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현유격대대 첫 정치위원 박길
10월 박길은 또 일제침략군 약 1000명을 요정낸 화룡현 청산리 대첩에 참가한 뒤 홍범도반일부대를 따라 로씨야 연해주일도로 전이하였다.

2019-07-29 09:02:30

연길현유격대대 첫 정치위원이고 뛰여난 정치군사지휘관이였던 박길(朴吉, 1896-1933)은 1933년 12월 초순에 악질적인 ‘민생단’분자로 연길현 삼도만 동구에서 암살되였다고 지금까지 박길 전기와 관련 자료들에서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박길 렬사의 취재를 이어준 박일남, 김선화 부부.(2018년 4월 8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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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현유격대대 첫 정치위원이고 뛰여난 정치군사지휘관이였던 박길(朴吉, 1896-1933)은 1933년 12월 초순에 악질적인 ‘민생단’분자로 연길현 삼도만 동구에서 암살되였다고 지금까지 박길 전기와 관련 자료들에서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였다. 2018년 4월 9일, 박일남씨와의 인연으로 산동 청도에서 박길 렬사의 조카이고 박일남씨 아버지인 박은석씨(1949년 생)를 현지취재한 데 따르면 박길은 이른바 ‘민생단’으로 암살된 것이 아니라 탈출하였고, 1933년 12월에 소명월구에서 적들에게 체포된 후 구룡평에 끌려가 희생되였다고 한다.

충격적인 취재를 두고 필자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박은석씨와 박길 렬사와의 관계, 박길 관련 이모저모를 자상히 확인한 결과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박길 렬사의 사촌동생 박삼길이면 박은석씨의 아버지이고, 박은석씨는 물론 이들 박씨 4촌, 6촌들은 모두 박길이 안도 구룡평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데 의하면 박길 렬사는 1896년 12월 7일(음력)에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에서 반일지사 박증언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원명은 박윤형인데 박길이란 이름은 혁명활동에 참가한 후의 이름이다. 박길의 아버지 박증언은 별명이 호랑이로서 일찍 명천일대에서 의병운동에 종사하다가 1914년에 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 동성용에 이주하여 계속 반일투쟁에 몸을 담갔다고 전해진다.

잠간 박은석씨의 증언에 주의를 돌려보면 이들 박씨가족 관계가 보다 넓어진다. 며칠 전 2019년 7월 17일 저녁 위해 석도에서 청도에 살고 있는 박은석씨와 통화를 가지였다. 전화통화에 따르면 박길 렬사는 박은석씨의 큰아버지이다. 즉 박길은 박은석씨 아버지 사촌형님이다. 하기에 박길의 가족 흐름과 박은석씨 가족 흐름은 다름을 보이게 된다.

살펴보면 박길은 함북 명천군 아간면 출신이고 박은석씨 할아버지 박양기는 고향이 평안북도 문덕군으로 알려진다. 박양기 자식들은 모두 7남매로서 맏이 두길부터 차례로 우길, 삼길, 신애, 웅길, 신숙, 수길이다. 중국으로의 이주는 박길네처럼 1914년  연변의 동성용으로 이주가 아니고 1927년경에 그 시절의 연길현 소명월구에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에서 워낙 밭을 꽤나 다루는 집안이라 소명월구에 온 후에도 살림은 비교적 윤택한편이였다. 박은석씨는 박양기의 손자, 박양기의 셋째아들인 박삼길의 막내아들이였다. 남매로는 형님 박장석과 누님 박순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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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씨는 또 전화통화에서 일찍 부모님들한테서 들은 바로는 연길현 팔도 쪽 박씨집안 사람들중에는 혁명에 나선 사람들이 여럿이였다고 한다. 이는 박길과 그의 가족을 말하는데 조선에서 두만강 이북 연변으로의 이주시간과 이주고장이 다름을 잘 알려주기도 한다. 이제 본 전기의 마지막 부분에 알려지게 되지만 1933년 12월, 연길현 삼도만에서 이른바 ‘민생단’으로 몰리다가 탈출한 후 왜 자기 집이 아닌 소명월구 쪽으로 움직였는지를 먼저 알리기도 한다. 박길의 최후를 알려준 이들도 박길의 사촌형제 쪽 사람들이다.

