동북쪽의 세린하쪽으로 에돌아 기여든데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도끼지팡(진화촌)의 첫 보초선에서도 발견하지 못하였었다. 다행히 우리의 당, 단조직과 주요기관들이 이미 장인강, 어랑촌 근거지로 전이한 뒤여서 정태준은 다소 시름이 놓이였다. 하긴 약수동을 지켜선 적위대와 당지 골간들이 남아있어 정태준은 손에 땀을 쥐였다.

음력 11월 4일 이날은 정태준의 환갑날이였다. 집에서는 환갑준비로 서두르는데 적들은 이미 약수동을 포위하고 조여들고있었다. 약수동당지부에서 피신할 것을 전했을 때 정태준은 “나야 늙은 것이 뛰면 어디로 뛰겠소. 자네들이 빨리 피하게!”하고 말하고는 결연히 마을에 남았다. 정태준은 약수동 호주인의 명의로 또 한번 놈들과 숨박곡질을 해볼 심산이였다.

했으나 적들의 움직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주구놈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수색을 벌리는데 어느덧 박상활, 황룡정, 김동산, 전춘복 등 10여 집에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놈들의 소행이 너무나 잔인하므로 정태준은 마당에서 조짚을 가리는척하다가 집뒤의 변소옆 조짚가리에 숨었는데 그만 수색에 걸려들었다.

마을에서 보초를 섰거나 앓아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적위대 부대장 정태경, 적위대원 리덕길, 소선대중대장 김득봉, 만삭이 된 공산당원 김순희 등 7명 동지들도 붙잡혀 정태준네 뜨락에 끌리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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