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동 정씨가문의 항일렬사들

2019-05-10 15: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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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동은 그야말로 30년대 초기 동만혁명의 대본영이였다. 1930년 5월 27일에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ㅡ약수동쏘베트도 이곳에서 탄생하였고 1930년 8월 13일에 동만혁명의 수뇌부ㅡ중공연화중심현위도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연화중심현위가 지도하는 동만 4개 현의 산하 9개 구위도 이곳 지하교통소를 통하여 현위와 련계하고 새과업을 받아안았다. 동지들은 이곳에서 투쟁과업을 안고 동만 각지로 달려갔으며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북부일대로 뻗어갔다. 그만큼 약수동과 그의 지하교통소가 일으키는 역할이 막대하였다. 이 가운데서 정태준과 그의 일가는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정태준의 맏며느리 김옥주는 연화중심현위시기 현위통신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 중공동만특위가 탄생한 후에는 특위기관을 따라 국자가, 조양천 무산촌에 가서 특위통신원으로 뛰였다. 옥주의 남편 정룡이는 안도를 거쳐 남만으로 파견되여 갔다. 넷째 딸 정보배는 달라자구에 가서 활동하고 다섯째 딸 정경옥과 막내아들 정창근은 적들에게 체포되여 연길감옥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풀려나온 후에도 투쟁을 견지하였다. 다만 막내며느리 복정순이 집에 남아 시아버지를 도와 후근사업에 몸을 잠글 뿐이였다. 이들 모두가 중국공산당 당원들이였다.

1930년 가을 이후 일제놈들의 거듭되는 ‘검거’로 하여 당조직과 혁명단체들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정태준은 더욱 열심히 뛰며 파괴된 지방의 남아있는 동지들을 찾아 조직선을 이어주었다. 1932년 봄에 달라자에서 활동하던 화룡현위 기관이 약수동으로 옮겨왔다. 정태준의 활동범위는 넓은 지대에로 뻗쳐갔다.

이해 봄의 어느날, 현위에서는 개산툰구에 긴급통지를 띄우게 되였다. 시간이 급한데다가 임무 또한 중하여 현위에서는 통신담당자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때 정태준이 나섰다. 그는 자기가 길도 알고 나이도 많아 적들의 주시를 덜 받을 수 있다고 재삼 청구하였다. 현위에서는 정태준 로인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개산툰구로 가자면 적들이 욱실거리는 룡정을 거쳐야 했다. 한데서 로인이라 하여도 시름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정태준은 만일을 고려하여 룡정시가지 밖으로 에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 마침내 그는 개산툰 후동에 무사히 이르러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였다.

정태준은 약수동의 호주인과 지하교통소책임외에도 ‘우리 아바이’란 부름을 한몸에 받아안았다. 정태준의 사람됨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동지들의 친절한 부름이다.

그때 투도구에는 사립약수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던 중공당원 전병화가 꾸리는 상점이 있었다. 그는 당조직에서 파견한 사람으로서 조직에서 수요하는 물품들을 구입하여 두군 하였다. 그런데 놈들의 경계가 심하여 수송이 문제로 나섰다. 이때에도 정태준이 이 간거한 후근물자공급을 도맡았다.

1932년 가을에 평강구유격대가 약수동에서 재조직되였다. 군복 등이 급히 수요되였다. 약수동의 공청단원 허정숙이 세린하자위단 단장의 딸로 꾸미고 투도구에 가서 물품을 빼내오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당조직에서는 허정숙의 계책대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정태준이 달구지를 몰고 동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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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숙은 과연 투도구 어느 상점에 들어가 뜻대로 유격대에서 급히 수요되는 국방색천, 종이, 등사원지, 신발 등을 내오는데 성공하였다. 이번에는 정태준의 차례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한데다가 약수동의 호주인이여서 적들의 검사소를 무난히 넘기였다. 적들은 그를 자기들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으로만 알았었다. 그놈들이 알아차렸을 때는 정태준의 달구지가 이미 근거지에 들어선 뒤였다.

