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제1로군 부관 조기섭

2019-05-31 15: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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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앞에는 근 40년전 1983년 2월 1일과 1986년 9월 29일 취재했던 김광해 로인의 방문자료가 놓여있다. 1983년 그해 김광해 로인은 70세로서 그 시절 화룡현 동성향 홍성 5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생활한다 하여 김로인은 평생 농사로 늙어온 로인이 아니라 피끓던 청춘의 그 시절엔 한다하는 항일유격대 출신, 항일련군 군의 출신이였다. 김로인한테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부관이였던 조기섭 렬사의 이야기와 빛나는 최후를 듣고 관련 연구자료와 조기섭 렬사의 아들 조명남 취재에 따라 조기섭 렬사 전기를 정리하게 되였으니 이 한편의 전기는 쉽게 온 것이 아니였다.

동북항일무장투쟁의 력사를 펼치면 1936년 7월에 동북항일련군 제1군(남만)과 제2군(동만)은 남만의 금천현 하리에서 동북항일 련군 제1로군을 구성하고 일본침략군과의 가렬처절한 싸움에 나서게 되였다.  제1로군 사령부 산하에는 후방기관을 책임진 사령부 부관을 두었다. 1938년 이후의 제1로군사령부 부관은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출신의 조기섭(赵基燮. 1898ㅡ1941),  조기섭은 때에 따라 조군섭, 조영학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화룡현유격대 출신들이거나 그후의 항일련군 제1로군 출신들은  조기섭이를 두고 그의 이름보다도 조포수, 조아바이라고 즐겨 불렀다. 날아가는 새도 쏘아 떨구는 명사수라해서 조포수요, 부대내 년장자인데다가 사람이 친절하고 누구나 그를 좋아하여 스스럼없이 부르니 조아바이다. 그는 1898년 음력 8월 8일에 함경북도 명천군 도요동의 한 가난한 집에서 생의 계주봉을 받아안은 사람이였다.

조기섭이 인생사에 어섯눈을 뜰 때는 섬나라 일제놈들이 삼천리강산을 마구 짓밟으며 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던 시기였다. 한데서 집안살림은 갈수록 엉망이여서 조기섭은 구학 서당공부조차 이어 갈 수가 없어 아버지를 도와 지주집 소를 방목하거나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농사일에서 잔뼈를 굳힌 조기섭은 갈수록 살아가는 이 세상은 고르지 못하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러던 1910년에 이른바 뚱단지같은 ‘한일합방’으로 나라와 백성들이 졸지에 망국노신세가 되니 통분함을 어이할 수가 없다. 마침 두만강 저쪽의 북간도ㅡ연변땅이 넓고 비옥하여 살기가 좋다는 풍편이 그의 귀에까지 들리였다. 어디간들 이보담 못할가, 조기섭은 무작정 고향땅을 떠나 낯선 이역땅 화룡현 지신사 명동일대의 사동이란 마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곳에서 그는 한마을의 소작농의 딸 김선옥을 맞아들이고 고향땅에 계시는 부모님과 누이동생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미였다.

허나 소작농의 신세라 일년내내 등이 휘도록 아글타글해도 지주의 소작료와 빚을 떼우고나면 남는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1921년 경에 조기섭은 일가식솔들과 함께 열두시렁이라고 불리우는 연길현 세린하의 작은 회막동에 자리를 옮겨앉았다. 어디 가나 소작살이생활이지만 일찍 개척되여 비빌데 없는 명동일대보다는 나은 편이였다. 1922년 음력 8월 19일에는 장자 조명남이 태여나 멍든 살림에 웃음을 안아왔다. 뒤를 이어 딸애 조정숙도 고고성을 울리며 이 세상에 태여났다. 조기섭은 보다 억척스레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농한기에는 목수일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살림에 보태였다. 사냥을 잘하여 원근에 소문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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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린하 작은 회막골어구 손가지팡(일신촌)에서 남으로 언덕을 넘으면 사철 맑은 샘이 송골송골 솟아 오른다는 약수동이다. 약수동은 그 시절 행정구역으로는 연길현 수신향의 한 마을이지만 혁명구역으로는 화룡현 평강구 약수동으로서 마을은 상촌, 중촌, 하촌으로 이루어졌다. 20년대 중기부터 혁명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하더니 20년대 후반에는 조선공산당이 지도하는 농민협회, 청년단, 부녀회, 소선대, 아동단 등 군중단체들이 조직되여 맹활약을 보이였다.

