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영웅 왕봉산

2019-09-09 15:30:59

왕봉산은 1906년 산서성 오대현 동채촌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령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함께 돈을 모아 왕봉산의 공부뒤바라지를 해주어 태원국민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청년시절 나라가 쇠퇴해지고 렬강들이 침입하는 것을 목격한 왕봉산은 붓을 던지고 종군하여 북방군사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군사계에 진입했다.

왕봉산 렬사

1937년,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하였다. 9월, 당시 제69사 203려단 영장이였던 왕봉산은 평형관전역의 여월구보위전에 참가했다. 주요 진지와 근처의 진지가 잇달아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려단장이 전사한 상황에서도 왕봉산은 철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앞장서서 적진지를 향해 돌진해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마지막에 경위원이 강제적으로 그를 안고 절벽아래로 떨어졌는데 절벽 아래가 마침 대추나무숲이여서 크게 상하지 않았다.

1941년 왕봉산은 국민혁명군 륙군 제34군 218려단 려단장으로 승급했고 후에는 림시 편성된 제45사 사장을 맡고 분하 이남의 만천, 영하, 하진 일대를 사수했다. 분하 이남 지역은 량식, 목화 생산지역이다. 일본군은 이 지역에 진입한 후 량식을 마구 략탈하였고 도처에 또치까를 짓고 거점을 세우고 참호를 파고 전력망을 가설했다. 1942년 6월초, 일본군은 분하 이남 지역에서 련거퍼 좌절당하자 전쟁국면을 돌려세우기 위해 분하 이남 각 현의 일본군, 괴뢰군을 집중해 우세한 병력으로 34군을 포위공격했다. 싸움 초기에 34군의 43사와 44사 모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군장 왕건원은 치료를 받으러 분하 이북으로 돌아갔다. 왕봉산은 위험한 시기에 명령에 좇아 대리군장을 맡고 45사를 거느리고 만천, 영하 일대를 종횡무진하면서 적들과 전투를 계속했다. 6월, 일본군 1000여명이 땅크 7대를 앞세우고 45사 사단지휘부 및 제2퇀을 서장옹촌에 포위했다. 왕봉산은 부대를 거느리고 진지를 굳게 지키며 적들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오후가 되자 적들은 또 2000여명 병력을 투입했다. 적아 쌍방의 병력 차이가 심한 상황에서 왕봉산은 침착하게 지휘하면서 절대 물러서려 하지 않았으며 예비부대를 거느리고 전선으로 돌진해 적과 가까운 거리에서 싸웠다. 전투 과정에서 왕봉산은 팔에 부상을 입었으나 여전히 지휘를 견지했으며 후에는 가슴에 련속 총탄 여러발을 맞아 창자가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아픔을 참고 배를 그러안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희생될 때 나이는 36살이였다.

왕봉산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국민정부는 왕봉산에게 륙군 중장 칭호를 추서하였다. 1986년, 민정부는 증서를 발급하여 왕봉산을 혁명렬사로 확인하였고 2014년 9월 왕봉산에게 항일영웅렬사 칭호를 수여하였다. 2015년 9월 3일, 항일전쟁승리 70돐 기념 열병식에서 왕봉산의 아들 왕술지가 영웅렬사 자녀들을 대표해 검열을 받았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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