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해 혁명한 류영

2019-08-31 14:25:10

절강성 금화 영강 방암 마두산 기슭에는 장엄하고 엄숙한 류영 렬사 릉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대중들은 이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절강 남부 유격근거지 창건자인 류영을 기리고 있다.

“어릴 적에는 가야 할 길을 몰랐지만 지금은 탄탄대로에 올라섰다. 일편단심 혁명을 위해 헌신하고 정의를 위해 과감히 전진하자!” 이는 류영이 혁명에 참가할 때 쓴 한수의 시다. 어렵고 곤난한 혁명투쟁 속에서 그는 짧지만 빛나는 일생으로 혁명을 위해 헌신하려는 굳은 맹세를 실천하였다.

류영은 본명이 류성목이고 1905년에 강서 서금의 한 빈곤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1929년 4월,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였고 같은해 9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선후하여 련 정치지도원, 영 정치위원, 퇀 정치처 주임, 퇀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1년 12월 홍5군단 제15군 44사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4년 1월, 홍5군단 제34사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그 후  홍7군단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중앙쏘베트구역 력대의 반‘포위토벌’에 참가하였고 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겪으며 여러차례나 전공을 세웠다. 제1차 반‘포위토벌’ 전투에서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혼자서 기관총 한자루를 추켜들고 전우들이 모두 철퇴할 때까지 전투를 견지했다.

류영 렬사

1937년 7월부터 류영은 홍군 북상항일 선발대 정치부 주임, 홍10군단 제19사 정치위원, 군단 군정위원회 위원, 군단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부대를 따라 복건, 절강, 안휘, 강서 변구를 전전하였다. 1935년 1월, 홍10군단은 강서 동부의 회옥산일대에서 적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대부분 장병들이 희생되였고 방지민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였다. 2월, 중상을 입은 류영은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속유와 함께 나머지 부대를 거느리고 절강 남부에 진입하여 국민당이 통치하는 핵심지역에서 선후하여 절강 서남, 남부 유격근거지를 개척하고 령도하였다. 류영은 한동안 중공민절변구 림시 성위 서기 겸 민절변구 성군구 정치위원을 맡았다. 중앙과 멀리 떨어져있고 고립된 적후의 악렬한 환경에서 민절변구 군민들을 령도하여 국민당군대의 여러차례 ‘숙청’을 물리쳤으며 극히 간고한 3년 유격전쟁을 견지하였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류영은 중공절강성위 서기, 중공중앙 화중국 위원, 화중국 특파원을 맡았고 복건, 절강, 강서 지역의 혁명투쟁을 지도하였다. 그는 당조직을 적극 회복, 발전시켰고 항일구국을 선전, 조직하였으며 항일민족 통일전선 등 여러가지 사업을 공고, 발전시키면서 각계 애국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주은래는 “동남전장에서 절강은 기타 성이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1942년 2월, 반역자의 밀고로 류영은 온주에서 국민당 반동당국에 체포되여 옥중에서 갖은 혹형을 당하였으나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 동요하지 않았다. 그해 5월 18일, 류영은 영강 방암 마두산 기슭에서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그때 나이는 37살이였다. 모택동은 류영에 대해 “인민을 위해 희생되였고 인민은 영원히 그를 기념할 것이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류영 렬사 릉원은 절강성 애국주의교양기지이자 절강성 국방교양기지이다. 해마다 청명절, 당창건일과 휴식일이면 이곳에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오늘날 릉원은 혁명선렬을 참배하고 혁명전통교양과 애국주의교양을 진행하는 장소로 자리잡았다. 30살의 청년교원 호소증은 련속 몇년간 청명절이면 류영 렬사 릉원에 성묘하군 하였다. 그는 “혁명자의 확고한 신념과 완강한 의지가 우리를 감동시켰으며 우리는 오늘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선혈로 바꿔온 행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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