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6사 7퇀 정위 리동걸
무포숙영지에서 대흥단지구로 진격할 데대한 총지휘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어 대흥단전투가 벌어지고 리동걸의 용맹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2019-08-26 09:03:52

1939년 5월 하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경내 광평지역으로 진출했다. (1978년 6월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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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 무렵에 또 장백현에서 입대한 두 나어린 전사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동원되여 사처로 헤매다가 산아래에서 겨우 찾아냈는데 그들 둘은 너무도 배가 고파서 땅에 파묻은 감자를 꺼내서 구워먹고 있었다. 두 나어린 전사도 례외없이 천막에 갇혀야 했다.

꼬투리를 잡았다고 득의양양해진 엄광호는 나어린 전사들에게 ‘도주병’이란 어마어마한 죄명을 씌워놓고 승인하라고 조겨댔다. 너무도 배가 고파 어망결에 내려갔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았다. 청가없이 내려가니 도주고, 도주는 반혁명이라는 데 어찌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몸을 수색해도 쓰다남은 치약 쪼각이 나질 뿐이였다. 나중에 엄광호는 두 나어린 전사를 땅바닥에 눕게 하고 그들의 복부에다가 나무가지를 쌓아놓고 불까지 달아놓았다. 먼저 두 전사도 같은 액운을 당했다. 그들은 배가죽이 타서 갈라지면서도 도주를 승인하지 않았다.

어언 음력설(2월 19일)이 다가왔다. 2방면군 사령부에서는 밀영의 동지들이 감자따위로 어떻게 음력설을 쇠겠는가며 사람을 파견하여 전투에서 로획한 소 한마리와 색다른 식료품들을 보내왔다. 푸짐한 음력설 선물이였다. 밀영은 환희로 끓어넘치였다. 음력설날 마침내 소를 잡았다. 오래동안 식사 한번 변변히 못한 점을 고려하여 소고기를 가마에 넣고 흐들어지게 삶았다. 소고기에 소고기국물―실로 즐거운 설명절이였다.

헌데 웬걸, 몇몇 전사들이 배가 아프다며 변소로 드나들었다. 좀 지나니 그들을 골려주던 전사들도 괴춤을 쥐고 부지런히 변소로 드나들었다. 사실은 오래간만에 기름진 소고기를 많이 먹으니 허약한 위가 소화해 낼 수가 없어 속앓이를 만나 설사를 한건데 음험한 엄광호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엄광호는 리동걸과 간단한 말을 주고 받고는 즉각 작식대 세 녀전사를 불러들이였다. 소고기에 독약을 넣었으니 로실하게 교대하라고 했다. 녀전사들은 억이 막히여 순간에 아무말도 못했다. 그러자 엄광호는 삽시에 표독스러워지며 펄쩍 뛰였다. 억울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지난번 두 나어린 전사를 끌어내더니 그때 수색해 낸 치약이 독약이라며 두눈을 딱 부릅떴다. 소고기가마에 독약을 넣었다는 소식은 밀영의 동지들을 분노케 하였다. 영문도 모르는 동지들은 혁명동지를 해치는 무치한 인간들이라며 치를 떨었지만 어쩔수 가 없었다.

잇달아 악형이 시작되였다. 두 나어린 전사의 배우에 또 관솔불을 피워놓았다. 그들은 다시 까무라치고 말았다. 작식대에 독약을 넘겨주었다고 세 녀전사들도 륙속 체포되고 몸서리치는 고문이 행해졌다. 때리다 못해 기진맥진하더니 팔과 다리에 철사를 비끌어매고 비틀어댔다. 김선의 다리는 뼈까지 다 드러나고 발가락 뼈까지 끊어졌다. 얼마 후 속탈을 만난 동지들은 차츰 원기를 회복했지만 천막 속에 갇힌 녀전사들은 풀릴줄 몰랐다. 보복이라도 엉터리없는 보복이였다.

1939년 5월, 항일련군 제2방면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던 지점. (1978년 6월 2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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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이 쏟아지던 어려운 나날, 마침 제2방면군사령부 통신원이 청봉밀영을 찾아왔다가 기막힌 이 사연을 알게 되였다. 그는 지체없이 사령부로 돌아가 사건의 전말을 회보하고 이른바 녀전사들의 간첩행위와 그 전말을 요약한 리동걸의 편지와 증거물이라고 하는 ‘독약’봉지를 내놓았다.

2방면군총지휘는 놀랐다. 너무도 큰 충격이였다. 동지들의 만류도 마다하고 치약에 혀끝을 대보아도 그것은 틀림없는 치분이였지 그 무슨 독약이 아니였다. 밀영의 녀전사들이 “다 혁명 하나 밖에 모르는 녀성”들이란 것을 너무도 익히 알고 있는 총지휘였다. 총지휘는 그 즉시로 7퇀 전선정위 김평을 불러 긴급과업을 주어 청봉밀영에 보내였다.