투도구령사분관 경찰서놈들은 저들의 끄나불을 통하여 약수동에 중요한 기관들이 활동하고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자들은 약수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다가 1932년 음력 10월 하순부터 11월초순 사이에 련속 세차례의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1932년 음력 10월 22일 (양력 11월 19일) 아침, 수십 명의 일제수비대와 경찰놈들이 이리떼마냥 약수동에 덮쳐들었다. 당현위와 우리 동지들이 급보를 받고 약수동을 빠져나간데서 적들은 헛물을 켰다. 이날 장인강에 가서 회의를 하고 돌아오던 약수동적위대 대장 황룡정이 대황구  령마루에서 일제토벌대와 맞띄워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정태준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런데 10여일이 지난 음력 11월 4일(양력 12월 1일) 이른새벽에 근 200여명이나 되는 일제수비대, 경찰, 자위단놈들이 또 갑자기 약수동을 3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놈들이 어둠을 타서 동북쪽의 세린하쪽으로 에돌아 기여든데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도끼지팡(진화촌)의 첫 보초선에서도 발견하지 못하였었다. 다행히 우리의 당, 단조직과 주요기관들이 이미 장인강, 어랑촌 근거지로 전이한 뒤여서 정태준은 다소 시름이 놓이였다. 하긴 약수동을 지켜선 적위대와 당지 골간들이 남아있어 정태준은 손에 땀을 쥐였다.

음력 11월 4일 이날은 정태준의 환갑날이였다. 집에서는 환갑준비로 서두르는데 적들은 이미 약수동을 포위하고 조여들고있었다. 약수동당지부에서 피신할 것을 전했을 때 정태준은 “나야 늙은 것이 뛰면 어디로 뛰겠소. 자네들이 빨리 피하게!”하고 말하고는 결연히 마을에 남았다. 정태준은 약수동 호주인의 명의로 또 한번 놈들과 숨박곡질을 해볼 심산이였다.

했으나 적들의 움직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주구놈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수색을 벌리는데 어느덧 박상활, 황룡정, 김동산, 전춘복 등 10여 집에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놈들의 소행이 너무나 잔인하므로 정태준은 마당에서 조짚을 가리는척하다가 집뒤의 변소옆 조짚가리에 숨었는데 그만 수색에 걸려들었다.

마을에서 보초를 섰거나 앓아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적위대 부대장 정태경, 적위대원 리덕길, 소선대중대장 김득봉, 만삭이 된 공산당원 김순희 등 7명 동지들도 붙잡혀 정태준네 뜨락에 끌리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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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같은 놈들은 김순희에게 비인간적인 고문을 들이댔으나 그의 혁명절개를 꺽을 수 없었다. 순희가 자기의 혀를 물어끊자 적들은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갖은 수단을 다하여 정태준을 낚으려고 들었지만 역시 성사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이 살인귀들은 조짚을 정태준의 집안에 넣고 정태준, 김순희 등 8명을 집안에 떠밀어넣었다. 뜨락에는 기관총을 걸어놓았고 끌려온 마을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최후의 순간에 정태준은 문앞에 바싹 다가서서 자기 몸으로 기관총을 막으며 놈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개같은 놈들아, 쏠테면 쏴라! 네놈들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놈들은 집안에 대고 기관총소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

집안에서는 비장한 구호소리가 련달아 울려나왔다. 적들은 한바탕 소사한 뒤 추녀밑에 불을 질렀다.

정태준은 환갑날에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환갑을 앞두고 마누라는 환갑준비에 서둘다가 령감의 제지를 당했다. 환갑날 마누라는 기장밥이라도 대접시키려 했지만 “산에 갔던 사람들을 배불리 대접해야지 나야 일있소?”하며 밀막아버리였다. 그러던 그의 환갑날이 제사날로 될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했으랴…

정태준 로인이 희생된 후 혁명투쟁에 나섰던 그의 아들딸과 두 며느리 중 막내 정창근을 제외하고는 다섯 모두가 선후로 희생되였다. 두 아들의 어린 자식들도 엄마따라 처창즈와 그 일대로 전이했다가 생사리별을 당했다. 일가로소 13명 중 겨우 3명 밖에 살아 남지 못하였다. 항일렬사만도 6명. 아래 정태준 로인에 이어 항일렬사이며 정씨가문의 녀인들인 정태준 로인의 두 딸과 두 며느리를 보기로 하자.

