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구지방 항일후원회 책임자 리찬

2019-07-01 08: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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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항일력사 현지답사와 조사 차 연변으로 다녀온 후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항일력사 관련 급한 일로 다시 조용히 연변에 다녀와야 하였다. 그때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과 중반 당년 연길현 팔도구지방 항일유격대후원회 책임자였던 리찬 렬사가 활동했던 오늘의 연길시 조양천진 동성촌을 현지답사할 기회를 가졌다.

지난 1월 26일은 해빛찬란한 날씨였지만 매서운 추위는 여전했다. 이날 오전 나와 연길시환경보호국 리경호씨는 그의 자가용으로 연길시 조양천진 동성촌으로 향했다. 동성촌과 그 주변은 리경호씨로 말하면 할아버지 리찬 렬사가 일찍 항일후원활동을 하였던 잊을 수 없는 고장이였다. 도중에 우리는 지난 30년대 초반 중공동만특위 사무실 옛터로 되는 무산촌ㅡ 조양천진 태동 2대와 태동 과수대마을을 거치며 동만특위 관련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였다.

구수하벌을 이루는 태동촌을 지나고 근로촌을 지나니 길은 북쪽골안으로 굽어든다. 여기 골안 어구로부터 조양천진 동성촌 구내로서 어구마을의 옛 근로중학교 단층교사가 인상적으로 안겨들었다. 동성골 어구마을을 이루는 동성촌 1대와 2대 마을이 당년 리찬 렬사가 활동하였던 활동지의 하나였다.

동성 1대와 2대 마을을 지나니 4대와 5대 마을이 련달아 펼쳐졌다. 리경호씨는 1, 2대와 3, 4대 마을 사이 동쪽언덕 구간을 가리키며 저기가 할아버지 리찬 렬사가 묻힌 곳인데, 지금에 와서 어느 묘소가 딱히 할아버지 묘소인지 모른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뒤마을 동성 5대에 이르니 이곳이 할아버지가 생활하였던 생가마을이라고 한다.

동성촌 막바지 현지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오르면서 우리는 리경호씨 자가용으로 리경호씨 아버지인 리찬 렬사 맏아들 리룡규씨가 살던 옛집ㅡ조양천진 합성 2대의 집도 찾아보았다. 리경호씨의 고향집이였다. 이날 우리는 선후하여 태동촌과 근로촌, 동성촌, 합성촌을 거치면서 리경호씨가 수집한 리찬 렬사 자료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에 리찬 렬사 전기를 정리할 때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였다.

그렇게 리찬 전기는 다시 씌여지니 리찬(李璨, 1898ㅡ1936)은 1898년 음력 9월 4일에 지금의 룡정시 조양천진  동성 5대에서 태여났다. 리찬의 아버지는 리석희 (1865년 11월 30일생)로서 자식들에게 늘 북간도 연변으로 이주한 우리 광주 리씨는 고려말기의 이름난 시인 둔촌 리집의 후손이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일깨워주었다. 리집은 고려의 수절신(守节臣)이기도 하면서 그 시절의 정몽주, 리색 등 거유들과 교유한 어른으로서 그만큼 시를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이 같은 조성 리집은 리석희의 자랑거리로 될 만도 하였다. 리석희는 슬하에 아들 둘, 딸 둘을 두었으니 리찬이 큰아들이였다. 리찬의 손아래 동생 리령(1900년 10월 17일생)은 자라서 중의로 활동하면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불행하게도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하지만 그들 남매는 아버지 리찬에게서 들은 조상 리집의 이야기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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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찬은 동씨 처녀를 맞아들여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큰아들은 리룡규, 둘째는 리룡섭, 딸 하나는 리월선이라고 불렀다.

1931년 가을 이후 연길현 각지에는 당이 지도하는 적위대, 돌격대 등 무장이 조직되여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왕우구에서 돌격대(적위대)가, 옹구에서 옹구돌격대가 조직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니 1932년초 이후에는 팔도구, 왕우구, 고성자, 삼도만 등지에 항일유격대가 륙속 조직되였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리찬은 지방의 반일회와 농민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비밀리에 유격대 후원사업(1931년 이전 리찬의 항일활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을 벌리였다.

1932년 음력 5월의 일이였다. 어느날 밤, 신생한 연길현유격대는 구국군부대와의 협동작전하에 팔도구시내 습격전을 벌리였다. 이날 밤 아군은 동서남북으로 철사를 끊고 시가지로 쳐들어갔다. 적 경찰서와 자위단실은 아군의 중점타격대상이였다. 헌데 자위단실 보초가 아군을 발견하고 발총한 데서 싸움은 치렬하게 번져갔다.