김평은 동지들 속에 심입하여 ‘간첩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조사한 후 밀영전체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우리 혁명대렬 내부에 엄광호와 같은 비루한 인간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는 제2방면군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엄광호를 사형에 언도합니다! 7퇀 후방정위 리동걸은 당적을 취소하고 그의 일체 직무를 철소합니다!”

땅굴로 된 밀영부대실에서는 박수소리가 련달아 터져올랐다. 그간 ‘간첩사건’에 휘말려들어 사경에서 헤매던 네 전사와 세 녀전사는 격동된 나머지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동지들도 엄광호의 속임수에 들어 그들을 억울하게 대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드디여 몸이 완쾌된 동지들은 김평 정위를 따라 주력부대로 떠나갔다. 무서운 고문 끝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작식대 세 녀전사들은 걸을 수가 없어서 잠시 청봉밀영에 남아있어야 했다.

세개 방향으로 나뉘여 행동하던 제2방면군 부대는 드디여 원기를 회복하였다. 방면군지휘부에서는 적들의 검질긴 추격에서 벗어나 1939년 3월말에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렀다. 총소리를 듣고 압록강상류로 움직이던 7퇀도 찾아오고 무송쪽의 8퇀도 찾아왔다. 청봉밀영에 머무르던 후방동지들도 모이니 북대정자는 흥성흥성하였다.

실로 기적이였다. 류례없는 고난의 행군길―말 그대로 사지판이였다. 2방면군 총지휘부의 기동령활한 작전에 의해 부대는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에서 벗어나 거의 전부가 그대로 살아서 모일 수 있었다. 그것도 도보로 대엿새면 가 닿을 수 있는 거리를 110여일이나 되는 엄청난 품을 들이면서 말이다. 여러갈래로 헤여졌던 전우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돌아가며 상봉의 기쁨을 나누었다.

리동걸로 돌아와 보자.

장백현 청봉밀영에서 리동걸은 7퇀 후방 정위였고 김준으로 통했다. 전선이 아닌 산속 후방밀영에서 그는 자기에 대한 요구를 낮추었다. 결국 그는 후방밀영 책임자 엄광호를 엄하게 비평하며 단속하는 대신 동조한데서 엄중한 착오를 범하였다. 2방면군 총지휘부에서는 리동걸의 사람됨이 정직하고 견실한 혁명가란 이 주되는 표현을 보아 착오를 시정할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1939년 5월, 항일련군 제2방면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던 지점에서 두만강가 놀이를 즐기는 화룡현 광평농장 사람들. (1978년 6월 2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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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통한 교훈이였다. 자기의 착오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항일무장투쟁의 피어린 싸움에서 보다 헌신적으로 싸우며 앞장을 다투었다. 그런 속에서 1939년 4월 30일이 돌아오고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110여일에 거친 류례없는 고난의 행군 끝에 드디여 현성에서 서북쪽으로 26킬로메터 떨어진 장백현 이도강 부근의 소덕수등판에 이르렀다. 방면군 총지휘부에서는 이곳 밀림 속에서 뜻깊은 ‘5.1’절을 쇠기로 하고 부대에 숙영령을 내리였다.

오랜만에 시름놓고 쉬여보는 시간이다. 이에 못지 않게 리동걸이나 제2방면군으로 말할 때 소덕수일대는 마냥 마음을 부푸게 하는 뜻깊은 고장이기도 했다. 1936년 가을 되골령을 넘어 장백지대로 진출한 후 처음 들어선 마을도 이 고장이고 첫 총소리를 울리여 항일련군의 위력을 만방에 과시한 곳도 이 고장이 아니였던가. 리동걸은 대뜸 흥분 속에 잠기였다.

소덕수등판에 천막들이 우후죽순마냥 일어섰다. 매 전사들에게 새 군복과 붉은 오각별 달린 새 군모를 내주니 온 부대가 생기로 넘치였다. 모두들 분공에 따라 밀림 속에다 가설무대와 경축대회장을 만들기도 하고 모든 이들에게 달아줄 꽃송이, 명절음식장만에 분주하니 어딜 보나 명절분위기로 흘러넘치였다. 귀맛좋게 들리는 노래소리에 녀전사들이 산뜻한 새 주름치마 하나씩 더 타 입으니 명절분위기가 보다 진하게 안겨졌다. 저녁에는 밀영과 지방의 혁명조직에서 보내온 술로 제법 축하연까지 벌어졌다. 후방정위를 걸쳐온 리동걸은 누구보다도 바삐 돌아쳤다.

