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의 령수항전 선봉인 황성

2019-08-26 08:40:20

하북성 랑방시 안차구 조하두향에서 한 영웅렬사의 이름이 지금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다. 그가 바로 조하두촌에서 태여난 황성이다.

황성은 1914년 하북성 안차현(오늘의 랑방 안차구)에서 태여났다. 1930년 가을, 북평제4중학교에 입학했고 1932년 졸업 후 천진북양공학원 예과생으로 입학했으며 1934년 여름에 청화대학 지구학 학부에 입학했다. 그동안 ‘민족무장자위회’, ‘세계어학회 청화분회’ 등 중공지하당이 령도하는 애국진보단체에 참가했다.

황성 렬사

1935년, 일본제국주의가 화북사변을 일으키고 우리 나라 령토를 일층 잠식하여 중화민족은 제일 위험한 시각에 이르렀다. 중공지하당의 령도하에 북평의 여러 학교들에서 항일구국회를 설립하였고 황성은 청화대학 구국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구국회는 <전국 국민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화북이 아무리 넓어도 평온한 책상 하나 놓을 자리가 없다.’는 화북학생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를 웨쳤다. 12월 9일, ‘12.9’운동이 폭발하였다. 청화대학 학생청원시위의 인솔자로서 황성은 동학들을 거느리고 반동군경의 저애를 물리치고 육체로 항일구국을 호소했다. 항일구국운동의 세례 속에서 황성은 1936년 1월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9월, 황성은 중공북평학생련합회 공산당, 공청단 서기를 맡고 있었기에 북평학생련합회에 대한 당의 지도사업을 책임졌다.

로구교사변 이후 황성 등은 당조직의 요구에 따라 필을 버리고 총대를 잡아 전국구국회 대표의 명의로 류상부대에 가 항일구국의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고 사천군대들 속에서 비밀적인 중공특별지부를 건립하였으며 황성이 서기를 맡았다.

1938년 봄, 황성은 신사군에 참가하여 진의가 지휘하는 한 지대에서 사업하였으며 얼마 후 군부로 전근되여 군정치부 비서처장을 맡고 원국평 등을 협조해 부대에서 사상, 정치 사업을 전개했다. 1941년초, 환남사변이 폭발했고 황성은 불행하게 체포되여 상요집중영에 갇혔다. 국민당 완고파군대는 공공연히 신사군의 ‘반란’을 비방하고 그더러 ‘반성하여’ ‘새 출발’하라고 했다. 황성은 “우리 신사군은 항일의 대오이다. 몇년간 전국을 종횡무진하며 싸워서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첫째 일본에 투항하지 않고 둘째 백성들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오직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항일하겠다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피와 생명을 바칠 것이다. 그래 이것이 무슨 죄이고 무엇 때문에 후회해야 하는가?” 하고 호되게 질책했다.

1942년 4월 23일, 황성은 정의를 위하여 태연자약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살밖에 안되였다.

2016년, 안차구는 황성의 출생지인 조하두촌에 황성사적진렬관을 건설했고 같은 해 조두하향 제십리 풍쟁소진에 홍색기억관을 세우고 황성과 조하두향의 기타 혁명력사인물의 영웅사적을 함께 진렬해 관광객과 당지 백성들이 혁명선렬들을 기념하고 학습하도록 하고 있다. 해마다 청명절, 7.1 등 명절과 기념일이면 당지의 중소학생들과 향촌 간부, 당원 등은 모두 황성사적진렬관, 홍색기억관을 찾아 참관, 학습하고 혁명교양을 받고 있다. 

신화통신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