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에서 신문 꾸려 부대의 사기 진작시킨 하운

2019-08-29 08:30:56

천연적이고도 청신한 전원풍경과 매력적인 산촌의 풍광, 사계절 푸른 송백이 우거진 홍색전승, 인의가 순박한 향촌풍속… 절강성 소흥시 상우구 영화진에 가면 륭성 발전하는 모습이 한눈에 안겨온다. 이 우동평원의 비옥한 전원과 사명산 산줄기의 산수로 이뤄진 아름다운 대지는 혁명영웅렬사 하운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운은 원명이 주사교이고 1905년 상우현 주항향(오늘의 상우구 영화진)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1921년에 항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한 후 귀향하여 교편을 잡았으며 상우현농민운동에 뛰여들었다. 1930년 일본의 와세다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철도전습소에 들어갔다. 1931년 ‘9.18’사변이 발생한 뒤 그는 결연히 학업을 중지하고 귀국하여 항일구국사업에 참가하였다.

하운 렬사

1938년 당중앙은 《신화일보》를 창간하기로 결정하였고 하운은 한구에 전근하여 준비사업에 참가하였다. 12월 《신화일보》 화북분관이 설립되여 하운은 분관관리위원회 주임(사장) 겸 총편집을 맡았다. 1939년 양력설에 중공중앙 북방국 기관보 《신화일보》 화북판 창간호가 탄생하였다.

1940년 8월, 팔로군은 저명한 백퇀대전을 발동하였다. 하운은 팔로군본부와 제129사의 류백승, 등소평을 따라 전선에 달려가 전선 보도취재를 조직하고 전선에서 편집, 원고심열, 인쇄, 발행하여 가장 빠른 속도로 전투소식을 전파하여 부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백퇀대전의 승리를 선전하는 데 거대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잔혹한 적들과의 투쟁에서 비록 신문사가 자주 전이했으나 신문의 출판은 종래로 중단된 적이 없었다. 《신화일보》 화북판은 적후항일근거지 군민들로부터 ‘화북인민의 밝은 귀와 화북인민의 혜안, 하북인민의 후설’ 및 ‘화북항전의 길잡이’로 불리웠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대량의 병력을 동원하여 태항산 료현 마전일대에 대하여 ‘철벽포위토벌’식의 대소탕을 감행하여 팔로군본부와 《신화일보》 화북분관을 짓부시려고 시도하였다. 하운은 전 관의 동지들을 거느리고 사업과 전투를 견지하였다.

이 위급한 시기에 하운은 주변의 동지들에게 “마지막 탄약 두발을 남겨 한발은 나를 향해 쏘고 다른 한발은  자신을 쏘아 죽는 한이 있더라고 우리는 포로로 될 수 없다.”고 말했다. 5월 28일 이른새벽, 대양각촌 산비탈에 숨어있던 하운은 불행하게도 잔등에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의료일군들의 구급치료를 거쳐 깨여난 그의 첫마다가 바로 “나의 상처가 그리 엄중하지 않으니 저곳에 쓰러진 동지들을 어서 구급하라.”는 것이였다. 의료일군들이 다른 부상자들을 살펴보고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희생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37살이였다.

하운이 희생된 후 류백승은 침통한 심정으로 “정말로 아쉽다! 한명의 무관(좌권을 가리킴)과 한명의 문관(하문을 가리킴) 2명의 대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말했다. 전국이 해방된 후 하운 렬사의 유골은 진기로예렬사릉원에 옮겨져 좌권 장군 묘의 왼쪽에 안장되였다.

영화진당위 서기 주춘란은 비할 바 없이 힘들었던 전쟁년대에 상우현항일민주정부 탄생지로서의 영화진은 한때 상우현항전의 정치중심이였을 뿐만 아니라 신사군 절강동부유격종대의 중요한 활동거점으로서 일련의 혁명영웅렬사들이 피어린 싸움을 벌린 기록을 남겼다면서 이에 대하여 영화진은 상우현항일민주정부옛터를 ‘영화관’으로 개조하여 ‘로홍색구역’의 홍색기억, 영웅렬사들의 유풍으로 하여금 계속 후대들의 전진의 길을 밝혀주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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