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6사 7퇀 정위 리동걸
대덕수, 소덕수 전투가 벌어진 이해 1936년 9월부터 11월까지 기간 리동걸 소속 2군 6사는 장백현의 반절구, 13도구, 20도구, 2도강 등지에서 련속 적들을 타격하여 압록강연안일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2019-08-19 09:00:31

연변력사연구소에서 주최한 중국조선족사학회 력사연구가들이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를 답사. (1991.5.29. 현지촬영 )

1

1939년 5월 18일, 리동걸 소속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주력부대는 장백의 5호물동으로 감쪽같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으로 진군하였다. 압록강 5호물동가와 주변에는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여나 반기고 있었다. 2방면군의 녀전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할 때 리동걸 등 남자들도 환성을 지르며 진달래가를 떠날 줄 몰랐다.

“와아, 진달래, 겨레의 진달래 !”

리동걸은 해방된 강산의 진붉은 진달래를 보듯 온몸에 샘솟는 힘을 느끼였다. 두만강을 넘어섰다가 자라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고 손에 총을 잡고 일제놈들과의 피어린 혈전에 나선 지난날이 생생히 떠올랐다.

리동걸(1909ㅡ1945)은 일명 김준으로도 통한다. 함경북도 웅기군 송평동 출신이다. 6살 되던 해이면 1915년, 이해 철부지 리동걸은 살길을 찾아나선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 화룡현 덕신사 룡암동에 들어섰다. 룡암동에서 그는 구학서당에 다니며 글을 익히였다. 그 후 그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면서 조기 반일지사들의 영향하에 혁명의 도리를 깨치기 시작하였다.

1930년과 1931년, 1932년 사이 리동걸은 지방에서 농민협회와 반제동맹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30년 가을 추수폭동과 1931년 가을과 이듬해 봄의 추수춘황투쟁, 주구청산투쟁에 뛰여들었다. 1933년 6월 이후에는 매부 최승섭의 도움으로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온 련락원을 만나 어랑촌근거지로 진출하게 되였다. 어랑촌근거지에서 활동하는 기간 리동걸은 조직의 파견으로 선후 수차 룡암동에 가서 지하조직 복구사업에 나섰다 하지만 이 시기 리동걸의 활동을 알리는 자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리동걸은 화룡현유격대대 전사로 활동하면서 수차의 근거지보위전에서 용맹을 떨치였다. 1934년 봄 화룡현유격대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화룡퇀으로 개편된 후 리동걸은 이해 가을 소속부대를 따라 그 시절 안도현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하였다가 다시 안도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하여 활동함을 보인다. 제2군 독립사 화룡퇀은 1936년 봄에 무송현 마안산에서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3사로 개편되였다.

1936년 새봄에 항일련군 제2군 3사는 무송현 마안산에서의 확장을 거쳐 신속히 장대해졌다. 이해 김동걸은 3사 부대를 따라 위만군을 습격하는 무송현 만강전투에 뛰여들었다. 전투 후 부대는 무대를 꾸미고 연예공연을 하였는데 리동걸 등 화룡적 전사들이 무대에 올라 <아리랑> 우리 민요 가락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왕청적 전사들이 무대에 올라가 <도라지>를 건들어지게 부르며 성수난 춤을 이어갈 때 훈춘적 전사들은 무대에서 흥이 난 로씨야춤인 단스를 췄다.


1990년 8월, 두만강 상류 무포숙영지에 이르러.(현지촬영)

2

이해 5월과 6월에는 리동걸 소속 3사 부대는 무송현 동강부근에서 1군 2사 부대와 함께 동강툰 위만군병영 기습전, 무송현 서강전투, 림강현 서남차습격전을 벌리였다. 6월 6일 시난차습격전ㅡ위만경찰분서 습격전은 전후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8자루의 총도 고스란히 아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짧디짧은 두달 동안에 2군 3사 부대는 무송의 만강, 동강, 서강과 림강의 서남차 등지에 신출귀몰하면서 적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안기였다. 전투의 세례 속에서 3사 부대도 크게 늘어나 원래의 7퇀, 8퇀외에 9퇀과 10퇀이 새로 편성되였다. 이 2개 퇀의 주체는 항일을 원하는 원 구국군과 산림대의 장병들로 이루어졌다.

