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동 정씨가문의 항일렬사들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38

2019-05-20 08: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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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준 로인의 둘째 며느리 복정순(卜正顺, 1910ㅡ1933)은 1910년생이고 연길현 삼도만사람이다. 그는 20년대 후기에 정태준 로인의 둘째며느리(둘째아들 정창근의 안해, 항렬로는 창근이가 막내)로 들어선 후 지하교통소로 이름난 이 항일가정에서 ‘후근부장’역할을 했다. 이들 큰집의 아들, 딸, 며느리가 모두 바깥으로 도니 후근부장은 명실공히 정순이 몫이였다.

정순은 조선녀성답게 례절 바르고 얌전하며 곱살하게 생겼다. 그는 1929년에 벌써 조공당 엠엘계통의 공청단에 가입하여 혁명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그는 1931년 6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약수동반제동맹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약수동혁명의 터전은 정태준 로인 가정이였다. 지하교통소가 이 집에 설치된 데서 오가는 외지혁명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 집을 거쳤다. 어떤 동지는 이 집에서 한달, 두달씩 머무르기가 일쑤였다. 당평강구 부녀위원이였던 차정희나 공청단평강구 아동국장 황옥순 등이 그러하였다. 그때마다 정순이는 군소리없이 동지들을 위해 일했다. 하여 누구나 그의 성품을 두고 외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일손이 딸릴 때면 바깥통신 련락에도 곧잘 나섰다. 한번은 멀리 장인강에도 발자취를 남기였다. 달라자, 개산툰 일대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직의 수요라면 그는 언제나 발벗고 뛰여다니였다.

1932년 음력 11월 4일, 투도구령사분관과 그 경찰서 놈들은 약수동에 대해 2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이날 토벌에서 박상활, 황룡정, 김동산, 전춘복 등 분들의 10여 집이 불에 타고 시아버지이며 공산당원인 정태준 로인 등 8명이 참혹히 살해당했다. 놈들은 정태준, 김순희 등 8명 동지를 정순이네 집에 가두고 기관총소사를 한 뒤 불을 달아놓았었다.

피눈물이 쏟아지던 그 나날에 복정순은 5살배기 딸 봉선이를 연길현 도목구 6촌집에 맡기고 마음을 굳게 먹고 2살 되는 아들 봉산이를 업은 채 안도현 처창즈로 찾아갔다. 처창즈에서 그는 결연히 유격대에 참가하여 무기를 들고 적들과 싸웠다.

1933년 8월의 어느 날 복정순은 처창즈 서남차에서 봉산이를 업은 채 무장자위단 놈들과 조우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적탄에 맞아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런 줄 알리 없는 어린 봉산이는 어머니 젖가슴을 헤치면서 젖달라고 울어대기만 하였다. 돌이 갓 지난 아기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참혹한 현장이였다.

나중에 자위단놈들은 어린 봉산이를 포승줄로 목을 매여 끌고 다니다가 나무에 달아매고 죽이였다. 악착하기 그지없는 놈들은 강제로 끌어온 군중들 앞에서 “공산당은 새끼마저 없애버린다.”고 소리지르며 야수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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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준 로인의 맏딸은 정보배(郑宝贝, ?ㅡ1933)라고 부르는데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모르는 실정이다. 그는 약수동 태생으로서 정태준 로인의 맏딸이라지만 남매들 사이에서는 정룡의 손아래 녀동생으로 통한다. 1930년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약수동부녀회 골간으로 활약했다.

보배는 1930년에 화룡현 대동구 혁명자 문동훈과 결혼하였다. 이해 가을 추수폭동에서 남편은 놈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였다가 옥중에서 희생되였다. 보배는 비분을 속으로 삼키며 이를 악물고 투쟁에 나섰다.

1932년 겨울 약수동에 대한 적들의 세차례 대토벌 후 정보배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현 안의 달라자구로 활동지대를 옮기였다. 그 이듬해초에 정보배는 적들의 토벌에서 불행히 희생되였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 유감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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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준 로인의 막내딸 정경옥(郑京玉, 1911ㅡ1934)은 1911년에 약수동에서 태여났다. 녀자로는 막내지만 항렬로 정창근(복정순의 남편) 우이다. 사람이 수수하고 무던하다고 하여 동지들로부터 ‘털털이’로 불리였다. 성격은 급한 축이지만 부리부리한 두 눈에는 항상 정기가 흘러넘치였다.

경옥이는 1928년에 6년제 사립약수학교를 졸업하고 룡정에 가서 사립대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학교시절에 진보적 청년단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에 종사하다가 신분이 드러나 졸업을 앞두고 외지로 망명하였다. 그 후 약수동에 돌아와 혁명하다가 1931년 초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해 초에 그는 중국륙군대놈들에게 체포되여 연길감옥으로 압송되였다.

