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제1로군 부관 조기섭

2019-06-14 14: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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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지병기공장은 수요에 따라 서로 3리 가량 사이둔 무기수리공장과 작탄공장으로 나누었다. 그 규모로 보아 연변 다른 현의 병기공장들보다 못지 않았다. 병기공장책임자는 박영순이고 주요 성원은 조기섭과 강위룡이였다. 근거지에 들어온 후의 이름은 말 그대로 ‘조포수’로 통했다.

작탄생산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책임자인 박포수가 워낙 야장공출신이고 화룡현 달라자구에 있을 때 지금의 당현위서기인 그때 구위 주요책임자인 김일환의 지시를 받고 1931년 가을 이후 금곡동쪽의 산속 수리바위에 가서 천연동굴을 리용하여 소리작탄, 고추작탄, 돌쪼박새작탄, 쇠쪼박작탄 등을 척척 만들었었다. 이것이 한때 적들을 벌벌 떨게 하였던 ‘연길작탄’인데 화약에다가 류황을 섞어서 철물로 사서 만들면 그만이였다.

문제는 쇠붙이 모으기와 화약구입이였다. 화룡현유격대에서는 전문일군을 두어 페철을 모아 병기공장에 보냈는데 근거지의 혁명군중들은 집에서 쓰는 보습이나 호미, 부뚜막의 수저까지도 남김없이 바치였다. 이에 크게 감동된 조포수와 그의 전우들은 륜번으로 밤낮 작탄을 만들어 전방부대에 보내였다.

작탄생산이 백열화되니 화약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를 위해 근거지의 당조직에서는 비밀리에 두만강대안의 조선 회령군과 무산군에 각기 속새골밀영과 가라지봉밀영을 설치하고 조봉익, 장금진, 김봉식 등 허다한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조선의 무산, 회령, 청진, 라진, 웅기 등지로부터 대량의 화약을 구입하여 들이였다.

허나 적들의 토벌이 시도때도 없이 계속되는데서 화약구입이 가끔 동강났다. 조포수 등은 모자라는 화약을 자체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모두가 제갈량이 되여 변소밑바닥의 흙과 부엌바닥의 흙 등에서 초산을 얻어냈다. 여기에 연소가 잘되는 담배대와 호박넝쿨재료에 류황, 사탕가루, 버드나무숯덩이 등을 섞으니 제법 화약내를 풍기였다.

1933년 봄에 병기공장은 새로 중공화룡현위 제5임 서기로 부임한 김일환으로부터 자체의 수류탄을 만들 새 과업을 맡았다. 조포수와 박포수 등은 거듭되는 고심끝에 작탄제조기술을 도입하여 끝내 수류탄을 만들어냈다. 현위서기는 친히 이 수류탄을 ‘화룡현수류탄’으로 명명하였는데 근거지에 달려들던 일제토벌대는 천수동 남산전투와 작살바위전투 그리고 숙영지기습에서 그 위력을 톡톡히 맛보았다. 조포수는 내심의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도 전방부대 대원들에 못지 않은 화룡현유격대의 어엿한 전사였으니 말이다.

피어린 싸움의 그 나날에 조포수와 그의 전우들에게는 남다른 고심이 따로있었다. 토벌대놈들은 경기와 중기를 비롯하여 박격포까지 동원한 현대적 무기장비인데 유격대원들은 놈들에게서 빼앗은 보총이나 권총, 싸창이 최상의 무기였다. 그나마 매 전투마다에서 소모량도 늘어가니 화승대나 타갈포 등을 대용할 때가 많았다. 탄알이라야 유격대원당 20발정도면 고작이였다.

(이런 현실을 타개할 수 없을가?)

조포수 등은 제각기 묘안을 내놓고 골몰하다가 위력높은 총들을 만들어 내기로 작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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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는가부다. 그들은 지혜를 모아 여러가지 총신과 격발기 등을 만들어내고 무기수리를 막힘없이 해제끼던데로부터 련발권총을 비롯하여 23식, 말레샹, 체크, 38식, 퉈퉁, 양포, 8련풍, 다태갈 등 10여 가지 종류의 총포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탄알깍지로 새탄알도 척척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련발권총을 만들던 이야기는 자못 인상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단발배기권총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였다. 헌데 련발배기장치는 도무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조포수와 동지들은 고심하다가는 모여앉고 머리를 맞대며 지혜를 짜냈으나 탄알을 련이어 올리미는 용수철에 가서 걸렸다. 철사는 마련되였는데 달구었다가 식히면 외곬으로 달아났다. 불에 달구고 띄워내는 열도와 시간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철사가 너무 굳어 부러지지 않으면 엿처럼 늘어져 쓸 수가 없었다.