그해 1936년 7월에 이르러 리동걸 소속 제3사는 금천현 ‘하리회의’결정에 의해 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로 개편되였다. 리동걸은 6사 7퇀의 모 련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해 8월 17일, 항일련군 2군 6사는 여러 항일부대들과 더불어 무송현성진공전투를 치른 후 동강을 거쳐 무송현의 최남단 마을ㅡ만강에 다시 들어섰다. 6사 부대는 두번째로 만강에 들어서며 무송현성에서 69킬로메터나 떨어진 이곳 조선화전민들에게 연극 《혈해》, 즉 피바다를 선물하였다.

만강에 다시 머무른 2군 6사는 마을사람들과 작별하고 다시 만강 물줄기를 거슬러오르며 천고의 수림을 헤치였다. 되골령을 넘으니 조선의 국경지대인 장백땅이다. 이해 5월에 김재수, 김정필 등과 함께 선발대의 책임자로 장백에 파견되여갔다가 돌아온 김주현이 길잡이로 나섰다. 김주현의 안내하에 리동걸 소속부대는 장백땅에 진출한 후 9월 1일, 장백땅에서의 첫 멋진 싸움ㅡ대덕수전투를 벌리였다.

대덕수전투는 말 그대로 장백사람들에게 조선인민혁명군으로도 알려진 2군 6사가 장백땅에 나타났음을 만방에 알리는 첫 총성이였다. 이어 소덕수전투를 벌리여 일제놈들을 무리로 쓰러눕히였다. 련속되는 전투에서 리동걸은 용감히 싸워나갔다. 대덕수, 소덕수 전투가 벌어진 이해 1936년 9월부터 11월까지 기간 리동걸 소속 2군6사는 장백현의 반절구, 13도구, 20도구, 2도강 등지에서 련속 적들을 타격하며 압록강 연안일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 후 2군 6사부대는 되골령의 희샤즈거우밀영으로 유유히 움직이였다.

대덕수, 소덕수 전투 이후 6사 사령부에서는 리동학을 책임자로 하는 소부대를 파견하여 장백현 땅을 훑으며 인재발굴에 전력하게 하였다. 1937년 봄과 가을 사이에는 선후하여 권영벽, 김주현, 김평, 김재수, 김정숙, 박록금, 김정필, 마동희, 지태환 등 30여명의 동지들을 정치공작원으로 압록강 국경지대와 조선국내 깊이에까지 파견하였다. 이 기간 리동걸은 동지들과 함께 6사사령부를 목숨으로 지켜 나섰다.


1990년 8월, 무산지구전투ㅡ대홍단전투 현지답사길에 올라.(현지촬영)

3

리제순, 박록금, 리동걸 등 동지들의 피타는 노력으로 부대원호 사업은 장백현 전지역에 뿌리를 박았다. 1937년 초봄까지 장백현의 거의 모든 중심마을들에 지하당조직들이 뿌리 박았다. 이어 권영벽을 서기로 하고 리제순을 부서기로 하는 중공장백현위가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1937년 3월, 무송현 서강에서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정간부회의가 열리면서 대부대에 의한 조선국내진출작전방침이 검토되였다. 이 작전방침에 따라 리동걸 소속 2군 6사는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에서 일제히 새 여름군복을 갈아입고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이튿날 구시골 등판에 이르렀다. 원정부대는 다시 구시물동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지체없이 조선 대안의 곤장덕에 이르렀고, 이날 6월 4일 밤에 보천보진공전투를 승리적으로 벌리였다.

1937년 이 한해 리동걸 소속 우리 항일련군 6사부대는 보천보진공전투, 간삼봉전투 등 거듭되는 전투를 벌리며 적들과 싸웠다. 일제 침략군은 장백 등지에서 활동하는 항일련군 부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한해내내 ‘토벌’작전을 벌렸으나 종당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해 겨울 6사부대는 몽강현 마당거우밀영에서 군정학습을 하다가 항일련군부대들과 협동작전하여 1938년 봄부터 압록강연안에서 춘기공세를 벌이였다.

리동걸 소속 6사는 이해 4월 한달기간에만 해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장백현과 림강현 일대에서 가재수전투, 륙도구전투, 쌍산자전투 등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1938년 이해도 압록강연안에서 적들과 무수히 싸워이긴 휘황한 전투의 한해였다. 리동걸은 거듭되는 전투의 시련 속에서 6사 7퇀 정위로 부임하였다.

