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연길현유격대대 첫 정치위원
그는 동지들과 더불어 유격대대를 전투대, 선전대, 공작대로 꾸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연길현 유격대대는 연변 4개현 가운데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대오로 신속히 성장하였다.

2019-08-05 09:03:15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48

대주산 산정 아래서 박은석 부자와 함께.(2018년 4월 8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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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여름에 중공연길현위에서는 왕덕태를 삼도만산림대ㅡ장강호(长江号)에 파견하여 병사사업에 나서게 하였다. 년말에 이르러 왕덕태는 산림대에서 20여명을 이끌고 연길현유격대에 참가하였다. 1933년 1월에는 김순덕이 거느린 해란구유격대 30여명이 왕우구로 전이하여 연길현유격대의 력량은 보다 커졌다. 이에 따라 박길 등은 현위의 지도하에 고성촌으로 불리우는 북동의 북쪽골(北沟)에 병기공장을 세우고 권총과 보총을 수리하는 한편 원시무기를 만들어냈다.

1932년 가을에 중공동만특 위서기 동장영을 비롯한 중공동만특위와 중공연길현위가 조양천 일대로부터 왕우구 고성촌으로 전이하고 연길현 해란구(海兰区)와 화련리(花莲里) 등지의 혁명군중들도 왕우구로 전이하면서 왕우구의 혁명군중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를 수립할 여러 면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1932년 10월말에 박길은 유격대의 한 대오를 이끌어 왕우구에 가 구쏘베트정부설립대회의 보위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연길현 도목구에서 떠난 유격대는 삼도만을 거쳐 왕우구로 진군하게 되였는데 도중에 식량이 떨어져 사정이 어렵게 되였다. 박길은 대오를 엄격히 단속하여 연도에서 민가의 쌀 한알, 배추 한포기도 다치지 못하게 하였다.

유격대는 산짐승을 사냥하거나 산열매로 끼니를 에때웠다. 백성들은 감동되여 감자를 거둬 유격대에 가져왔지만 박길은 받지 않았다. 백성들이 돌아간 후 박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로고대중을 위해 싸우는 대오입니다. 우리 힘의 원천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지금 로고대중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가 어찌 그들의 식량을 소모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우리를 자기 사람으로 알고 믿는 것을 보노라니 나는 온몸에 힘이 솟구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지들!”

박길의 의미심장한 말은 대원들의 마음을 울리였다. 그들은 주린 배를 달래며 행군길을 다그쳤다.

1932년 11월 2일에 중공동만특위와 연길현위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왕우구 중촌에서 왕우구구(王隅沟区) 제1차 쏘베트대표대회가 열리면서 북동, 남동, 왕우구 등 3개 촌 쏘베트 대표와 각지 대표 도합 600여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대회에서는 민주선거로 왕우구 쏘베트정부를 세우고 리상묵을 주석으로 선거하였다. 왕우구구(王隅沟区)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의 정식 수립을 의미한다. 유격대원들과 더불어 왕우구구 제1차 쏘베트대표대회를 지켜선 박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후 왕우구 쏘베트정부는 왕우구구(王隅区沟)인민혁명정부로 개칭되였다. 인민혁명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로농련맹을 토대로 각계각층 반일분자를 모두 망라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수가 있었다. 왕우구의 항일투쟁은 새로운 고조를 이루었다. 연길현유격대는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대주산 산정에서의 박일남 김선화 부부.(2018년 4월 8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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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에 연길현항일유격대는 13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왕우구 상촌에서 대대로 조직되였다. 왕우구유격중대 등 지방유격대는 현유격대대에 귀속되고 박길이 대대 첫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다. 대대 산하에 4개 중대를 두고 제1중대를 삼도만 능지영(能芝营)에, 제2중대를 부암(富岩)에, 제3, 제4 중대는 왕우구 북동과 남동에 주둔시키였다.

앞에서 스쳐 언급했다싶이 박길은 일찍 쏘베트 로씨야에서 5년간 생활하면서 홍군전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홍군의 정치군사경험을 받아들인 사람이였다. 그는 동지들과 더불어 유격대대를 항일유격전에 적응되는 전투대, 선전대, 공작대로 꾸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하기에 연길현유격대대는 연변 4개 현 가운데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대오로 신속히 성장하였다.