1914년에 연길현 동성용으로 이주한 후 반일지사 박증언은 아들 박길을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성스런 위업에 내세우려고 태평촌사립학교에 입학시키였다. 워낙 가정에서 반일사상의 영향을 심히 받은 박길은 사립학교에서 조선 력사와 지리를 배우면서 애국사상이 날로 커갔다.

1919년에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전민족적인 3.1운동이 발발하였다. 그 영향하에서 연변의 룡정에서도 3월 13일 반일대시위가 벌어졌다. 그날 박길도 학교의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룡정으로 달려가 반일대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그는 아버지의 알선으로 왕청현 송림동 반일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사를 배웠다. 이때로부터 박길은 손에 총을 들고 일제를 항격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나섰다.

1920년 6월에 박길은 홍범도가 지휘한 유명한 봉오동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박길은 최주봉 중대의 소대장이였다. 그번 전투에서 박길은 소속 부대와 더불어 두만강 바로 이남의 조선측 강양동으로부터 대안의 중국측 간평을 거쳐 일제침략군을 후안산, 남봉오동을 지나 북봉오동골로 끌어들이는 임무를 성과적으로 해제껴 전투의 승리를 위해 뛰여난 공로를 세웠다. 그번 전투에서 일제침략군 100여명이 무리로 쓰러졌다. 그해 10월 박길은 또 일제침략군 약 1000명을 요정낸 화룡현 청산리대첩에 참가한 뒤 홍범도 반일부대를 따라 로씨야 연해주일대로 전이하였다.

로씨야땅에서 박길은 1921년 6월 ‘이만사변’ 즉 ‘자유시사변’에서 끌끌한 반일운동가들이 로씨야 적군(赤軍)에 의해 일대참변을 당한 비극을 겪었다. 그 참변에서 요행 살아난 박길은 그 뒤 불꽃튀는 그 시절 연해주ㅡ쏘련의 사회주의건설장에서 억척스레 일하면서 그번 참변의 아픔을 이겨냈다. 그는 볼쉐위크당원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맑스ㅡ레닌주의 혁명학설의 기본원리들을 알게 되였고 오직 사회주의, 공산주의 길만이 나라와 민족을 건지는 유일정확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박길로 말하면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에로의 일대 전변이였다.  연해주땅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으로 자기의 리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이였다. 그러나 박길은 일제놈들의 철제 아래 허덕이는 조선땅과 두만강 이북의 연변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1925년에 그는 드디여 연변행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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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20년대 중반의 박길은 벌써 일제놈들이 점찍은 ‘요시찰’ 대상이였다. 박길이 연변땅에 나타나자 적들은 그를 지목하고 감시하였지만 그 어떤 단서도 쥐지 못한채  감히 손을 쓰지는 못하였다. 박길은 놈들의 감시를 피해 가만히 할바령부근의 장재촌으로 이사한 뒤 그곳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단을 리용하여 로씨야 10월사회주의혁명에 대해서와 사회주의제도하에서 나라의 참된 주인으로 살아가는 쏘련인민들의 실정을 자상히 소개하였다.

박길은 연길현 팔도구 장재촌과 그 일대에서 선전사업과 조직사업을 까근히 짜고들면서 1927년 2월에 장재촌에다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지방조직을 설립하였다. 이 조직의 정치강령은 맑스, 레닌의 혁명학설을 따르고 일제침략자들을 조선과 중국에서 몰아내며 무산대중의 철저한 해방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였다. 박길은 이 지방조직의 책임자로 활약하면서 1928년 4월에 룡정에 가서 고려공산청년회 동만총회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미구하여 그는 조공당 엠엘파에도 가입하였다.

박길의 활동은 인차 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지하공작원들을 통하여 적들이 박길을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를 탐지한 조직에서는 박길이를 즉각 피신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28년 가을에 박길은 조직의 배려로 온 가정을 데리고 무사히 연길현 도목구(지금의 안도현 석문진 경내)로 이사하였다.

