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동 정씨가문의 항일렬사들

2019-05-24 14: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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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4월 15일에 천도교인이고 반일운동가인 최익룡(崔翊龙) 등에 의해 동흥소학교가 룡정에서 일어서더니 동흥소학교에 중학교강습소가 꾸려졌다. 그해 10월 1일에는 동흥소학교가 승격하여 동흥중학교로 모습을 바꾸었다. 정룡은 아버지의 지지로 약수동의 김세준 등과 함께 동흥중학교 제2기 학생으로 되였다.

1922년에 그 시절 쏘련 연해주에서 룡정에 온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青松) 등에 의해 동흥중학교 학생들속에서 ‘사회과학연구회’가 조직되였다. 정룡은 이 연구회 50여명 회원속의 한 학생으로서 로씨야 10월혁명의 사상과 사회주의사상을 접수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였다.

1925년 3월에 정룡은 제2기생으로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약수동으로 돌아왔다. 정룡의 동생 정창근 로인에 따르면 정룡은 반일지사들이 꾸리는 이도구사관학교에서 군사리론과 여러가지 무기다루기도 배웠다고 한다. 정룡은 박세진, 김세준, 박상활 등과 함께 1919년에 꾸려진 6년제 사립약수학교를 발판으로 야학을 꾸리며 군중들의 계급적각성에 목적을 둔 사회주의 사상계몽운동에 뛰여들었다.

약수동 사상계몽운동의 시작이였다. 정룡의 안해 김옥주는 그들을 도와  야학에 앞장서며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와 맑스-레닌주의사상을 널리 선전하였다. 이어 약수동에 반일삐라가 흩날리고 조선공산당 동만도 엠엘계통의 반제동맹, 농민회, 청년회, 부녀회, 소년회 등 군중단체가 련이어 나타났다.

1928년 5월 1일, 사립약수학교와 사립협동학교의 학생 100여명은 정룡, 박세진 등의 지도하에 련합반일시위를 가지고 5.1국제로동절을 기념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지주, 자본가를 타도하자!”, “토호렬신을 타도하자!” 등 혁명구호를 높이 불렀다. 이해 9월 3일, 정룡과 박세진  등은 상부의 지시에 좇아 또 100여 명 청년학생들이 참가한 반일시위를 조직하였다.

그번 반일시위는 9.7국제무산청년절을 계기로 룡정, 국자가를 중심으로 하여 세차게 터졌다. 당황해 난 일제군경들은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이란 검거선풍을 일으켜 각지에서 72명의 혁명청년들을 붙잡아들이였다. 검거선풍의 회오리는 약수동과 그 일대에도 불어쳐 정룡과 박세진을 비롯한 동지들은 잠시 외지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적들의 검거선풍은 그후에도 끊임없이 몰아쳤지만 투쟁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1929년 말에 조선의 광주학생들을 지지, 성원하는 반일대시위가 룡정, 투도구를 중심으로 사나운 격랑을 이루었다. 정룡과 박세진 등은 또 투도구일대의 반일대시위의 조직자로 나섰다. 약수학교의 학생들이 룡평, 투도구 신흥학교의 학생들과 합류하여 선참으로 투도구에 집결하여 투도구 반일학생시위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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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동의 100여 명 학생과 군중들은 사립약수학교 교장이고 농민협회 책임자 리경천과 정룡 등의 인솔하에 기발을 들고 투도구에 달려가 성원하였다. 아동, 장인강, 세린하 등지의 학생, 청년들도 분분히 떨쳐나 투도구로 밀려들었다. “일제는 물러가라!” 등 구호소리는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투도구령사분관 경찰들이 준동하였지만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느날 밤 시위자들은 가로등불을 꺼버리고 령사분관을 습격하여 수라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서슬에 1929년 이해 약수동에 밭을 둔 지주나 민회에서는 소윤두, 곡식 등을 가지러 오지도 못하였다. 이 투쟁은 이듬해 봄까지 지속되였다.