이해 1933년 초겨울의 어느 날, 연길현유격대는 박길 등의 지휘하에 지방을 수비할 병력만 남기고 재차 팔도구시내 습격전을 벌리였다. 팔도구 7호촌에서 떠난 유격대는 밤 12시경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전화줄 끊기, 경찰서와 자위단실, 상점 습격하기, 자동차와 자본가들 집에 불 지르기, 군중을 동하지 말라고 설복하기-유격대는 각기 분공 대로 신속히 움직이였다. 유격대들이 놈들과 싸우는 사이 짐군들은 지까다비, 광목천, 방수포, 재봉침 3대, 전지약 등 로획한 물품을 운반하기에 드바빴다. 이날 유격대는 허다한 적들을 살상하고 자본가 몇집과 자동차 몇대를 태우고 새날 3시경에 유유히 귀로에 올랐다.

박길은 또 항일구국군을 쟁취하는 사업에도 온 힘을 기울이였다. 중국어에 능한 박길은 직접 삼도만구국군에 들어가서 반일병사 쟁취 사업을 벌려 많은 무기와 탄약을 얻어왔다. 또 여러가지 사회관계를 리용하여 삼도만, 안도현 일대의 삼림대, 홍창회, 대도회 등 부대에 유능한 유격대원들을 파견하여 사업하게 하였다.

1933년초, 일제침략자들은 왜놈, 경찰, 위만군, 자위단 등 6000여명의 병력을 출동하고 비행기, 대포까지 투입하여 동만특위 소재지인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중심으로 동만 각 항일근거지들에 대해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일제놈들은 2000여명의 병력으로 연길현의 왕우구, 삼도만, 석인구 등 항일근거지를 대대적으로 진공하였다.

음력 1월 20일경에  적‘토벌대’ 1000여명이 삼도만의 능지영에 기여들었다. 그때 능지영엔 1개 중대의 정도밖에 안되는 유격대 뿐이였으나 박길 등의 교양과 지도하에 시련을 이겨낸 항일유격대는 온종일 적들을 끌고 다니며 싸운 끝에 적 70여명을 살상하고 적들을 패주시켰다. 근거지의 부녀들은 밥을 해가지고 진지에 가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승리를 경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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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은 연길현유격대대 대대장들이였던 박동근, 림승규 등과 함께 적들의 대거 진공에 맞서 유인전, 저격전, 습격전, 매복전의 유격전술로 도처에서 적들을 골탕먹이였다. 때론 대담히 적후에 들어가 적후 교란작전을 벌림으로써 적들을 쩔쩔 매게 하였다. 적들은 연길현 여러 항일유격근거지들에 대한 제1차 대토벌에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했다. 이런 전과들엔 정위로서의 박길의 알찬 노력이 톡톡히 슴배여있었다.

한편으로 박길 등은 각지 자위단을 타격하여 분화와해공작을 빨리고저 유격대원들 가운데서 조동원, 정응수 등 몇몇 대원을 뽑아 ‘지하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이 지하공작대는 적 통치구역의 ‘집단부락’들과 현내 각지에 출몰하면서 당의 반통일전선정책을 널리 선전하는 한편 1933년 봄부터 가을 사이만도 선후하여 배초구부근의 자위단실, 연집자위단실, 천보산자위단실을 습격하여 악질적인 놈들을 족치고 많은 무장을 탈취하였으며 ‘집단부락’ 건설을 지연시키고 통일전선의 위력을 넓은 범위에서 과시하였다.

1933년 겨울부터 이듬해초까지 일제는 연변의 여러 항일유격근거지들에 대한 제2차 대‘토벌’을 발동하였다. 적들은 ‘춘기토벌’과는 달리 첫시작부터 근거지들을 불바다로 만들며 도처에서 근거지 인민들을 야만적으로 살륙하였지만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우리 항일유격대는 만만치 않았다.

1933년 이해 겨울, 연길현유격대대는 박길 등의 지도하에 석인구, 왕우구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장재촌, 7호촌, 왕팔목자 등지에서 20여일간에 적 300여명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리였다. 연길현유격대대는 무장이 보잘것없고 탄알이 결핍한 형편에서도 300여명의 병력으로 또 삼도만 등지에서 근 2000명의 적과 14일간에 23차의 격전을 벌려 적‘토벌대’ 150여명을 소멸하고 적들을 끝내 근거지에서 몰아냈다.