박길은 집일을 안해에게 부탁하고 도목구와 차조구 일대에 혁명의 불씨를 뿌려갔다. 그의 영향하에서 둘째동생 박윤범, 셋째동생 박윤룡, 녀동생 박성녀도 모두 혁명의 길에 나섰다. 이어 박길은 1928년 가을부터 1930년 여름까지 기간에 활동무대를 할바령, 돈화, 액목, 관지 등 지구로 넓히면서 이 지구들에 농민협회와 반제동맹 등 조직을 널리 일떠세웠다. 그후 그는 조직의 지시로 1930년 8.1길돈폭동에 참가하였고 이해 9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에 일본침략자들은 9.18 사변을 일으키고 공공연히 무력으로 동북을 강점하였다.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즉각 무장으로 일제침략자들을 항격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해 12월에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연길현 옹성라자에서 동만 각 현 당, 단 조직 열성자회의를 소집하고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며 유격전을 전개할 등 전문결정을 지었다. 1932년초에 중공연길현위에서는 당, 단 열성자 회의를 열고 상급당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며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라고 호소하였다. 회의 후 현 안의 의란구, 로투구, 팔도구, 해란구 등지에서는 분분히 적위대, 돌격대, 유격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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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란구 남양동의 청년들 활동이 그 뚜렷한 실례로 된다. 그들은 매일 모여 계책을 짜다가 집사대와 호위병의 총을 빼앗자는 데로 입을 모았다. 나중엔 원시무장부터 갖추자는 결론이 나왔으니 대장쟁이인 리태순의 아버지 리대렬이 적극 받들어주었다. 리대렬은 자기가 쓰려고 두었던 석명정 70여개를 가져다가 멋진 단도와 칼 등을 쳐주었다.

1932년 봄에 남양동에는 무기탈취대 한개 중대가 조직되고 구산과 토기막골에도 각기 한개 중대씩 나왔다. 그럴 때 박길은 1932년초에 중공연길현위 군사부의 지시에 좇아 옹구돌격대를 조직하고 대장책임을 짊어졌다. 그는 돌격대원들을 이끌고 장흥촌의 악질지주 리학순의 집을 습격하여 ‘얜주총’ 2자루를 빼앗아냈다. 그후 또 복흥촌에 주둔하고 있는 민국 보안단의 보총 2자루를 로획하였다.

1932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지방의 돌격대와 적위대, 유격대를 토대로 왕우구, 로투구 등 지방유격대가 조직되였다. 이에 따라 중공연길현위에서는 이해 1932년 여름중으로 현내 각지에 조직된 지방유격대를 토대로 연길현유격대를 조직하고 박길을 유격대대장으로 위임하였다. 박길은 유격대를 인솔하여 현내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적들을 련속 타격하였다.

1932년 음력 5월, 박길은 구국군부대와의 협동작전으로 팔도구시내습격전을 조직하였다. 이날 밤 아군은 동서남북으로 철사를 끊고 시가지로 돌입하였다. 경찰서와 자위단실은 중점 타격대상이였다. 헌데 자위단실보초가 아군을 발견하고 발총한 데서 싸움은 치렬하게 번져갔다. 이날 한갈래 대오는 광산자본가 세집에 불을 지르고 상점 등을 충격하여 지까다비(신), 천, 식량 등 숱한 물건을 빼앗았다. 팔도구의 군중 100여명이 동원되여 로획한 물건들을 이고 지고 싣고 먼저 유격구로 떠났다. 유격대는 뒤에 남아 불질하며 적 몇 놈을 죽이고 동이 틀무렵 팔도구에서 퇴각하였다.

이해 여름 현유격대는 일제놈들이 자위단 20여명의 호위하에 국자가로부터 백초구로 물품을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현유격대는 박길 등의 포치하에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20여대 우차에 실은 밀가루, 통졸임, 사탕류, 쌀 등 전부를 로획하였다. 일본놈들과 자위단놈들은 산지사방으로 도망하기에 바빴다. 유격대는 민회 소와 군중의 소를 돌려주고 그날 운반비를 계산하여주었다. 그날 일본군토벌대가 출동하였으나 유격대의 매복진에 걸려 허다한 살상만 내였다.

같은 해 가을 이후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군대를 집결하여 유격구를 대거진공할 때 연길현유격대와 지방유격대, 적위대는 박길 등의 포치와 지도하에서 삼도만 대동구에서 400여명의 적 ‘토벌대’와 밤낮 이틀 동안 싸워 적 90여명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리였다

왕우구 일대로 들이닥친 일본군과 위만군도 많은 살상자를 냈다. 연길현유격대는 화련리, 왕우구, 석인구 등지에서 적 ‘토벌대’와 자위단놈들을 련속 타격하여 적들의 거듭되는 ‘토벌’을 물리치고 유격구와 혁명군중을 보위하였으며 항일유격근거지 창설에서의 걸림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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