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김문철과 부인 도개손
김문철은 1929년 2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를 찾은 후 상해에서 혁명활동에 띄여드는 한편 수차 조선에 파견되여 활동했다.

2019-09-09 09:03:21

①김문철, 원명 김찬.(출처: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김문철의 아버지 김병순. (출처: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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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30년대 간악한 일제놈들과 싸우며 혁명활동을 벌린 이 땅의 조선족혁명가들 가운데는 한때 중공할빈시위 서기를 지내다가 후에 연안에서 강생한테 살해된 이름난 혁명가 김문철이 있다. 그의 안해이고 이름난 녀성혁명가인 도개손도 연안에서 강생에게 함께 살해되였다. 혁명가 부부인 김문철의 녀동생 김순경과 남편 장문렬도 모스크바에서 강생 등에게 살해되였다. 김문철-이들 저명한 혁명가 부부와 녀동생 부부를 우리 조선족들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김문철(金文哲, 1911-1939)은 평안북도 진남포(镇南浦) 태생이다. 본명이 김찬(金灿)이고 후에 혁명활동에 참가하면서 김만성(金满成), 장문철(张文哲), 김철(金哲)로도 통하였다. 아버지 김병순(金炳恂)은 진남포 갑부이고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슬하에 큰아들 환(煥·1890년생), 둘째아들 우경(又卿·1896년생), 큰딸 일경(日卿), 막내 아들 찬(燦), 막내딸 순경(順卿) 등 5남매를 두었다.

김문철의 아버지 김병순은 3.1운동에 참가했고, 독립운동 자금을 대다가 일제의 체포를 피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1921년에 중국 북평 통현에 이주한 뒤 중국적에 가입하였다. 김병순이 북평 통현행을 단행한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그 시절 북평 통주에는 조선사람으로서는 가장 먼저 정착한 김기창과 그의 가족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김기창은 이름난 혁명가 김성호, 즉 주문빈의 아버지로서 항일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4년 봄에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통주 복흥장으로 이주한 후 닭과 젖소를 기르고 포도를 심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더불어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을 도와주는 북평과 그 주변의 실제적 후원자였다. 그런 김기창을 김병순은 조선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김병순의 둘째아들 김우경이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북평과 통주 등지에 정착해 이미 나름의 사업을 벌리고 있었다.

1921년 그해 김문철 일가족이 아버지를 따라 북평 통주로 이주할 때 문철은 겨우 11살 어린아이, 그는 먼저 통현(通县)의 로하소학교에서 공부하고 1928년에 로하중학교(潞河中学)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하학교는 미국 공리회 전교사(传教士) 강대덕(江戴德) 부부가 1867년 12월에 전교활동을 하는 한편 세운 로하남숙(潞河男塾)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학생은 10여명으로서  모두가 공리회(公理会)에 입교한 가난한 집 자식들이였다. 그러던 로하남숙이 점차 규모가 상당한 미국교회학교ㅡ로하소학교와 중학교로 발전하였으니 그 시절 구 중국에서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립로하중학교는 오늘의 통현제1중학교로서 북경에서 동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학교는 김문철로 말하면 혁명의 걸음마를 떼면서 공청단에 가입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중학교로서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 인연 가운데서도 김문철을 혁명에로 이끌어 준 이들이 있으니 그분들은 1927년에 통현에서의 첫 중국공산당 지부를 로하중학교에 세운 조선족 김성호(金成镐, 즉 周文彬)와 그의 형 김영호였다.

③1928년 북평 로하중학교 시절의 김문철 모습.

2

김성호는 1908년에 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에서 김기창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반일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교양과 왜놈들에게 피살된 큰형 김승호의 반일사상의 영향을 받아 어린 성호의 가슴 속에서는 반일사상이 움텄다. 그 시절의 성호는 1914년 봄에 부모를 따라 북경시 통주(오늘의 통현) 복흥장에 이주하여 1916년에 통현 사립로하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21년에 사립로하중학교에 들어갔다.

김성호의 고중 2학년 시절이면 1926년이였다. 때는 국공합작시기여서 기세드높이 일어난 북벌전쟁과 사회주의사상은 금방 만 18살을 잡은 김성호를 지대히 고무하였다. 이해 김성호는 반내의 진보적인 학생들로 통현일대의 첫 ‘사회주의과학학습소조’를 조직하고 북경시 지하당조직과 련계를 가지였다. 이해 김성호는 또 둘째형 김영호의 영향하에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둘째형과 함께 학교에다 조선인학생들을 골간으로 한 청년단조직을 내왔다. 뒤미처 이 청년단조직의 성원 5명이 모두 첫패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통주에서의 첫 중국공산당지부-로하중학교당지부를 내왔다.