1933년 이해 박길은 계속 유격대대를 이끌어 연길현 팔도구, 의란구, 삼도만 등지를 넘나들며 눈부신 유격활동을 벌려갔다. 이러할 때 연길현 항일근거지들에도 반‘민생단’투쟁이란 터무니없는 회오리바람이 세차게 불어치기 시작하였다. 1933년말에 박길도 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려들었다. 그가 ‘민생단’이란 이 억울한 죄명을 단단히 부인해나선 데서 악질적인 ‘민생단’분자란 루명이 더해졌다.

때는 1933년 12월 초순이고 지점은 삼도만 동구이다. 박길은 생각할수록 억이 막히였다. 박길은 죽어서는 자기의 청백함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결연히 탈출 쪽으로 기울었다. 어느 날 밤에 그는 끝내 탈출에 성공하면서 삼도만 동구를 벗어났다. 그는 야산을 넘고 넘으며 가족이 사는 팔도구 쪽이 아닌 소명월구 쪽으로 움직이였다. 먼저 사촌들이 사는 소명월구에 들러 옷가지와 먹거리를 해결한다음 다시 보자고 하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소명월구(후에 풍산으로 불리움)이다. 그때의 소명월구는 이미 집단부락화 되여 높은 토성이 가로막히였다. 토성을 넘어 집단부락 안으로 들어가니 그의 행동이 불행히도 집단부락을 지켜선 무장자위단 놈들에게 알려지고 일제놈들에게 알려졌다. 박길은 날렵하게 토성을 넘어 소명월구에서 5~6리 잘되는 달라자 쪽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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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박길은 사촌동생인 박은석의 아버지와 더불어 주먹치기가 날쌔기로 소문이 높았다. 그들 둘이 나간다하면 안도판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웬간한 담장도 훌쩍 넘을 수 있는 재주를 가지여 소명월구 집단부락 토성은 넘어섰지만 달라자 쪽에서 끝내 우세한 적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자들은 박길의 뜻을 꺾으려고 광분하다가 박길을 룡정의 간도 일본총령사관으로 넘기였다. 그래도 박길은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았다.

적들은 박길을 다시 명월구 구룡평 형장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숱한 백성들을 끌어다가 보게 하면서 대일본제국과 적으로 지내면 이런 결과를 본다며 한바탕 훈시하고는 박길을 즉각 사형에 처하였다. 1933년 12월 어느 날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달 후.

박길의 안해는 매서운 겨울추위를 마다하고 매일 남편을 찾아다니다가 명월구 구룡평 형장어구에서 남편의 유체를 찾아냈다. 구룡평이란 연길 쪽으로 뻗어온 신작로가 명월구에 이르러 철길 밑으로 넘어서는 바로 그곳 구간이다. 그때까지도 박길의 유체는 언 상태였다는데 워낙 이발이 금이발인 데서 남편 박길을 인차 확인할 수가 있었다.

박길은 죽어서 그렇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고 오늘의 안도현성 바로 동북쪽을 이룬 토월산 산기슭에 묻히였다. 지금에 와서 박길의 묘소를 아는 이가 없어 유감이기만 하다. 박길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1945년 해방 직후인가 조선으로 나갔다. 조선의 첫패의 비행사로 활동하다가 조선전쟁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의 영웅으로 전해진다. 딸 하나는 양딸이라고 하는데 언제인가 역시 조선으로 나갔고 해방 후 박길의 안해가 조선으로 나가 만나보았다고 한다.

새로 알려지는 소식은 박길 렬사의 체포와 희생은 같은 조직선이였던 한 변절자의 밀고와 관계된다는 점이다. 1933년 12월 박길이 명월구 구룡평에서 희생될 때 박은석씨 아버지 박삼길은 12세의 애어린 소년이였다. 이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면서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자 그 시절 연길현별동대에 가입하고 토비숙청에도 뛰여든다.

박삼길씨는 그 뒤 사평전역에 나섰다가 병으로 후방에 돌아왔다. 1948년 그해 룡정의 소속 특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선에 내보내는 부대일을 맡아나섰다. 그 와중에 그는 사촌형 박길의 밀고자 김인수인가 찾아냈고 관련 부문에 넘기여 인민의 재판을 받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박길 렬사가 희생되여 반세기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당조직에서는 당에 끝없이 충직하였던 항일전사 박길에게 씌워졌던 ‘민생단’이란 이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 다시 30여년이 지났다. 2018년 4월에 이르러 당년 박길은 비록 ‘민생단’으로 몰렸다가 탈출하였고 적들에게 잡히여 장렬히 희생되였음이 비로소 알려졌다. 가족관계도 2019년 7월 17일 박은석씨와의 전화통화에서 보다 잘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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