벌써 얼마나 시험하였는지 모른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기만 했다. 그래도 그들은 맥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 붙어 끝내 련발배기권총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그때의 희열은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다. 그들이 알심들여 만들어낸 작탄과 총포는 그대로 전방부대사용에 넘어가 원쑤들을 무리로 쓰러눕히였다.

무기가 갱신되니 부대의 전투력은 날따라 높아갔다. 1933년 말에 이르러 화룡현유격대는 중대, 대대로부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제3퇀(후에 2퇀으로 됨)으로 개편되였다.

그런데 1933년 봄부터 어랑촌근거지에서 시작된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은 1934년 봄 이후에도 움츠러 들줄 몰랐다. 원쑤놈들과의 판가리싸움에서 쓰러진 유격대원들은 손을 꼽으리만치 얼마되지 않았으나 대내 ‘민생단’잡이는 부대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았다.

1933년 11월에 당현위서기 김일환이 아무 연고도 없이 철직되였다가 후에 ‘민생단’혐의로 피살되더니 부대의 통수로 불리우는 제2임 현위군사부장 김락영이 또 피살되였다. 제1임 퇀정위 차룡덕도 ‘민생단’으로 몰려 전사로 떨어지고 퇀과 중대의 책임자들이 련이어 피살되거나 ‘민생단’혐의로 배겨내지 못하고 근거지에서 도피하였다. 병기공장의 작식대원 박할머니의 아들도 전방부대에서 싸우다가  ‘민생단’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조포수와 그의 전우들의 심정은 납덩이처럼 무거워만졌다. 안타깝고 괴롭기만 한 나날이였다. 게다가 우세한 일본군과 위만군 련합토벌대놈들의 토벌이 날로 극심한데서 1934년 겨울에 그들은 주동적으로 어랑촌근거지를 비우고 새로 개척된 처창즈근거지로 전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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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과 그 주변들을 포괄한 태고연한 수림속에 자리잡았다. 가고가도 울창한 수풀이여서 지리상에서 우리에게 더없이 유리한 고장이였다. 늦가을에 벌써 병기공장의 책임자 박영순이 선발대로 들어가 근거지의 깊은 산속에 귀틀집을 짓고 온돌까지 놓은데서 병기공장의 조포수와 동지들은 인차 작업에 달라붙을수 있었다. 대형폭탄도 만들어내고 난도가 큰 기관총수리까지 해제끼니 그들은 진정 근거지를 지켜선 보이지 않는 중요한 전선이였다.

가슴아픈 것은 처창즈근거지에서 보다 험악하게 번져가는 반 ‘민생단’투쟁이다. 조포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1935년 봄과 여름의 토벌에 이어 일제와 위만군 련합토벌대는 이해 음력 10월에 세갈래로 나뉘여 처창즈근거지에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부대는 적들과 싸우다가 주동적으로 근거지에서 물러나 남만에로의 원정길에 올랐다. 조포수ㅡ금방 40대에 오른 이 사나이는 정든 병기공장을 떠나 전방부대에 편입되였다. 그의 배낭속에는 의연히 간단한 무기수리도구들이 들어있었다.

조기섭소속부대는 내두산근거지를 거쳐 무송땅에 진출하였다. 무송마안산에서 100여명의 ‘민생단’혐의자들이 최종적으로 해탈되여 부대에 편입되니 부대의 전투력은 전에 없이 강화되였다. 1936년 봄에 조기섭은 새로 개편된 항일련군 제2군 3사에 소속되였다가 이해 여름에 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6사로 번호를 바꾼 이 부대와 함께 무송일대에서의 일련의 전투에 뛰여들었다.

1936년 8월 17일에 조기섭은 무송현성진공전투에 참가한후 사장 김일성이 이끄는 6사주력부대를 따라 이달말에 무송현과 장백현의 경계를 이루는 되골령을 넘어 압록강연안의 장백지대로 진출하였다.