새날이 밝아왔다. 로동절의 아침해를 맞으며 아침밥을 먹으니 성수가 났다. 모두가 일매지게 새 군복을 갈아입고 가슴마다에 꽃송이를 다니 정녕 꿈만 같았다.

리동걸 등 수백명 부대장병들은 전신무장한 채 중대별로 대렬을 지어 름름하게 대회장에 들어섰다. 주석대 앞에서 나붓기는 붉은기와 ‘만국의 로동자들은 단결하라!’는 표어가 자못 인상적이였다. 이어 제2방면군 총지휘께서 방면군의 지휘원들과 함께 주석대에 올랐다. 7퇀 퇀장 오중흡의 “차렷!” 구령소리와 함께 전체가 경례를 드리자 주석대에서 손들어 답례하였다.

경축대회는 5.1 <메이데이가>의 합창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들어라 만국의 로동자

천지를 진감하는 메이데이를…


합창에 이어 방면군 총지휘가 연설하였다. 총지휘는 연설에서 이미 얻은 기꺼운 승리를 축하하고 나서 ‘5.1’로동절의 유래를 설명하였으며 항일전에서 어깨겯고 싸워가는 중조 두 나라 인민들간의 두터운 전투적 친선을 깊이있게 진술하면서 당면한 정세와 과업을 일목료연하게 분석하고 지적하였다. 연설은 끊임없는 박수소리에 의해 간간히 끊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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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혁명조직의 대표와 전사대표들도 발언하였다. 그들은 발언에서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끝까지 싸워가겠다고 결심을 다지였다. 뒤미처 7퇀 4련에서 우렁찬 대합창으로 연예공연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녀전사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마치를 든 로동자들 따라

호미 든 농민도 일어났다

붓대 든 선비도 나오라

나라 잃은 동포들 모두 나오라


온 대회장은 노래소리, 박수소리로 차고 넘치였다.

독창과 재담에 이어 전체 전사들의 군무가 연예공연의 마지막 장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지휘원들도, 리동걸도 춤판에 뛰여들어 연예공연은 보다 고조를 이루었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촌의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여도…


마등창수림 속에 다시 어둠이 내리였다. 여기저기서 우등불이 타올랐다. 리동걸은 물론 온 부대는 내내 경축대회와 연예공연의 즐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얼마 후 1939년 이해 5월 리동걸은 소속 2방면군 부대를 따라 장백현내 5호물동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삼지연쪽 청봉밀영에서 하루밤을 숙영하고 이튿날에는 낮과 밤을 건창에서 숙영하였다.

건창 다음은 베개봉 쪽이였다. 리동걸 소속부대는 그곳에서 조선의 갑산과 무산의 백두림해를 이어주는 갑무경비도로를 발견하였다. 수시로 들이닥칠 수 있는 항일부대의 진출에 대처하고저 닦은 적들의 비상경비도로였다. 신설도로이기에 도로공사는 갓 끝났지만 아직 준공검사를 거치지 않고 있었다. 물론 평민들의 통행은 일체 금지되고 있었다.

2방면군의 목적지는 조선의 무산지역을 꿰지르며 두만강 상류지역에서 활동하는 것. 헌데 가도가도 원시림으로 덮힌 무인지경 지대를 거치자면 시간이 무척 걸릴 것이고 부대의 행동이 적들에게 로출되여 혈전을 거듭할 수도 있었다. 2방면군 총지휘는 그때까지도 적들의 주의력이 미처 쏠리지 못한 갑무경비도로가 제일 안전한 지대라고 인정하고 전체 부대를 대낮에 갑무경비도로를 따라 급행군하도록 명령하였다.

제2방면군 부대는 푸른 대낮에 보무당당히 적들의 신설 국방도로를 급행군하였다. 전례가 없는 대담한 군사행동이였다. 결과 부대는 갑산과 무산 사이 백두밀림구간을 급행군하여 그날로 두만강기슭의 무포에 이르렀다. 무포숙영지에서 대홍단지역으로 진격할 데 대한 총지휘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어 무산지역으로 알려지는 대홍단전투가 벌어지고 리동걸의 용맹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대홍단전투 후 5월 23일, 리동걸은 부대를 따라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뒤미처 리동걸이 참가한 동경평전투, 회풍동전투, 올기강전투, 청두촌전투, 청산리부근 목재소습격전투 등 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두만강연안의 화룡현 경내 10여개 집단부락 무장자위단이나 경찰대들이 련이어 우리 제2방면군의 된 타격을 받았다. 화룡현 휘풍동집단부락의 적 경찰대는 접전도 못하고 꼬리를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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