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6사 7퇀 정위 리동걸
옥돌골 단오명절행사 후 리동걸은 다시 맡은 바 임무수행에 나섰다. 동경평, 대동구 등 두만강 상류지역에는 반일군중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다.

2019-09-02 09:10:10

↑ 화룡현 백리평 부근의 올기강 모습. (2005년 5월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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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적토벌대는 피눈이 되여 아군의 종적을 밟았다. 2방면군 총지휘부는 적과의 로정거리를 따져본 후 과단하게 부대를 휘풍동에서 하루밤 숙영하면서 군중정치 사업을 벌리도록 하였다. 민중들은 분분히 식량과 신 등을 모아왔고 끓어넘치는 감격과 환희로 부대를 맞이하였다. 이튿날 이른새벽, 부대는 군중들과 항일의 승리를 기약하면서 올기강 방향으로 떠났다.

활동무대를 백두산 동북부로 옮긴 후의 5월 하순의 어느 날 2방면군 총지휘부에서는 안도현 큰골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장백산 동북부에서 군사정치 활동을 맹렬히 전개할 일련의 방침을 내놓았다. 이 방침에 의해 원 7퇀 정위 리동걸은 2방면군 총지휘의 파견을 받고 조선 국내에 파견되였다. 그의 임무는 파괴된 지하혁명조직들을 하루속히 복구하여 강력한 지하조직망을 형성하는 것이였다.

2방면군 총지휘는 리동걸에게 무산경내의 적당한 지점에서 조선 국내 지하조직 책임자들과 정치공작원들의 회의를 소집할 타산이니 그 준비사업을 잘할 데 대해 신신당부하였다. 사령부-총지휘부를 떠난 리동걸은 총지휘의 지시를 명기하고 선참 두만강상류에 위치한 화룡현의 광평, 동경평, 대동구, 옥돌골 등지의 조선이주민들 속에 들어가 지하조직망을 하나하나 일떠세웠다. 그는 이 줄을 타고 다시 조선 국내의 무산군 삼장면과 농사동 일대에 드나들면서 임무수행에 충실하였다.

총지휘부에서는 또 녀전사 김정숙을 파견하여 사령부와 리동걸 사이 통신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김정숙은 ‘날농사’를 지으러 두만강을 건너온 무산지방 사람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그들을 통해 조선 국내와의 련계를 가지며 사령부와 리동걸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리동걸은 회의준비를 빈틈없이 짜고들었다. 사령부를 떠나 약 20일 만에 회의준비가 끝났다. 총지휘는 리동걸의 안내하에 두만강 물동다리를 건너 회의장소인 국사봉에 올랐다. 국사봉은 두만강지류의 하나인 서두수 연안에 자리잡았다. 총지휘는 국사봉에서 조선 국내 지하혁명조직 책임자 및 정치공작원 회의를 소집하고 지하혁명조직들을 확대하며 항일혁명을 계속 앙양시키기 위한 일련의 대책을 토의하였다. 회의 후 리동걸의 제의와 총지휘의 비준으로 국사봉회의 참가자들은 두만강 북쪽연안의 옥돌골에서 열린 단오명절 놀이에 참가할 행운을 지니였다.

이에 앞서 2방면군 총지휘부에서는 피눈이 된 적을 일망타진할 전투계획을 무르익힌 후 두만강상류의 화룡현 동경평, 대동, 원봉 등지와 조선 대안에서 군사정치 활동을 벌리던 7퇀과 리동걸 등을 부르고 전 부대를 백리평 북쪽의 약 10리 거리에 위치한 후일의 페문촌 물북 동수구 막바지에 집결시켰다. 한편 4명의 정찰조를 파견하여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2005년 5월, 현지답사로 보는 올기강전투 전적지 안내비.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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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백리평에는 적‘치안대’ 약 8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자들은 우리 항일련군부대가 휘풍동에서 군중정치사업을 벌린 후 식량 등을 가지고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매일 페문어구의 사금구다리에 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40명씩 두 교대로 나뉘여 다리목을 지키였다.

리철수 등 4명의 정찰원은 사금구 다리목의 물남 숲속에 숨어 적들의 거동을 면밀히 살피였다. 이때 핍박에 의해 ‘공산당 정탐’에 나선 당지 농민 둘이 올기강을 거슬러올라갔다. 오후 늦을 녘에 두 사람이 돌아서자 정찰조는 그들을 불러세웠다. 2명의 ‘공산당 정탐’은 박씨와 채씨였다. 이들의 말에서 적정이 보다 빨리 확인되였다. 뿐만 아니라 적들은 화룡현 지구의 도로 요소와 마을마다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6월 5일 깊은 밤중 동수구 막바지에 일어선 풍막마다에 식사와 행군준비를 다그치라는 지휘부의 명령이 하달됐다. 작식대의 녀전사들은 능란한 솜씨로 짧은 사이에 전 부대의 식사를 마련했다. 그사이 제8퇀 정치위원 김일이 거느린 정찰조가 먼저 떠났다.