정룡은 자기 또래들과 함께 처음부터 조선공산당 엠엘파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진두에는 언제나 정룡과 박세진, 김세준, 박상활 등이 서 있었다. 정룡의 아버지 정태준은 조공당 엠엘파 약수동세포 책임자였다. 중국공산당으로 말하면 당지부서기를 가리킨다. 1981년 3월에 정리한 항일로간부 량환준의 <약수동>에 따르면 정태준의 집은 조공당 비밀교통소이기도 하고 조선ㅡ연변ㅡ모스크바를 래왕하는 조선공산당 엠엘계통의 연변련락소였다고 한다. 정룡의 안해 김옥주는 약수동 부녀회책임을 맡고 남편과 더불어 약수동을 혁명의 요람으로 키워갔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 엠엘계통으로 말하면 약수동은 그야말로 20년대 후반 연변혁명의 대본영이나  다름없었다. 30년대 초반에도 그러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1930년 5.30폭동직후 동북의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수속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약수동에도 정태준, 정룡, 박세진, 김세준, 박상활 등을 골간으로 하는 중공약수동지부가 조직되였다. 그에 앞서 그해 5월 27일 약수동에서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ㅡ약수동쏘베트정부가 탄생하더니 7월에는 중공평강구위, 8월 13일에는 연변혁명의 수뇌부ㅡ중공연화중심현위도 약수동에서 탄생하였다.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지도하는 동만, 즉 연변  4개 현의 산하 9개 구위도 약수동  지하교통소를 통하여 중심현위와 련계하고 새과업을 받아안았다. 동지들은 약수동에서 투쟁과업을 안고 연변 각지로 달려갔으며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북부일대로 뻗어갔다. 그만큼 정룡 등을 선두로 하는 약수동과 그의 집에 설치된 비밀지하교통소가 일으키는 역할이 막대하였다. 이 가운데서 정태준과 정룡, 김옥주는 물론 정룡의 아래 누이동생들인 정보배와 정경옥, 막내 정창근 등 모두가 혁명의 길에 올랐다. 정룡의 일가는 명실공히 약수동의 첫째가는 혁명가정으로 떠올랐다.

다만 정룡이 맡은 책임에 대한 그 어떤 자료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에 약수동과 서성, 룡정, 연길 등지를 다니며 정룡의 동생 정창근과 약수동에서 활동한적 있는 항일투사들을 방문해도 누구하나 그 내막을 아는 이가 없었다. 이는 정룡이 당의 비밀사업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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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에 채수항(달라자 사람)을 서기로 하는 중공화룡현위가 달라자에서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중공동만특위와 현위 통신원으로 활동하던 정룡의 안해 김옥주는 현위의 파견으로 평강구에 소환되여 중공평강구위 부녀위원으로 부임하였다. 1932년 2월에 안도현 소사하에서 중공안도구위가 조직되자 중공화룡현위에서는 정룡과 김옥주를 안도구위로 파견하였다.

신생한 중공안도구위 제1임 서기는 화룡현 평강구에서 간 토산자 쟈피거우 출신의 안정룡 (원명 안정규)이 맡아보았다. 정룡이는 안도구위 조직위원을 맡고 김옥주는 안도구위 부녀위원 책임을 맡았다. 그들은 구위서기와 함께 구위산하의 소사하, 대사하, 서북차 등지로 다니며 한패 또 한패의 투쟁골간들을 당조직의 두리에 뭉쳐세웠다.

1932년 봄에 안도구위는 대사하 사포정자(四哺頂子)에 항일유격구ㅡ근거지를 창설하였다. 시초에 혁명군중은 당, 단원을 망라하여 100명 미만이였으나 그들은 약 20명의 알쭌한 젊은이들로 유격대를 조직하고 정룡이를 유격대 정치지도원으로 내세웠다. 같은 시기 위만군의 토벌이 갈수록 극심해가자 구위는 유격구를 화룡 베개봉밑의 대사하 사문림자에 옮기였다. 대부분 혁명자들이 가정을 데리고 간데서 근거지의 당원과 공청단원, 혁명군중은 100여명에 달하였다.

1933년 봄 중공안도구위서기는 원 중공삼도구구이 제2임 서기 장수였다. 1983년 11월 초, 그시절 화룡현에서 가진 항일투사좌담회에서 화룡 삼도구출신의 항일투사 강희렬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봄에 안도구위서기 장수는 중공화룡현위 군사부의 지시를 받고 강희렬소속 당지부에 와서 한차례 동원사업을 하였다.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지만 한주일 먹을 식량을 휴대하고 동남창에 모이라는 것이였다. 사실 그들은 정룡 등의 지휘하에 총을 갖고 화룡현유격대에 참가하게 되는 터였다. 그때 여러 지부에서 수십명 젊은이가 동원되였는데 소사하치기의 한 새밭에서 느닷없이 적들을 만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였다. 우리측 군호가 “1-2”인데 저편에서는 “서-쪽”하니 틀림없는 적들이였다.