치렬한 싸움 속에서 무더운 여름이 다닥쳤다. 1938년 6월 29일, 제1군 제1사 사장 정빈이 엄혹한 환경에 견디지 못하고 반변한 데서 1사부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정빈의 반변에 대비하여 이해 7월 양정우 장군은 집안현 로령에서 1로군의 긴급간부회의(즉 제2차로령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또 제1로군의 1군, 2군 번호를 취소하고 총사령부 지도하에 1개 경위려와 3개방면군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회의결정에 의해 리동걸 소속 6사가 제2방면군으로, 4사, 5사가 제3방면군으로 개편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새로 개편된 제2방면군은 산하에 2개퇀(7퇀과 8퇀)과 1개 경위중대를 두었는데 2방면군의 총병력은 350명에 달하였다. 리동걸은 의연히 7퇀 정위였다. 1938년 12월초에 새로 개편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남패자회의 결의에 따라 또다시 압록강국경지대에로의 행군길에 올랐다.

1938년 겨울을 잡으면서 일제침력자들은 항일련군 ‘토벌’에 더욱 미쳐 날뛰였다. 제2방면군의 주력부대가 몽강현 남패자를 떠나 장백으로의 원정길에 오른 낌새를 챈 후에는 아예 산에서 먹고 자면서 집요하게 뒤를 물었다. 부대는 매일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앞뒤로 달려드는 적들과 싸워야 했는데 어떤 날에는 몇차례씩 전투를 벌려야만 했다. 적들의 지꿎은 추격과 포위 속에서 식량마저 떨어지니 부상자와 허약자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부대의 행동과 안전에 극히 불리하였다.


4

그해 겨울따라 눈이 푸짐히 내려 한발자국을 내디디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1939년 정초에 부대는 림강땅을 벗어나 장백현 7도구 치기에 들어섰다. 그동안 무수한 전투를 거듭하다 보니 부대는 지칠 대로 지치였다. 이럴 때 적들은 1만여명의 병력을 끌어모아 7도구일대를 에워쌌다.

사태는 삽시에 험악하게 번져갔다. 2방면군 지휘부에서는 즉시 지휘관들의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부대를 세개 방향으로 분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사령부는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를 데리고 청봉밀영을 거쳐 가재수방향으로 움직이고 7퇀은 퇀장 오중흡의 지휘하에 적들을 끌고 압록강 상류 쪽으로 나아가며 8퇀은 무송현 동강일대에 진출하게 되였다.

부상자와 허약자 등 20여명은 7퇀 정위 리동걸이 책임지고 후방기지인 장백의 청봉밀영에 가서 한달가량 휴식하면서 몸조리를 하게 되였다. 2방면군 총지휘는 리동걸 등 출발을 앞두고 녀전사들인 김정숙, 김혜순, 김선 등 셋을 작식대원으로 파견하면서 이들의 화식을 부탁하였다.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비상미로 남은 약간한 식량과 소금을 몽땅 털어서 건네주었다.

한동안의 행군 끝에 청봉밀영에 이르니 후방책임일군 엄광호가 벌써 밀영의 동지들을 데리고 마중나와있었다. 밀영에서의 리동걸의 책임은 7퇀 후방정위였다. 밀영의 생활은 단조롭기만 했다. 부대를 떠난 허전함은 이윽토록 가셔질 줄 몰랐다. 다행히 밀영에는 전에 감추어둔 조이와 보리, 감자, 무우 등이 마련되여있기에 하루 한끼니만은 때울 수 있었다. 했으나 하루 종일 무료한 시간을 보내자니 배는 고팠지만 밖에 나가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밀영에서는 남패자회의방침을 둘러싸고 정치학습토론을 벌리였다. 엄광호는 토론에서 로씨야혁명의 경험과 항일련군의 열하원정실패, 장백현 지하혁명조직이 파괴된 ‘혜산사건’ 등을 실례로 들면서 어떤 혁명이나를 막론하고 고조기와 저조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혁명의 저조기에는 ‘일보전진, 이보퇴각‘의 교훈을 명심하고 적극적인 공세와 정면대결을 떠나 유리한 기회가 이루어질 때까지 퇴각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제2방면군 사령부의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녀전사들은 선뜻 나서서 퇴각하는 것만이 상책이라는 엄광호의 패배주의를 반박하여나섰다. 김정숙은 철저한 혁명가라면 정세가 불리할수록 두렴없이 나서서 화를 복으로 만들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엄광호는 녀전사들의 정당한 주장을 받아들일 대신 앙심을 품고 보복기회를 노리였다.

이럴 때 밀영에는 뜻하지 않던 일이 나타났다. 어느 날 전사 둘이 밖에 나가 보초임무를 수행하다가 너무도 추워 남몰래 불을 피웠는데 그만 조심하지 않아 불길이 주변에 미치면서 자그마한 산 하나를 태워버렸다. 두 전사는 엄광호와 리동걸에 의해 즉시 흰광목으로 두른 천막에 갇히였다.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