6월 6일 새벽 3시경에 제2방면군의 300여명 대오는 동쪽산 릉선을 타고 물남의 페문어구에 이르렀다. 그들속에는 리동걸도 섞이였다. 부대는 적들을 유인하고저 인차 페문의 금전굴주위의 풀들을 짓밟아놓은 다음 부근의 누기 찬 땅에 매복하였다.

금전굴은 올기강으로부터 약 200메터 떨어진 길가에 있었다. 올기강 량쪽 기슭에 갈숲이 우거지고 길이 그 한옆으로 뻗어있었다. 길 오른쪽엔 산들이 남북으로 가로놓이였다. 싸우기에 안성맞춤한 곳이였다. 게다가 전 부대가 풀로써 위장하고 있어 가까이에서도 그 정체를 가려보기 어려웠다.

만단의 전투준비가 다 되자 2명의 전사가 백리평 쪽으로 좀 내려가다가 총소리를 내였다. 때는 오전 8시경이였다. 드디여 백일평 쪽에 일본군 지도관 다이노가 거느린 40여명 치안대가 나타났다. 올기강을 건넌 놈들은 길어구에서 머뭇거리며 주위 지형과 동정을 살피더니 큰길을 따라 움지럭거렸다.

치안대 경찰놈들은 금전굴 곁에 이르러 문뜩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저기 고개를 기웃거리며 떠드는 품이 짓밟힌 풀들이 이상한 모양이였다.

이때였다. 총지휘부의 사격신호 소리와 함께 아군의 30여정의 기관총과 보총 등이 복수의 명중탄을 퍼부었다. 가뜩이나 겁을 먹고 주춤거리던 놈들은 뜻밖의 불벼락에 혼비백산했다. 내꼴 봐라 하고 내뛰는 놈, 뒹구는 놈, 기는 놈, 아우성치는 놈―적진은 대뜸 수라장을 이루었다.

올기강 기슭에는 순식간에 놈들의 시체가 지저분히 널리였다. 다이노 대장놈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첫 총알에 명중된 놈은 그래도 살겠다고 금전굴로 딩굴어 떨어졌다가 그곳에 매복하고 있던 우리 전사들에 의해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

이어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였다. 서리발 총창을 비껴든 리동걸 등 2방면군 장병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육박했다. 우리 전사들에 의해 몇놈이 내뛰다가 붙잡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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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된 한 녀전사가 다른 녀전사를 보고 “야, 우리는 승리했다!”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이어 “우리 뒤를 자꾸 따르더니 싹 죽었다.”하고 소리치더니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이 전투에서 제2방면군 부대는 총지휘의 지휘하에 40여명의 적을 몽땅 살상 포로(그중 살상 근 40명)하고 기관총 등 적잖은 무기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부대에서는 인도주의 정신에 립각하여 부상자 여럿을 교육한 후 돌려보내였다. 이에 감화된 적중대장은 뒤에 대부대가 추격하니 빨리 산에 오르라고 실토하였다. 전사들은 싸움터를 떠나기에 앞서 나무가지들에 항일선전삐라들을 걸어놓았다.

올기강전투가 끝난 후 적들은 일제수비대와 각지 경찰 600여명을 긁어모아가지고 대토벌을 획책하고 우리 부대에 의해 생금되였다가 풀린 5명중 2명을 공산군 정탐으로 내세웠다. 울며 겨자먹기로 정탐에 나선 이들 둘은 산속에서 우리 부대를 찾은 후 다시 오게 된 연유를 낱낱이 교대하였다.

이때 제2방면군 총지휘는 “좋다. 한번 더 해보자!”하고 호기 있게 말하면서 돌아가서 빨리 추격해오도록 여쭈라고 일깨워주었다. 일제수비대 대장놈은 당황해났다.

“한번 더 해보자고 말한 걸 보면 이만저만한 모양이 아니다. 이제 다시 다이노 신세가 될 수 없다.” 그리고는 대부대를 돌려세워가지고 삼도구 쪽으로 물러갔다. 당지 치안대놈들도 그 뒤를 따라 도망쳐버렸다.