그날 다시 령너머 대사하쪽에서 한주일이나 기다렸으나 다른 동무들이 더 나타나지 않았다. 정룡 일행이 어랑촌근거지로 향할 때는 화룡현위에서 파견되여온 최기산, 구국군에 파견된 현유격대의 차보균까지 합치니 일행이 15명인데 보총 14자루와 권총 한자루, 매개인이 철알 200발씩 짊어졌다. 제법 그럴듯한 무장대오였다.

안도 일행 15명이 처창즈를 거쳐 오도양차, 북왈리구, 남왈리구, 룡포덕을 지나 어랑촌근거지에 접어드니 벌써 멀리서부터 근거지군민 100여명이 마중나왔다. 제일 앞에 근거지연예대가 줄지어서고 다음에 치마저고리에 작탄까지 가로 두른 녀성권총대와 토총을 지닌 근거지돌격대, 그다음에 현유격대 대원들이 일매진 신식군복을 떨쳐입고 나섰는데 환호소리, 만세소리 천지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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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화룡현유격대는 대사하, 소사하 출신의 신입대원 11명을 받아들이여 대오를 충실히 하였다. 보총 14자루에 권총 한자루, 숱한 탄알까지 보충받으니 전투력은 갑절 높아졌다. 화룡현유격대는 시초의 한개 중대로부터 3개중대를 가진 대대로 장성하게 되였으니 안도구위와 구위산하 유격대는 화룡현유격대대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긴급과업을 수행한후 안도구위서기 장수와 정룡, 강희렬은 사문자근거지로 돌아갔다.

화룡현유격대대는 어랑촌유격근거지에 대한 일제놈들의 추기대토벌과 1934년 봄 춘기대토벌을 분쇄하는 투쟁가운데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1934년 3월하순, 중공동만특위와 유격대 주요책임자 10여명이 참가한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회의 결의에 의해 지난해 음력 10월 이미 퇀으로 개편된 화룡퇀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퇀으로 개편되였다. 그뒤 인차 제2군독립사 제2퇀으로 다시 개편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동만특위에서는 또 안도현 처창즈근거지를 새로 창설하면서 대전자, 대사하일대를 개척하기 위하여 화룡퇀의 다수 병력과 왕청, 연길퇀에서 각기 1개련씩 뽑아 독립퇀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에 앞서 안도현 사문자ㅡ처창즈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벌리던 정룡은 새로 조직된 독립퇀 모련의 지도원으로 부임하였다.

화룡시민정국 렬사자료에 의한 《중국조선족렬사략전》 제2권 정룡렬사편에 따르면  1934년 7월 4일, 정룡은 소속 독립퇀의 명령을 받고 소부대를 거느리고 안도를 지나 교하일대로 진군하게 되였다. 그러던중 돈화현 황니허에 이르러 일본군과 조우전을 치르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한다. 그외 정룡 관련 어떤 자료도 보아낼 수가 없다. 지난 80년대 시절의 정룡의 동생 정창근도 형님이 교하일대로 움직이다가 희생되였다는 정도외 그 상세한 내막은 모르고있었다.

정룡의 정씨가족은 아버지 정태준과 정룡의 영향으로 일가 13명 중 항일렬사만 해도 6명이나 된다. 그들로는 정태준, 정룡, 김옥주(정룡의 안해), 복정순(정룡의 동생 정창근의 안해), 정보배(정룡의 녀동생), 정경옥(정룡의 녀동생)이다. 해방 후 정씨일가는 1957년 4월 17일에 정태준, 정룡, 김옥주, 복정순의 렬사증은 냈으나 정보배와 정경옥은 렬사증을 내지 못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가정에서는 그들의  최후를  증실할 만한 증명인들을 찾지 못하였었다.

후에 필자가 여러 자료들을 찾으며 당년 약수동과 어랑촌 등지에서 활동하였던 항일로선배들을 방문하면서 실마리를 찾아내였다. 그러나 그들도 정보배와 정경옥의 최후가 영용한 희생이라고는 똑똑히 찍어 말하나 직접적인 목격자는 아니여서 상세한 것은 말할 수가 없었다. 최근 년간 필자는 화룡시 약수동을 수차 찾았다. 지난해 2018년 6월 30일에도 약수동을 찾았지만 정보배와 정경옥 렬사증문제가 항상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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