그때 연길감옥에는 녀자 ‘정치범’ 8명이 있었다. 그중에는 후날의 중공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항일렬사)과 옥중에서 뜨개보를 떠서 유명해진 후날의 연길현유격대 전사 김정길(항일렬사), 1929년 광주학생성원시위에서 소문 떨친 장인강의 문두찬(항일렬사) 등이 있었다.

경옥이를 질색케 한 것은 중공왕청현위 부녀위원으로 있은 최선일이였다 한다. 그는 연길감옥에 투옥된 후 혁명의 전도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바깥혁명은 전부가 망한 것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지금의 혁명은 ‘시기상조’라는 어구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혁명에 몸바친 정경옥이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였다. 그는 최선일과 도리를 따지다가 실망한 나머지 옥중의 동지들과 “저 사람은 사상이 변했다.”고 툭 찍어 말하였다. 출옥한 후 최선일이 김영신의 뒤를 이어 당동만특위 부녀위원으로 뛸 때 정경옥은 분개하여 “저런 꼴을 해가지고도 사업한다.”고 조소하였다. 그후 최선일이는 과연 혁명을 견지하지 못하고 물앉아버렸다고 한다.

옥중에서 정경옥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중공왕청현위 부녀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된 김영신이였다. 그의 고매한 인품과 혁명투쟁 경력은 경옥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들은 뜻이 맞아 인차 무랍없는 사이로 되였는데 경옥이는 영신이를 ‘언니’라고 허물없이 불렀다.

경옥이의 존경을 자아낸 사람으로는 또 김정길이 있다. 어느 날 김정길은 간수를 통해 뜨개실과 뜨개바늘을 사서는 흰종이에다 연필로 도안을 그리며 뜨개를 뜨기 시작하였다. 뜨개보를 떠선 뭘하는가고 묻자 정길이는 기념으로 뜨는데 죽은 후에라도 유물이 될 거라고 환히 웃었다. 여러 달이 지나 뜨개보를 다 뜨자 뜨개보엔 한자 스물일곱자가 새겨졌는데 그 뜻은 이러하다.

“연길현 제4감옥에 갇힌 김정길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뜬 뜨개보, 청년녀성들이여 세계해방의 노래 높이 부르라.”

“야, 멋지다!”

경옥이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적들이 낌새를 채지 못하게 하려고 글을 밑에서부터 우로, 오른편에서부터 왼편으로 수놓은 자체가 걸작이였다. 경옥이는 정길이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목숨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싸워가자고 속심을 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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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에 괴뢰만주국이 서면서 특사령이 내렸다. 정경옥 등 여러 녀자 ‘정치범’들은 대사를 받고 옥에서 풀려나왔다. 경옥이는 약수동에 가서 한동안 머물면서 조직의 심사를 받은 후 조직의 신임으로 개산툰으로 가서 개구농민협회 부녀부 책임을 맡았다.

이해 봄에 일제는 개산툰일대의 사광사 사장 정문권을 암살하고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떠들어댔다. 사실 정사장은 추수춘황투쟁을 지지, 성원한 사람으로서 놈들의 눈에 날만도 하였다. 헌데 사실의 진상을 모르는 정사장의 아들 정국현(18살)은 꼬임에 들어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면서 선구무장자위단에 들어갔다.

사태는 극적으로 악화되여갔다. 중공개구구위에서는 정경옥에게 임무를 주어 정사장의 큰집에 들여보내였다. 처음에 그들은 펄쩍 뛰였지만 경옥이가 같이 밤을 지새면서 하나하나 까밝히는 데서 태도가 많이 누그러들었다. 경옥이는 재차 그 집에 들어가 내심하게 설명하면서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사실의 진상이 밝혀지자 정국현과 그의 일가족들은 일제놈들을 더없이 증오하면서 다시 혁명을 지지, 옹호하는 켠으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선구자위단도 해산되고 일제놈들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경옥은 동지들과 함께 자주 구안의 기층조직들을 찾아주었다. 하루는 후동의 부녀회원모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 부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아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매매혼인, 민며느리 제도지요. 이 모두가 사회문제입니다. 우리가 지주, 자본가와 일본제국주의를 때려엎지 않고서야 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부녀들도 일떠나 싸워야 합니다. 싸워야 광명한 길이 열립니다…”

경옥이의 말은 사리에 맞았다. 그만큼 경옥이는 철저한 혁명자로 소문이 높았다.

1932년 가을 이후 구위의 여러 기관들은 당구위를 따라 자동골의 연두봉으로 지대를 바꾸었다. 적들의 토벌은 끊임없었지만 경옥이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1932년 이해 12월초의 어느 날 정경옥은 당구위 부녀위원인 차정희의 손을 잡더니 울먹거리였다. 정희가 웬 일인가고 재우쳐 묻자 그는 약수동 집이 불에 탔는데 아버지도 비참하게 살해되였다고 비분을 터놓았다. 그 뒤에는 또 보배언니가 대구에서 ‘토벌’에 죽었다고 흐느끼였다.

