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의 ‘군중수령’ 가강걸

2019-06-01 12:55:55

가강걸은 1890년에 출생했으며 산서성 하현사람이다. 젊어서 신해혁명, 원세개를 반대하는 투쟁과 5.4애국운동에 참가했고 두번 일본에 류학을 갔다. 1921년 고향에 돌아온 후 평민교육에 힘썼고 선후하여 하현, 운성 등지에서 이태소학교, 하현평민중학교, 운성하동중학교 등 학교를 설립하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선전, 전파하였으며 많은 진보적인 청년들을 혁명골간으로 양성했다. 군벌정부와 토호렬신을 반대하는 투쟁과 운동에 여러번 참가하고 령도했으며 일찍 반동당국에 체포되여 감옥살이도 했다. 1927년 겨울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가강걸 렬사

대혁명이 실패한 후 산서성 남부지역 당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당했다. 엄중한 백색테로 속에서 가강걸은 위험을 무릅쓰고 명령을 받고 선후하여 중공 하동중심현위 서기, 하동특별위원회 조직부장 등 직무를 력임하였으며 당조직의 재건과 회복 사업에 진력했다.

1936년 홍군이 황하를 건너 산서에 진입하였을 때 가강걸은 홍군의 행동에 호응하여 하현에서 중조농민무장폭동을 령도하였고 홍군유격대를 조직하고 총지휘를 맡았다. 1937년 11월, 중공하동특별위원회는 가강걸에게 문(희)하(현)일대에서 팔로군 병력 500명을 증가할 것을 위탁하였는데 그는 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하였으며 중앙군위 부주석 주은래가 산서성위에 준 병력증가임무를 원만하게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12월, 중공북방국은 림분에서 산서성 공산당 열성분자회의를 소집하였고 회의에서 류소기는 가강걸을 하동의 ‘군중수령’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1938년 1월, 가강걸은 연안에 가서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에서 공부했고 5월에 조직의 파견으로 하동으로 돌아가 적후유격전쟁에 종사했다. 그는 선후하여 중공 진예특별위원회(후에 진예지구당위원회로 개칭) 위원, 군사부장, 진예변경유격지대 공급부장 등직을 력임했으며 유격대를 거느리고 산간지역에서 싸우며 주력부대와 배합해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번 격퇴하였다. 1939년 9월, 중공 진익예지구당위 제1차 대표대회에서 중공진익예지구당위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7차 당대회 후보대표로 선출되여 당대회에 참석했다. 7차 당대회 후 그는 중조지구당위 위원, 민중운동 부장을 맡았다. 국민당 반동당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서의 가강걸의 영향력을 아주 두려워했다. 1939년 11월 18일, 중조지구당위 소재지로 돌아가는 길에 가강걸은 국민당 특무의 암살을 당했는데 그때 나이는 49살이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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