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대오의 군수공급선구자 엽보평

2019-05-27 08:43:20

광동성 혜주 혜양구 추장가두판사처 주전촌에는 20세기 30년대에 지은 독립식 객가 주민집이 있는데 건축면적이 40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소형 사합원이다. 이 집은 엽정 장군의 친동생 엽보평이 지은 것이며 ‘육영루’라고도 불리운다.

엽보평은 또 엽전이라고도 불리웠다. 1902년 광동성 귀선현 추계향(오늘의 혜양구 추장가두) 주전촌의 한 보통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7살 때 개인서당에서 공부했고 13살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하고 학교에 남아 잡일을 했다.

엽보평 렬사

1922년, 팽배가 령도한 해륙풍농민운동이 동강을 휩쓸었다. 엽보평은 같은 마을의 진보적 청년들과 비밀리에 주전촌 첫 농민협회를 설립하였고 회장으로 선출되였다. 1925년 2월, 동정련군이 담수를 진공할 때에 엽보평은 백여명의 농민군과 농민을 이끌고 전선을 지원했으며 배합작전을 했다. 그해 11월, 엽보평은 엽정독립퇀의 군수품 주임을 맡았다. 1926년 5월, 엽보평은 엽정독립퇀 북벌선견대를 따라 북벌전쟁에 참가했다.

1927년초, 엽보평은 국민혁명군 제11군 24사 군수품 주임을 맡았고 5월 많은 식량과 군수물자를 모아 하두인의 반란을 평정하고 무한을 보위하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8월 1일, 남창봉기에 참가했고 제11군 군수처장을 맡았다. 8월초에 봉기부대가 남창에서 철수했고 엽보평은 향항을 돌아다니며 11군의 흩어진 인원들을 불러모으다가 목표가 드러나 향항을 떠나 잠시 오문으로 피해갔다. 후에 오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계속 혁명을 진행했으며 1928년 6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9년에 고향 농민들의 세금반대투쟁에 참가했다. 1930년 가을, 국민당 반동파들은 병력을 집중해 대규모적인 ‘마을소탕전’을 벌였고 지방 반동분자들과 괴뢰향장 엽관문 등은 공개적으로 국민당 반동파와 결탁해 농민협회 회원들을 무차별 진압했다. 엽보평은 농민적위대를 적극 조직해 그들과 맞서 싸웠으며 괴뢰향장 엽관문을 검거, 처단하여 백성들을 위해 화근을 없앴다. 이어 당의 지시에 따라 향항으로 가서 통전사업에 종사했다.

1937년에 전국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엽정은 신사군 군장을 맡았다. 엽보평은 남창에 가서 신사군 군수품처 처장을 맡고 신사군 군수물품을 모으기 위해 사처로 뛰여다니면서 신사군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 1939년 가을, 엽보평은 명령을 받고 광동으로 돌아갔고 향항에서 군용물자를 호송하는 길에서 광서 남녕 팔당 부근을 지날 때 불행하게 차사고로 사망했다. 그때 나이는 37살이였다.

1939년 11월 6일, 신사군 《항일전쟁신문》은 엽보평 렬사를 깊이 추모하는 글을 발표해 그에 대한 무한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 1954년 7월, 혜양현인민정부는 엽보평의 유해를 광서 남녕으로부터 고향인 혜양 주전으로 운송해 안장했으며 기념비를 세웠다.

엽보평이 수건한 육영루는 혜보인민 항일유격총대의 탄생지로 동강의 아들딸들이 피흘려 싸우며 항일하고 고향을 보위한 영웅사적을 견증했다. 1995년,육영루는 혜양시 중점문물 보호단위로, 2004년에는 혜주시 문물보호단위로, 2015년에는 성급 중점문물 보호단위로 선정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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