차정희는 남의 일 같질 않았다. 개구로 오기 전에 그는 약수동에서 활동하면서 경옥이네 집에 거처했는데 정태준 로인과 그들 일가의 사랑을 몹시 받았었다. 정희가 그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마음을 크게 먹으라고 하자 경옥이는 자기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 모두를 혁명에 내세우고 뒤바라지를 해온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난다고 동을 달았다.


12

1933년초에 정경옥은 조직의 지시로 화룡현 어랑촌근거지로 들어갔다. 약동하는 근거지의 현실은 그의 마음을 후덥혀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내내 웃음이 가실 줄 몰랐다.

했으나 그는 무거운 기분 속에 휘말려들어야 했다. 이해초부터 시작된 이른바 반 ‘민생단’ 투쟁은 정경옥이란 이 락관적인 동지마저 스쳐지나지 않았다. 청백함을 호소할 데조차 없었다. 누구와 어울리면 누구를 잡아가두는 판에 그는 애매한 동지들을 련루시킬 수 없었다. 별수가 없었다. 이 가혹한 현실에서 정경옥은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정경옥은 그냥 앉아 죽을 수는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세월이 가면 해명될 때가 있겠지 하고 근거지의 중국인당원인 오씨와 살림을 꾸려서야 무서운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다. 그는 근거지의 생산대에서 묵묵히 일하면서도 당조직을 믿었으며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근거지에 대한 일제와 위만군의 토벌은 계속되였다. 근거지는 갈수록 지탱하기 어려워 1934년 가을부터 근거지의 군민들은 새로 개척한 처창즈근거지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이해 늦가을의 어느 날 정경옥은 처창즈일대에서 적들과의 한차례 조우전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화룡현 약수동 정씨가문의 항일렬사 6명중 한사람은 정태준 로인의 맏아들 정룡(郑龙, 1903ㅡ1934)이다. 정룡은 약수동 60여명 항일렬사들 가운데서 약수동항일사의 시초를 이루는 선두주자의 한사람으로 알려지고있다. 정룡의 친동생인 정창근(郑昌根) 등을 통하여 약수동 관련 정룡의 항일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생년월이 바르지 못하고 약수동을 떠난 후의 항일활동을 잘 알수가 없어서 내내 한편의 항일렬사 전기로 정리하지 못하였다.

그 후 30여년 세월이 흐르더니 2014년 12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제2권의 정룡 렬사 략전에 출생일과 희생 당시의 사실이 알려졌다. 드디여 정룡 렬사 전기를 정리할 계기가 된 듯싶어 마음이 후련해진다.


13

정룡은 1903년에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약수동 정씨댁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정태준은 일가식솔을 휘동하여 몇년간 이주살이하던 오늘의 룡정시 조양천진 덕신촌을 떠나 1898년 경에 당시 연길현 수신향 약수동으로 옮겨앉았다. 그때만 해도 약수동은 나무가 우거진 한적한 고장이였다. 여기저기 조선사람집들이 가담가담 보일 뿐이였다. 그 후 한세대, 두세대 조선이주민들이 밀려들더니 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촌, 중촌, 하촌을 가진 수십세대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정태준 일가는 중촌에 자리잡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물레거우집’으로 불렀다. 그때 약수동에는 6년제 사립약수학교가 일어섰다. 사립약수학교는 웬일인지 다른 고장보다 늦어 1919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다(김동섭, 박기만. <유석깊은> 내부발행, 2002년 4월, 제9페지). 이해초에 지방의 유지인사들인 리홍도, 천병순 등을 선두로 약수학교가 세워졌지만 그때 정룡은 이미 소학교 공부를 할 나이는 아니였다.

정룡은 약수동 마을에서 서당공부를 하다가 지금의 아동에 일어선 사립협동학교를 다니였다. 약수동에서 남으로 몇리 되는 거리였다. 사립협동학교는 후날 룡문소학교의 전신이다. 10대 소년시절에 정룡이는 사립협동학교를 다니면서 반일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삼천리강산을 들었다놓은 1919년 3.1반일운동이였다.

정룡은 약수동의 또래 젊은이들과 함께 룡정 3.13반일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4일부터 반일독립단체ㅡ광복단 출신인 정태준 등 선각자들이 약수동사람들을 불러일으켜 투도구로 내려가 수천명 반일대시위에 뛰여들 때 정룡이는 약수동 저들 또래 그리고 협동학교 학생들과 함께 그 물결 속에 휩쓸리였다. 이도구 반일시위에도 뛰여들었다.

1920년경에 정룡은 부모님의 주선으로 동북으로 언덕 넘어 세린하 녀자 김옥주(金玉珠)를 안해로 맞아들이였다. 안해되는 녀자는 1906년 생으로서 정룡이보다 세살 아래였다. 사립협동학교를 졸업하면서 계급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정룡은 가난한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당겨오자면 일떠나 혁명해야 하며 혁명하자면 손에 꼭 무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어슴푸레 느끼게 되였다. 조선반도 3.1반일운동의 계속인 룡정 3.13반일시위와 투도구, 이도구 3월시위를 경과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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