지하조직선들은 비밀리에 세린하일대에도 미치여 작은 회막골과 그 일대를 투쟁의 도가니로 만들어놓았다. 1928년에 이르러 연길현 세린하일대에도 마을마다 야학실이 꾸려지고 농민협회가 조직되였다. 조기섭은 야학실에 다니면서 혁명의 도리를 터득하였으며 선참으로 농민협회에 가입하였다. 약수동의 혁명자들도 작은 회막골에 오면 조기섭을 찾아 투쟁을 도모하였다.

1930년 5월 27일에 약수동 상촌에서 쏘베트정부가 수립되였다. 통지를 받고 대회에 참가한 조기섭은 부푸는 심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전 동북적으로도 처음으로 수립된 인민의 정권이란다. 며칠 후 5.30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작은 회막골과 그 일대의 골간들을 조직하여 남으로 언덕너머 투도구에 가서 약수동일대의 동지들과 합류하였다. 이날 저녁 투도구일제령사분관 담벽에 탄알구멍이 숭숭 나고 주구단체ㅡ‘조선인민회’ 사무실이 불의세례를 받고 각지로 통하는 전화선이 절단되였다. 조기섭은 통쾌하기만 하였다.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았다.

1931년 봄에 화룡현 어랑촌에서 김세를 대장으로 하는 평강구유격대가 조직되였다. 전해 가을에 조직되였던 유격대의 계속이였다. 이 유격대는 조직된후 약수동을 주요 활동지대로 하였는데 명포수로 이름높은 조기섭은 유격대의 골간으로 활약하였다.

그 시절에 세린하 일신촌에는 악패대지주로 자자한 손가가 살고있었는데 사합원(四合院)식으로 지은 집은 방만 해도 수십칸이나 되고 담장까지 둘러막아 그 위풍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공산당활동이 시작된 후 손가는 40여 명에 달하는 무장자위단을 거느리고 투도구령사분관경찰서의 졸개로 되여 약수동, 장인강을 쏘다니기가 일쑤였다. 민분이 하늘에 사무쳤다.

1931년 가을의 어느날 손가네 셋째 놈이 동불사로 떠났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조기섭은 수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길어구의 옥정동 조이밭에 매복하였다. 이윽고 말탄 세 놈이 나타나더니 가까이 무우밭에 들어가 무우를 뽑아 먹어댔다. 이때 조기섭이 보총을 추켜들더니 미구에 손가놈이 그 자리에 폴싹 거꾸러졌다. 다른 한 놈은 부상을 입고 달아났다. 요행 목숨을 부지한 두 놈은 동불사에 가서 경찰을 불렀으나 조기섭 등은 이미 대기령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날 조기섭습격조는 손가네를 골탕 먹이고 보총 한자루와 권총 한자루를 빼앗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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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이해 가을에 동만을 휩쓴 추수투쟁의 불길은 세린하일대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조기섭은 동지들과 함께 작은 회막골, 소북 등지의 농민들을 불러 일으켜 지주 고가놈의 낟가리를 헤쳐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뒤미처 적들의 ‘검거’바람이 일더니 조기섭은 공산당 ‘혐의분자’로 중국륙군대에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투옥되였다. 조기섭이 일자무식의 농군으로 꾸민데서 감옥당국은 아무 증거도 잡지 못하다가 반년 만에 무죄석방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조기섭이 마을에 돌아오니 어느덧 1932년 봄이였다. 이해 4월부터 일제놈들이 조선에서 대량의 일본군을 들여와 연변일대에 대한 대‘토벌’을 감행한데서 지방에서의 투쟁은 자못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평강구유격대는 한시기 해체상태에 빠졌다가 이해 가을 약수동에서 재조직되였다. 조기섭은 조직의 심사를 거쳐 다시 유격대에 참가하여 원쑤놈들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 나날에 유격대에서는 지방을 단위로 활동하면서 낮에는 흩어져 있다가 밤이면 모여 활동하는 책략을 강구하였다. 조기섭도 낮이면 집에 가서 잠을 보충하면서 겨울철 땔나무준비를 하는척 하다가 밤만 되면 어김없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후에 평강벌 서쪽의 구산장에 있는 이도구경찰서가 습격맞았소, 투도구 아래우의 중평리와 청지허의 대지주집들이 총과 물품을 앗기였소, 국자가 부근의 어느 대지주집이 습격당했소 하는 소문들이 련속 부절히 들리였다.