올기강전투 후 단오날이 닥쳤다. 1939년 이해 단오날은 양력 6월 21일이였다. 제2방면군 총지휘부는 옥돌골 안에 흩어져사는 사람들과 휘풍동 등 이웃마을의 올 만한 사람들을 다 참가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새날이 밝아오자 옥돌골과 그 일대의 마을들은 해방의 날을 맞기라도 하듯 흥성거렸다. 청장년들은 벌써부터 그네를 매고 씨름터도 만들어놓고 단오놀이의 시작을 기다리였다. 부대에서 옥돌골의 넓은 등판에 꼴문대까지 세워놓으니 과연 제법이였다.

이날 제2방면군 부대와 마을청년들 사이에 축구경기가 벌어졌다. 량팀 선수들의 보기 좋은 헛발질, 풀밭에 나딩구는 모습―온 장내는 전에 없이 끓어올랐다. 폭소가 끊임없었다. 늙은이들은 이 골안에 마을이 생긴 이래 오늘처럼 통쾌하게 웃어보기는 처음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네와 씨름도 성황리에 열리였다. 군민오락회와 연예공연도 대성황을 이루었다. 적들이 화룡현 서남부에 ‘토벌’무력을 집중시키며 항일련군 ‘토벌’에 광분할 때 적구의 한복판에서 여유작작하게 단오명절 놀이를 즐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일이였다. 우리 항일부대는 이 기상천외의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였다. 축구, 그네, 널뛰기, 오락을 통한 독특한 정치사업 방법이였다.

옥돌골 단오명절행사 후 리동걸은 다시 맡은 바 임무수행에 나섰다. 동경평, 대동구 등 두만강 상류지역에는 반일군중조직이 우후죽순 일어서고 지하조직망은 조선의 무산지역에까지 넓혀졌다. 조선 연사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준비사업도 비밀리에 착착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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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여름 제2방면군 주력부대가 화룡현 광평일대의 동경평에 가 활동할 때 지방군중들은 위험도 마다하고 식량 등 원호물자를 부대에 넘기였다. 그 뒤 우리 부대와 련계가 있던 사람들이 련루되였는데 쌀을 지고 우리 부대를 따라간 적 있는 동경평 툰장 등 몇사람이 고성리 부근의 함박골에 끌려가 적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였다.

1939년 이해 8월의 어느 날 리동걸은 옥돌골일대의 비밀아지트에서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사업을 토의하다가 적들의 불의습격을 당했다. 리동걸은 동지들을 구하고저 적들을 자기에게로 끌며 산비탈로 내리뛰다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적들에 의해 조선의 무산지역에 압송되였다가 다시 청진, 함흥을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였다. 일찌기 화룡현 덕신사에서 눈부신 혁명활동을 하다가 우리 항일련군 제2군 6사, 그 후의 제2방면군에서 싸워가던 리동걸―그는 옥중에서 적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다가 1945년 3월 10일에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리동걸의 직접적인 파견을 받은 김명주 등 동지들이 두만강 연안의 경흥집단부락에 파견되여 지하 비밀당지부를 조직하였다는 점이다.

경흥집단부락은 1937년에 경상도, 강원도 지방의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새 집단부락이다. 그때 화룡현 위남평경찰분서에서는 위화룡현의 비준을 거쳐 경상도일대에 사람을 보내여 이주민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주민들은 그 시절 북간도가 살기 좋고 집과 농사차비도 다 마련해준다는 솔깃한 말에 마음에 끌려 정든 고향들을 떠나 두만강을 넘어섰다.

조선이주민들은 남평경찰분서의 감독 밑에 당지에서 나무를 베여 집 짓고 토성 쌓고 살림을 꾸리였다. 허나 일년 내내 죽도록 일해도 조선에서 올 때 대여준 려비와 식비, 쌀 등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경찰 등 나부랭이들이 세도를 부린 데서 보리쌀과 감자로 겨우 목숨이나 부지할 뿐이였다.

이러한 때 리동걸 관련 김명주 등 몇명 지하공작원들이 이주민으로 위장하고 화룡현 경흥집단부락에 들어섰다. 그들은 이주민들 속에 들어가 항일선전을 앞세우면서 한패의 골간들을 형성하였다. 그들을 제때에 중공 당원으로 발전시키고 지하당지부를 건립하니 힘이 커지였다. 지하당지부가 군중들을 단합하여 놈들과 엇서니 경찰놈들은 전처럼 세도를 쓸 수가 없었다.

항일련군 원호활동도 활발해졌다. 후에 지하당지부 서기 ×××가 최봉우란 경찰놈에게 체포되여 끌려가 살해당하고 지하당지부는 큰 손실을 입었다. 투쟁환경은 그토록 험악하였다. 그럼에도 경흥 지하당지부의 개별적 당원들은 군중 속에 숨어있으면서 군중들을 혁명화하기에 힘썼으며 해방의 그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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