이날 아군의 한갈래 대오는 팔도구 시가지에서 광산자본가 세집에 불을 지르고 상점 등에 쳐들어가 지까다비(신), 천, 식량 등 물건을 빼앗았다. 조직선을 통해 부름을 받은 리찬 등 마을골간들은 팔도구와 그 일대 100여명 군중들과 함께 로획한 물건들을 이고 지고 싣고 먼저 팔구유격구로 떠났다. 유격대는 뒤에 남아 불질하며 적 몇놈을 죽이고 동틀무렵 팔도구에서 퇴각하였다.

1932년 이해 초겨울의 어느날 연길현유격대는 지방을 수비할 병력만 남기고 재차 팔도구 시내 습격전을 벌리였다. 팔도구 7호촌에서 떠난 유격대는 밤 12시경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전화줄 끊기, 경찰서와 자위단실, 상점 습격하기, 자동차와 자본가들 집에 불지르기, 군중을 동하지 말라고 설복하기ㅡ유격대는 각기 분공대로 신속히 움직이였다.

유격대원들이 경찰서, 자위단 놈들과 싸우는 사이 리찬은 마을과 주변 마을의 반일회, 농민협회 회원들과 함께 밤으로 팔도구 시내 비밀지점에 모여들었다. 그들 수십명 반일회 농민협회 회원들은 지까다비, 광목천, 방수포, 재봉침 3대, 전지약 등 로획한 물품을 다시 산너머 팔구유격구로 운반하기에 드바빴다. 이날 유격대는 허다한 적들을 살상하고 자본가 몇집과 자동차 몇대를 태우고 새날 3시경에 유유히 귀로에 올랐다.

1932년 가을 이후  연변 4개 현의 산구들에는 모두가 항일유격근거지들이 정식으로 일어섰다. 혁명군중들은 우리 근거지를 ‘적구’라 부르고 적 통치구역을 ‘백구’라고 불렀다. 그런데 팔도구 등이 백구내의 우리 당조직과 혁명단체는 거의 다 파괴되여 말이 아니였다. 이런 형편에서 중공연길현위에서는 적 통치구역들인 현안의 팔도구, 로투구 등 각지에 한패의 정치공작원들을 들여보내였다. 현내 왕우구유격근거지에서 활동하던 녀성혁명가 김화자는 남편 윤병화와 같이 팔도구 지하당구위 부녀위원과 서기를 맡고 팔도구 금광으로 파견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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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는 팔도구 금광에 발을 붙이고 활동하는 한편 믿을 만한 동지를 팔도구일대 동성에 파견하여 리찬과 련락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팔도구지방 항일유격대 후원회가 조직되고 리찬이 그 회장책임을 맡아나섰다. 리찬은 동성과 석산, 근로, 태평 등지의 비밀회원들을 이끌어 항일유격대 후원에 뛰여들었다. 항일유격대 후원사업에서의 선차적인 과업은 지방 여러 마을의 농민협회 녀성들을 총동원하여 짚신을 삼게 하거나 식량과 의복, 채소 등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문제는 이런 후원물자를 어떻게 팔구유격구로 보내는가 하는 것이였다. 리찬은 이 문제를 가지고 윤병화가 파견한 동지와 토의한 다음 며칠간의 깊은 밤을 리용하여 비밀회원들과 함께 후원물자를 쥐도새도 모르게 팔도구 금광 동쪽 산너머 깊은 골 약속지점으로 숨겨놓았다. 그러면 팔구근거지에서 파견된 유격대원들이 약속지점에 대기하다가 후원물자를 지체없이 근거지로 져날랐다.

그러던 하루는 지하당구위 윤병화 서기가 파견한 동지로부터 련락이 왔다. 동성과 주변 마을의 청년들 가운데서 항일의식이 강한 청년들을 뽑아 유격대에 가입시키라는 통지였다.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일이였다. 리찬은 여러 마을마다의 골간회원들과 련락을 가지고 짧은 기간내에 10명쯤 청년들을 뽑아 근거지로 들여보내였다. 1934년 봄, 지하당구위 서기 윤병화와 부녀위원 김화자의 신분이 탄로되여 적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뒤에도 리찬은 내선을 통하여 팔도구유격근거지와의 련계를 끊지 않았다.

1934년 봄 이후 연길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으로 개편되고 점차 연길현내의 항일근거지들을 떠나 동만과 남만의 광활한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리찬은 계속 동북인민혁명군 소속 제1퇀과 손잡고 혁명군비밀후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뛰면서 인민혁명군을 물심 량면으로 받들어나섰다. 한편 학식이 풍부한 리찬은 풍수보는 일을 하면서 일본놈들에게 억울하게 붙잡힌 사람들을 대신하여 늘 시비를 따져 마을사람들의 존경과 믿음을 받았다.