김옥주(金玉珠, 1906ㅡ1935)는 정태준 로인의 맏며느리인데 1906년생으로서 당년의 연길현 세린하사람이다. 1920년경에 그는 약수동의 정룡과 결혼하고 정로인의 맏며느리로 약수동에 자리잡았다.

그뒤 얼마 안되여 남편은 룡정 사립동흥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남편은 맑스주의를 접수하고 혁명의 장도에 오르게 되였는데 그의 영향을 받고 옥주는 계급적으로 각성하여갔다.

1925년에 남편은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약수동에 돌아와 동무들인 박상활, 박세진, 김세준 등과 함께 6년제 사립약수학교를 발판으로 군중들의 계급적각성에 목적을 둔 사회주의 사상계몽운동에 뛰여들었다. 옥주는 그들을 도와 야학을 꾸리며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와 맑스-레닌주의사상을 널리 선전하였다. 이어 약수동에 반일삐라가 흩날리고 조선공산당 동만도 엠엘계통의 반제동맹, 농민회, 청년회, 부녀회, 소년회 등 군중단체가 련이어 나타났다. 옥주는 부녀회책임을 맡고 남편과 더불어 약수동을 혁명의 요람으로 키워갔다.

김옥주는 그후의 1928년 사립약수학교와 사립협동학교 (해방 후 룡문소학교 전신) 5.1국제로동절기념 연합시위, 1929년 말의 조선 광주학생반일시위, 1930년 ‘붉은 5월’ 투쟁, 1930년의 추수폭동에서도 지도자의 하나로 활약하였다. 그때 그는 이미 중공당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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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주의 집은 당조직의 지하교통소였다. 중공동만특별지부로부터 1930년 8월 13일에 약수동에서 건립된 중공연화중심현위에 이르기까지 왕경 등 동지들은 흔히 이 지하교통소를 통하여 현위산하 개산툰, 로투구, 룡정, 삼도구, 평강, 연길, 옹성라즈, 하마탕, 라자구, 훈춘 등 구위와 련계를 가지였다. 옥주는 지하교통소의 비밀련락원으로 되여 당의 지시를 제때에 여러 구위들에 전하였다.

1930년 10월에 중공동만특위가 설립된 후 김옥주는 특위조직부장으로 부임한 원 현위서기 왕경을 따라 특위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특위서기 료여원은 국자가에 약방을 꾸리고 약방주인으로 나타났으며 성위에서 파견되여 온 특위군위서기 양림(조선족)과 왕경도 국자가에 세집을 맡고 활동하고 있었다. 특위선전부와 비서처는 연화현위 소재지인 조양천 무산촌에 자리 잡고있어 옥주는 국자가와 무산촌사이를 자주오고 갔다.

1930년 10월에 중공훈춘현위와 왕청현위가 설립되고 연화중심현위는 연화현위로 개칭되였다. 연화현위도 2개 현으로 나누어야 하였다.

1931년 봄에 무산촌 부근마을에서 특위와 연화현위의 주요지도자 등 10여 명이 참가한 회의가 열리였다. 회의는 3~4일 간 열리였는데 이 회의에서 연화현위를 연길, 화룡 2개 현으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특위통신원인 김옥주와 김춘휘는 특위선전부장 주건을 따라 달라자에 가서 중공화룡현위를 건립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한달가량의 시간을 들여 모든 준비가 완료되였다.

이해 5월에 채수항(달라자 사람)을 서기로 하는 중공화룡현위가 달라자에서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현위성원들은 잠시 군사부장과 청년부장을 두었는데 의란구의 방상범이 군사부장을 맡고 개산툰의 전혁이 청년부장 겸 공청단현위서기 직무를 맡았다. 이와 더불어  옥주는 현위의 파견으로 평강구에 소환되여 중공평강구위 부녀위원으로 부임하였다.

1931년 가을과 이듬해 봄에 공산당이 지도한 추수춘황투쟁이 료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김옥주는 구안의 광범한 부녀들을 이 투쟁에로 궐기시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한데서 신분이 드러나 당지에서 투쟁을 견지하기가 어려웠다.