장백땅에서의 6사부대의 근거지는 희샤즈거우와 홍두산의 심산속에 설치된 밀영지들이였다. 백두산 최후방밀영으로 불리운 횡산밀영은 그중의 한 밀영지였다. 이곳 밀영은 되골령의 주봉으로 불리운 홍두산에서 동남방 약 16킬로메터 지점에 위치했는데 장백현의 횡산에서도 백두산쪽으로 16킬로메터가량 들어가 있다. 그만큼 6사부대의 가장 안전한 최후방기지로서 여기에는 간부료양소와 무기수리소, 재봉대실, 후방병원 등 후방기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장백땅에 이른후 조기섭은 6사후방부관으로 활동하면서 횡산밀영에 들어가 계속 무기수리소 일을 맡아보았다. 어랑촌근거지와 처창즈시절의 전우들인 박영순과 강위룡도 무기수리소의 일군들이였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전방에서 고장난 무기들을 수리하는것이였다.

조기섭은 천성이 친절하고 남을 도와주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한데서 동지들도 그와 어울리기를 즐기였으며 나이 지긋한 이 혁명가를 그제날의 조포수도 아니고 부관도 아닌 ‘조아바이’라고 허물없이 불렀다. 그때 2군 정위이며 중공동남만성위서기인 위증민도 이곳 횡산밀영에서 휴양하며 몸조리를 하고 있었는데 조기섭의 사람됨됨이를 몹씨 마음에 들어했다. 1로군사령부에는 바로 이와같은 충직한 동지가 수요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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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6월 30일 장백현 간삼봉전투 이후 항일련군 1로군 2군 6사는 사장 김일성의 인솔하에 림강, 몽강일대에로 활동지대를 옮기게 되였다. 이에 따라 6사의 최후방기지였던 횡산밀영도 력사적사명을 마치였다. 그후 조기섭은 위증민과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위증민의 신변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부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사령부 부관중책을 짊어졌다. 항일련군의 동지들인 림춘추, 강위룡, 려영준의 증실에 의하면 1로군 부사령 겸 정위인 위증민의 부관이였다고 한다.

위증민은 제1로군 2군 정위 겸 중공동남만성위 서기였다. 1936년 11월에 2군 군장 겸 1로군 부총사령 왕덕태가 희생된후 2군을 거느릴 중책이 위증민의 어깨에 놓이였다. 1938년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집안현 로령에서 1로군 고급군정간부회의가 열렸을 때 위증민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부사령 겸 정위로 정식 임명되였었다. 이해 7월에 제2차 로령회의가 있은 후 위증민은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집안, 화전, 금천, 돈화일대에서 활동하게 되였는데 주요한 밀영지는 화전현과 무송현의 경계에 위치한 송화강반의 두도류하밀영이였다. 조기섭소속 1로군사령부 후방기관도 이 밀영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린하 작은 회막골을 떠난지도 어언 6년 세월이 흘렀다. 항일무장투쟁의 그 나날에 그는 원지에 두고 온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기섭은 남만의 모지에서 세린하시절의 동지였던 김씨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김씨와 일가식솔의 근간형편을 자상히 묻고는 “내 그냥 공산당 사업을 잘 하고 있으니 살아있다는 것을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후 김씨는 과연 조기섭의 아들 조명남이를 만나 그의 아버지의 안부를 가만히 알리였다.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몰라 방황하던 명남이의 두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였다. 이 이야기를 조명남은 1982년 3월 2일에 가진 취재에서 필자에게 직접 들려 주었었다.

1938년 겨울에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가 1군의 소속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위증민이 이끄는 2군부대와 회사하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조기섭은 위증민부사령의 지시에 좇아 2군 4사의 동지들과 함께 밀영지를 정갈하게 꾸미며 식량구입에 정력적으로 뛰여들었다.

이해 음력 12월 23일(양력 2월 11일) 양정우와 그의 부대가 송화강반의 대라자(大拉子)에 이르렀다. 이튿날 두 부대는 회전재 지방에서 승리적으로 회사하였다. 양정우총사령과 위증민부사령의 포옹은 그렇게도 감동적이였다. 동지들은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조기섭도 기쁨의 시각을 함께 나누었다. 그는 부대의 식량조달과 주숙조건에 무척 신경을 모으며 뱅뱅 돌아쳤다.

이어 두도류하밀영에서 위증민이 친히 소집하고 지도한 1로군 당원훈련반이 열리였다. 당원훈련반의 후군책임을 짊어진 조기섭은 누구보다도 분망히 보내야 했다.

두도류하밀영에서의 당원훈련반을 마친 후 위증민은 2군의 소속부대를 인솔하여 화전, 무송, 안도, 돈화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초겨울에 잡아든 후에는 심장병과 위병이 심하게 도지여 대부대를 따라 움직일 수 없게 되였다. 밀영지에 돌아가 치료하는 기간 조기섭은 위부사령의 몸조리에 최선을 다하면서 힘자라는 대로 약품을 구하며 정성을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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