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실제적인 혁명인재 라화성

2019-06-04 14:37:16

라화성은 1895년 복건 장정 남양구(지금의 상항현) 남산촌의 한 중의가문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의학을 배웠다. 1912년 복주잠업학교에 입학했고 1915년에 졸업해서 장정으로 돌아와 현잠업학교에서 글을 가르쳤다. 1925년 상해 “5.30”참안이 발생한후 그는 장적남, 양성무 등과 함께 ‘장정학생련합회’를 설립하고 집회를 조직해 상해로동자들을 지지성원하고 제국주의죄행을 성토하였으며 ‘장정월간’을 창설하여 시대적 페단을 규탄하고 혁명을 선전하였다. 1927년 9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라화성 렬사

1928년 6월, 라화성은 남양, 재계 일대에서 비밀농민협회를 건립하고 당조직을 발전시켰다. 그 이듬해 7월, ‘남양폭동’을 령도했다. 폭동에서 승리한후 ‘정련남적위대'를 건립하고 장정, 상항 등지의 군중들을 적극 발동하여 토호를 타도하고 토지를 나누었으며 쏘베트정권을 건립했다. 1929년 가을, 그가 령도한 적위대는 홍군 제4군 제4종대에 편입되였고 그는 종대 특무대대 대대장을 맡았다. 그해 12월에 고전회의에 참가했다. 1930년 8월, 라화성은 장정현 하전진 채방촌에서 지방무장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 후에 홍군 후방병원 원장, 복건성군구 후방대행처 주임, 복건성쏘베트정부 부비서장 겸 무장동원부 부장을 력임했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 주력부대가 장정을 시작한후 라화성은 민서로 돌아가 장정승, 정자회, 담진림 등을 협조해 복건성과 광동성 변경지역에서 유격전쟁을 견지했다. 1935년 8월, 그는 서도에서 국민당에게 포위되여 불행하게 체포되였고 서금감옥에서 갖은 혹형을 당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며칠후 그는 장정으로 압송되여 가던 중에 위험에서 벗어나 상해를 거쳐 향항으로 갔다.

1937년 7월에 전민족 항일전쟁이 폭발한후 라화성은 명령을 받고 복건 서남에 가서 사업하였으며 신사군 제2지대 군수공급처 처장을 맡았다. 1939년 봄에 제2지대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고 그해 10월에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강남 적후로 가서 당도, 무호, 강녕의 지방사업을 겸해서 관리했으며 선후로 현, 구, 향 3급 항일민주정권과 중공기층조직을 건립하고 농민, 청년, 녀성들을 조직해 항일군중단체를 설립했다.

장기간의 간고한 전투생활로 피로가 쌓여 병이 생긴 라화성은 때때로 심장병이 도지였다. 진의동지는 여러번 그더러 후방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 했지만 그는 완곡히 거절하였으며 계속 병든 몸으로 항일전선사업을 견지했다.

1940년 2월 27일, 라화성은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해 구급치료를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강소 리양에서 사망했다. 그때 나이는 45살이였다. 진의는 추도대회에서 라화성을 ‘신사군의 우수한 지도간부’이고 ‘가장 실제적인 혁명인재’라고 높이 평가했다. 1955년 2월 라화성은 렬사로 추인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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