1932년 2월에 안도현 소사하에서 중공안도구위가 건립되였다. 서기는 평강구에서 간 토산자 쟈피거우 출신의 안정룡 (원명 안정규)이였다. 김옥주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소사하에 가서  구위 부녀위원책임을 맡았다. 그는 구위서기와 함께 구위산하의 소사하,  대사하, 서북차 등지로 다니며 한패 또 한패의 투쟁골간들을 당조직의 두리에 뭉쳐세웠다.

1932년 음력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 약수동을 눈에든가시처럼 여겨오던 투도구령사분관과 경찰서에서는 한달도 못되는 기간에 련속 세차례의 대토벌을 감행하여 옥주의 시아버지 정태준 등 10여명 동지가 원쑤의 총칼아래 쓰러지고 옥주집을 망라한 10여채가 재더미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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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주가 사업차로 약수동에 돌아왔을 때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살풍경이였다. 그것도 시아버지의 환갑날이 제사날로 되였으니 억이 막히였다. 옥주는 시아버지 등 후사를 처리하고  시어머니를  가까운 이웃에 부탁하고는 세아이ㅡ3살내기 막내아들 봉춘이를 업고 9살내기 아들  해봉이와  12살내기  해순이의  손목을  잡고 설한풍을  맞받으며  안도현 소사하로 떠나갔다.

그후 안도구위는 활동지대를 영경일대의 사문자(영경향 요퇀촌)로 옮기였다. 사문자는 안도구위의 근거지로서 여기에는 소사하, 대사하 일대에서 활동하던 수십 명의 당원, 단원과 혁명군중들이 모이였다. 옥주는 중공안도구위 부녀위원과 유격대지부위원 책임까지 맡아보았다.

중공안도구위는 화룡현위의 지도를 받았다. 투쟁의 수요에 따라 그들은 안도정부를 세우고 근거지의 일상사무를 돌보았다. 1934년 겨울에 안도구위와 정부는 현위의 지시를 받고 새로 개척된 처창즈근거지 왕가점으로 이동 (1971년 8월 13일 채만규 구술)하였다. 이에 앞서 어랑촌항일근거지의 군민들은 이미 처창즈로 옮겨왔었다.

그러던 1935년 2월에 김옥주는 주숙지와 꽤나 떨어진 유격대주둔지에 가서 총지부대회에 참가하고 산속으로  돌아오다가 밀림속에서 호랑이를 만나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의 구체적인 사연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지만 옥주의 3남매는 졸지에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지주집 말몰이, 남의 집살이신세로 되여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1935년경의 어느날 안도현 도목구에서 포수질하는 친척 정완송이 송강어구의 어느 산에 갔는데 어디에서인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도 이상해서 울음소리나는 쪽으로 가보니 어떤 아이가 무릎도 가리지 못한 헌 바지만 입고 “아버지,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소”하며 애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애는 옥주의 9살짜리 아들 해봉이였고 중국인지주집에서 말몰이군으로 일하고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해봉의 할머니가 송강으로 찾아갔다. 지주놈은 자기 집에는 자지 못한다고 호통쳤다. 갖고 간 비단저고리 한벌을 내여놓으면서 저애를 데려가겠다고 하니 300원 주고 사왔다면서 아편 몇근을 가져와야 데려가게 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별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우는 해봉이를 남겨두고 집에 돌아와 약담배밭들을 찾아다녔으나 이삭담배 몇냥밖에 모으지 못하였다. 그런대로 다시 지주집을 찾아가니 아편만 받아두고 아이를 돌려주지 않았다. 헌병대로 가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바람에 그냥 “그럼 이 애를 잘 키워주시오!”하는 부탁을 남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 했다. 그러는 할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후 1937년에 들은 소식으로는 해봉이가 지주집에서 눈물나는 말몰이, 머슴살이를 하다가 병이 들어 송강의 밀림속에 묻히고 말았다고 한다.

봉훈이는 남의 집에 가서 자라다가 업히워왔으나 해순이는 종무소식이였다. 그로부터 40여년만에 조선에서 연길 삼촌 정창근(옥주의 시동생, 항일투사)께 해순이의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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