이는 모두 조기섭소속 화룡현 평강구유격대가 어랑촌근거지창설준비를 위한 일련의 행동들인데 먼 후날 당년의 아동단원이였던 조기섭의 아들 조명남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아버지와 그의 집을 드나드는 유격대원들에게서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것이라고 설명을 달았다. 어랑촌근거지와 유격대활동자료를 뒤적이니 모두가 실재한 사실들이였다.

이해 가을 이후 약수동과 세린하 일대에 대한 일제놈들의 ‘토벌’이 가심해졌다. 늦가을의 어느날 조기섭은 아들 명남이와 아동단 단장 등을 불러 작은 회막골에서 몇리 떨어진 저아래 마을 천개지팡에 가서 팽이놀음을 놀면서 토벌대놈들이 탄띠를 몇개씩 메고있는가를 살피라고 하였다. 그런 와중에 하루는 명남이와 그의 또래들이 집부근에서 감태를 뜯어먹으며 노는데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해질녘이였다.

그날 저녁에 조기섭이 마을에 나타나 긴급골간회의를 부르고 래일 적들의 토벌이 올리미니 모두가 이밤으로 피신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는 걷기 어려운 어린 딸애를 조기섭이 업고 나섰다. 며칠 전에 해산한 그의 안해는 갓난애 조명록을 업고 온밤을 걸어 장인강으로 넘어가는 깊은 산속에 들어갔다. 큰아들 명남이가 아버지 뒤를 겅정겅정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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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에 적‘토벌’대는 과연 세린하 석마장골에 들어가 불을 지르며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더니 세린하치기로 움직이며 조기섭일가 음페지를 지나갔다. 골홈의 가랑잎 속에 몸들을 감춘데서 발각되지 않았다. 조기섭은 어디론가 다녀오더니 유격대원 3~4명을 데리고 왔는데 괴춤에는 싸창을 지르고 있었다. 큰 회막골을 거쳐 집마을에 오니 마을은 텅텅 비고 집은 불에 타버렸다. 조기섭의 안해는 퉁퉁 부어 말이 아니였다.

며칠후 밤에 조기섭이 일가식솔이 거처하고있는 마을의 어느 빈집에 찾아갔다. 그는 어머니와 안해 세 아이의 고무신을 내놓았는데 명남이로서는 처음 신어보는 고무신이였다. 헌데 조기섭은 아들애와 딸애를 어루만지며 련속 애궂은 담배만 피워댔다. 명남이가 오줌누러 밖에 나가니 마당에는 총을 멘 유격대원들이 차고넘치였다. 그때까지도 조기섭은 그냥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식경이 지나 조기섭이 안해한테 사연을 터놓았다.

“이제 나는 유격대와 함께 떠나게 되오. 두어달 후에 집과 먹을 것을 얻어놓고 데려가겠으니 그리 아오. 세월이 잘되면 만나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울 것 같소…”

안해는 남편을 붙들고 갈바에는 모두 죽이고 가라고 넉두리를 했다. 조기섭의 어머니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흑흑 흐느꼈다.

이때 한 유격대원이 들어서다가 이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조용히 서버렸다. 조기섭은 쪽지를 써서 안해한테 넘기면서 룡정 남쪽의 부채골로 찾아가라고 뒤를 달았다. 아내와 어머니는 조기섭의 다리를 붙잡으며 통곡하였다.

또 한 유격대원이 들어섰다. 출발시간이 되였던 것이다.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순간에 조기섭은 품에서 권총을 쑥 뽑아들었다. 두 유격대원이 달려들어 권총을 빼앗아서야 랭정을 되찾은 그는 한숨을 훌 내쉬더니 밖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이것은 1932년 12월 중순경의 어느날의 일이다. 이렇게 떠난 걸음이 조기섭과 그의 일가족과의 영리별로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후 조기섭일가가 겪은 피눈물의 고생살이는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아마 하나의 장편소설은 족히 될 것 같다.

1932년 12월 하순에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화룡현유격대가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30대의 조기섭은 조직의 신임으로 유격대의 후방대원이 되여 박포수로 불리우는 금곡출신의 박영순 등과 함께 어랑촌 서남쪽 깊은 산속인 천수동에 들어가 병기공장을 꾸리고 본격적인 작탄생산에 들어갔다. 그 주변일대들에는 근거지의 병원과 장공장, 재봉대실, 석마칸 등 후방기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후에 병기공장은 야지골의 깊은 산속에 자리를 옮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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