때는 1936년, 연길1퇀 소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부대는 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되여 남만으로 진출하였다. 소부대는 의연히 지방과 부대를 이어주며 연길현내에서 활동하였다. 그때 조양천일대 동성이라는 이 골안마을에 김범룡이라는 일제놈들의 앞잡이가 있었는데 적들을 등에 업는 바람에 집생활이 꽤나 유족하였다. 이자는 친아들은 없었지만 딸 하나와 친동생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김범룡은 산속의 동지들ㅡ인민혁명군 전사들이 리찬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발견하고 팔도구경찰서에 밀고하였다. 팔도구경찰서 놈들이 리찬의 집에 들이닥쳐 집수색을 벌리니 집안의 천정에서 인민혁명군의 보총과 탄약 등이 나왔다. 그때 놈들에게 잡힌 사람들은 리찬 등 다섯 사람, 그들은 팔도구경찰서에 끌려가서 물매를 맞았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고추물먹이기 등 벼라별 고문을 다 들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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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리찬이 누구던가, 리찬은 적들의 악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결과 리찬은 인사불성으로 거의 죽게 되였다. 급해난 리찬의 안해는 도처에서 돈을 얻어서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결국 리찬은 구사일생으로 풀려났지만 몸이 제몸이 아니였다. 다행히 한의사로 활동하는 동생 리령의 극진한 치료 덕에 한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두달을 넘기지 못하였다. 다른 두 사람도 팔도구경찰서 악형여독에 시달리다가 선후하여 사망되였다.

리찬은 키가 그닥 크지는 않았지만 동그스름한 얼굴이였고 듬직하고 믿음직한 성품이여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리찬이 세상을 뜬 후 3일장도 아닌 15일장을 치렀다. 멀리 두만강 이남과 금강산에서까지 조문을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흰천에다 쓴 추모의 글이 너무 많아서 리찬의 안해는 그 흰천들을 깨끗이 씻어서 집안식구들에게 옷을 해 입히였다.

리찬이 사망될 때가 1936년, 나이로는 39세 되는 해였다. 1936년 그해 리찬의 큰아들 리룡규(1922년생)는 겨우 15살의 소년이였다. 이 소년은 자습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1944년에 연안 차씨 차정자(1926년생)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면 그 결혼도 쉽게 오지가 않았다. 어려서 면풍을 맞은 데서 리룡규는 눈과 입이 심하게 비뚤어져서 녀자들이 기겁할 정도였다. 따라서 결혼이 어려운 문제로 나섰다. 다행이라면 인기 좋은 아버지 리찬이 생전에 친구들이 많았나부다. 아버지 그 친구들이 나서서 연줄을 다니 리룡규는 순조로이 인생대사를 치를 수가 있었다.

이듬해 1945년이 밝아왔다. 이해 8월에 해방이 되자 그날의 밀고자 김범룡은 사람들에게 잡혀나왔다. 평소 힘장사녀인으로 불리던 리찬의 안해는 어디에선가 방치 같은 버드나무 옹지를 찾아들더니 그 밀고자를 투쟁하는 곳마다 찾아다니면서 마구 족쳐댔다. 그렇게 분노를 삭인다치고 작은 딸애는 몸이 너무 허약해서 시집도 가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뜨고말았다. 아버지 리찬의 너무 이른 사별 때문이였다.

1945년 해방 후 리찬의 큰아들 리룡규는 동성마을의 토지개혁 책임자의 일원으로 뛰다가 해방전쟁 때에는 담가대원으로 활약하게 되였다. 합성촌에 이사하고 촌에 합작사가 세워진 뒤 합성촌과 합성 2대의 회계사업을 오래동안 하였으며 1999년에 사망하였다.

리룡규의 안해 차정자는 광복이 되자 마을에서 꾸리는 야학교에 다니며 글을 익히였다. 동성촌에서 합성촌으로 온 다음에는 촌부련회 주임으로 활약, 근 30년간 합성촌 조산원 일을 하면서 농촌의 의료위생에 한생을 바치다가 1989년에 사망하였다.

리룡규는 안해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선후하여 합성촌의 민병련장을 하고 넷째아들은 조양천제1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 1964년생인 막내 리경호는 1988년 길림대학 환경과학학부를 졸업하고 줄곧 연길시환경보호국에서 근무중이고 2007년 7월에 연변대학 철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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