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의 진흥 위해 평생을 바친대만애국선렬 옹택생

2019-05-13 08:41:32

“부친은 일찍 이름을 옹진화로 고쳤답니다. 그는 중화진흥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간주하고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대만애국선렬 옹택생의 아들 림강의 말이였다.

옹택생은 1903년 대북에서 태여났으며 본적지는 복건 동안이다. 일찍 청소년시절에 그는 대만에서 일련의 항일애국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조직했다. 일본식민교육을 반대하여 그는 부친의 배치에 따라 하문에 가서 공부했으며 1924년 하문집미중학을 졸업하고 그해 하문대학에 입학했다.

옹택생 렬사

1925년, 옹택생은 상해대학에 전학하여 공부하면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5.30’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 7월, 옹택생은 구추백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 그는 위탁을 받고 장주, 하문에 가서 공산당지방조직을 건립하였고 중공민남특위 위원으로 당선되여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공산당, 공청단 조직을 창건했으며 학생운동, 로동자운동을 지도하고 로농운동강습소를 창립했다. 1928년 4월, 대만공산당이 창건되였고 옹택생은 창건자의 한사람으로 되여 상해에 남아 ‘대만공산당’과 중공중앙의 련락사업을 책임졌다. 그사이 옹택생은 ‘8.1’ 반전투쟁 활동을 조직 령도하는 과정에 당국으로부터 ‘공산주의를 선전’한 죄명으로 체포되여 1년 도형에 언도되였으며 1929년 12월 조직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났다.

1933년 3월, 반역자의 밀고로 옹택생은 상해에서 체포되였고 그 후 대북의 일본감옥으로 압송되였다. 6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일본침략자의 모진 형벌과 고문, 회유와 위협 앞에서 그는 시종 굴함없이 생명으로 당조직의 비밀을 지켰다.

장기적으로 학대를 받은 탓으로 옹택생은 페결핵이 악화되였다. 1939년 3월 1일, 그는 보석치료로 풀려났지만 생명이 위독해 그달 19일 대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6살이였다.

1927년 9월, 옹택생의 아들 림강이 상해에서 태여났다. 얼마 후 모친은 림강을 안고 대만공산당 창건준비위원회에 참가했으며 후에 대만 본고장으로 돌아갔다. 9살 되던 해, 림강은 모친을 따라 대북에 가서 두겹 철란간을 사이두고 부친을 면회했다.

옹택생은 대만민중들로부터 ‘기백이 있는 진정한 애국자’로 공인받고 있다. 그의 전우 진운, 료승지는 “죽는 날까지 공산당원의 고상한 지조를 견지했다”고 높이 찬양했다. 1975년, 옹택생은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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