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은 황군각

2019-09-09 08:32:22

호남 상담시당사관 인물청내의 전시벽에는 혁명렬사 황군각의 옛날 사진이 걸려있는데 사진 속의 그녀는 용모가 아름답고 눈빛이 강의하다. 나라를 위해 순직한 그녀의 영웅사적은 고향에서 지금도 널리 전해지고 있다.

황군각의 원명은 왕유우이고 1912년에 태여났으며 호남 상담사람이다. 1927년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장사에서 부녀사업에 종사하였다. 마일사변 후 삼엄한 백색테로에 직면하여 그녀는 장사를 떠나 홀몸으로 상해에 도착하여 상해중학교에 들어가 학습하면서 계속 혁명사업에 종사하였다. 후에 복단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했다. 재학기간에 그녀는 항일구국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학생회 위원으로 선거되였으며 복단대학 학생들이 남경에 가 체포된 학생들을 위해 청원하고 구출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령도하였으며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황군각 렬사

1934년 황군각은 극동정보국의 사업에 참가하였다. 황군각은 지혜롭고 용감하였으며 담대하고 세심하며 사업에서 뛰여난 성과를 거두었다. 1935년 반역자의 밀고에 의해 극동정보국이 파괴되였다. 황군각은 다른 2명 동지가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엄호하다가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한 후 국공 량당은 제2차 합작하여 팔로군 무한판사처에서 황군각을 보석 출옥시켰다. 당조직의 배치하에 황군각은 장사로 돌아가 항일구국 사업을 전개하면서 한 난민부녀공장의 설립을 령도했다.

1939년, 황군각은 태항근거지에 파견되여 사업하면서 선후하여 태항문화교육출판사, 화북신화일보사에서 총회계 겸 관리위원회 비서주임 등 직을 맡았다. 1942년 화북신화서점이 설립된 뒤 심계실 주임을 겸임하고 화북신화서점의 재무관리 제도와 경제채산 제도를 기초하고 제정하였다. 사업의 편리를 위해 그녀는 태여난 지 3일밖에 안되는 외동아들을 농촌집에 맡겨 기르게 하였다. 그 뒤로 황군각의 아들은 자기의 어머니를 다시 만난본 적이 없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태항산근거지에 대하여 잔혹한 ‘5월 대소탕’을 발동하였다. 황군각과 화북신화서점의 동지들은 전이하는 도중에 적들과 조우하여 전투를 거친 뒤 제각기 나뉘여 분산 은페하였다. 6월 2일 또 몇명의 동지들이 일본군에 발견되여 모두가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황군각과 2명의 녀성동지는 료현 장자령의 한 동굴 속에 숨어있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였다. 교활한 적들은 감히 동굴에 들어가 수색하지 못하고 동굴입구에 장작을 놓고 불을 질러 짙은 연기가 재빨리 전반 동굴에 가득 찼다. 위급한 상황에서 황군각은 결연히 동굴에서 뛰쳐나와 총으로 2명의 적을 격사하고 몸을 날려 절벽에서 뛰여내려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날은 바로 황군각의 30살 생일이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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