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론 연찬하고 진리 견지한 사한문

2019-08-28 08:29:26

호남성 남부지역의 로혁명근거지에 자리잡은 뢰양시에서는 해마다 여러차례 ‘홍색이야기 교정진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항일전선에서 희생된 팔로군 고급장령인 사한문의 혁명이야기에 대하여 언제나 어린이들이 ‘즐겨 듣고 너무나도 감동을 받고 있으며’ 일부 어린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이 글썽해하고 있다.

사한문은 또 한문이라고도 불리우며 호는 홍석이고 1904년에 뢰양 성관의 한 유족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1919년 사한문은 현고등소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한 후 또 우수한 성적으로 형양신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공부기간 그는 진보적인 간행물을 적극 열독하면서 점차적으로 ‘사회개조’ 리상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1925년 사한문은 신민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가 즉시 뢰양의 혁명활동에 뛰여들어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조직에 가입하였고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사한문 렬사

1927년 5월, 장사에서 ‘마일사변’이 발생하였다. 사한문은 홀몸으로 형뢰변계의 동자산지역에 잠입하여 비밀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2월, 주덕은 로농혁명군 제1사를 거느리고 뢰양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사한문은 뢰양현 쏘베트정부 특파원으로 임명되여 동자산지역 농민봉기의 무장투쟁 령도를 책임졌다. 3월 그는 주덕을 따라 정강산으로 전이하였고 얼마 안되여 홍4군 제28퇀에 전근하여 서기관을 맡았다.

1929년 후 사한문은 홍5군 제4종대 당대표, 홍3군단 비서장, 제3사 정치위원, 홍3군단 정치부 선전부 부장직무를 맡고 중앙혁명근거지 제1차부터 제5차 반‘포위토벌’에 참가하였다. 그는 1934년 10월 중앙홍군 주력의 장정에 참가하였고 도중에  많은 행군 잦은 박자(快板)를 편찬하여 부대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1935년 9월 홍1방면군이 하달포에 승리적으로 도착하여 섬감지대로 개편된 후 사한문은  서북홍군대학에 전근되여 교무처장을 맡았다. 1937년 1월 서북홍군대학은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학원 13대 대장으로 임명되였고 후에는 또 학교지도부 정치선전과 과장으로 전근되였다.

1939년,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 설립 3돐을 경축할 때 사한문이 책임지고 개최한 ‘항일군정대학 성적 전람회’에는 도합 3000여가지 전시품이 진렬되여 모택동, 주덕 등 중앙 지도동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전 학교 선진정치사업일군으로 평의, 선발되였다.

1941년초, 사한문은 팔로군 총후근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화북의 기중, 태항, 태악, 진서북 등 항일근거지에서 그물식 대‘소탕’을 벌렸으며 팔로군총부는 전략적 전이를 결정하였다. 5월 25일에 포위망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그와 그의 안해는 모두 포로되였다. 일본군의 혹형고문 속에서 사한문은 혁명절개를 굳게 지켰으며 나중에 일본군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39살이였다.

사한문이 희생되기 전해에 그는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을 떠나 전선으로 나아갈 때 리별의 메시지에서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깊이 연구하고 새로운 선전 방식과 방법을 부단히 창조하며 자신을 당의 선전가로 단련시키겠다.”고 썼다. 이것 역시 그가 혁명에 참가하여 일생 동안 분투해온 끈질긴 추구였다.

뢰양시당위 사지판공실 주임 사준청은 문무를 겸비한 ‘당의 선전가’로서의 사한문은 신앙이 견정하고 진리를 견지하며 필승의 신념을 갖고 영원히 혁명적 락관주의 정신으로 충만되였으며 새시대의 모든 젊은 세대들이 학습해야 할 바라고 말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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