로하중학교 당지부서기 겸 당소조장은 김성호가 맡아 나섰다. 1928년 그해 김문철은 통현 로하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김성호와 그의 형 김영호의 혁명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였다. 그들은 모두 조선에서 이주하면서 통현에 자리잡은 이주민들이고 잘 아는 사이로서 서로 호흡이 통하였다. 관련 자료를 펼치면 1921년부터 1928년을 전후한 시기 로하중학교에는 40여명의 조선인 청년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지만 김문철이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보다 세살 선배인 김성호였다. 김성호의 영향하에 김문철은 먼저 공청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점차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로하중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이면 1929년. 이해 김문철은 아직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19살의 중학생이였다. 김문철 연구자료에 따르면 김문철은 김성호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28년 가을 이후 김성호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북경시 지하당기관에서 당의 비밀사업에 종사하면서 연경대학과 보인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공당원들을 지도할 때 김문철은 표면으로 독일류학을 하겠다면서 서둘렀다.

왜서일가, 북평 로하중학교 시절의 김문철을 돌아가보기로 하자.

여기에 후일 김문철의 아들로 태여난 김연상의 회고자료 한편이 있다. 회고자료에서 김연상은 “부친은 예술, 사진 등을 좋아해 독일제 라이카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단파 라지오를 만들어 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손기술이 좋았다.”고 말하였다.

이런 손재간은 김문철을 리과공부에 흥미를 가지도록 하였다. 중학교를 마친 후 리과공부를 어디에서 할가, 김문철은 독일류학을 선택하였다고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은 말하고 있다. 또 그런 막내동생을 둘째 형 김우경이 받들어 나서면서 독일류학을 강력히 추천하기에 이르렀다고 하고 물론 아버지 김병순도 전적인 지지였다. 1929년 통주 로하중학교를 졸업한 김문철은 그해 2월,  독일류학을 준비하면서 북평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된다.


3

그러나 김문철의 독일류학준비는 표면위장이였다. 표면을 뚫고 내면을 보면 김문철은 북평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상해로 가는 길이였다. 상해에 이른 김문철은 먼저 프랑스조계지내 복흥공원을 찾았다. 복흥공원은 1909년 6월, 그 시절 프랑스조계지 공동국(公董局)에 의해 건설된 공원으로서 현재 유일하게 프랑스 고전식풍격을 가진 원림으로 알려진다. 지난 20세기 20년대 상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은 프랑스조계지 내에 있는 복흥공원을 잘 리용하군 하였다.

복흥공원은 오늘의 상해 황포구내 회해중로 안당로(淮海中路雁荡路) 105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상해에 이른 김문철은 아침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복흥공원에 이르렀다.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는 척 하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손님을 맞기위한 사전약속이였다. 이윽고 자전거를 탄 운동복 차림의 한 로인이 다가오더니 말을 걸어 왔다.

“북평에서 오셨어요?”

“네에, 마중 나온 분이예요?”

로인이 조선말을 건네자 김문철은 일어나 반갑게 알은 체하면서 로인의 두손을 꼬옥 잡았다. 사전암호가 알려졌다.

“김문철입니다!”

“반갑습니다!”

서로의 뜨거운 인사가 오고가고 그들은 천천히 자리를 옮기였다. 김문철은 그렇게 다시 한 구역으로 옮기였으니, 그 구역은 그 시절 상해 포석루 128번지(蒲石楼128号), 오늘의 황포구 장락로(长乐路) 128번지였다. 그제날 포석루 128번지는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法南区)지부 책임자 려운형의 주숙지요, 지부 사무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김문철이 로인을 따라 포석루 128번지 2층에 이르자 상해조선인지부의 실무자 김형선(金炯善, 1904ㅡ1950)이 뜨겁게 맞아 주었다. 김형선은 경상남도 마산 출신이고 조선공산당 출신의 혁명가로서 1926년 8월 이른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남녘땅 광주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상해에 온 터였다. 원 조선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가 국제공산당 원동국의 명령으로 1927년 9월에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자 김형선은 신생한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의 한 책임자로 활동하게 되였다.

김형선의 실제책임은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가 지도하는 산하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상해 한인청년회를 개편한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 등 외곽단체를 지도하고 이끄는 일이였다. 김문철은 황포구 포석루 128번지 2층집에서 김형선을 만난 후 한동안 상해에 머무르게 되며 상해조선인지부의 파견으로 서울, 평양에 가서 활동함을 보인다.


4

지난  2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 두달간 상해에 체류한 적 있다. 그 기간 옛날의 황포구 포석루 128번지를 찾은 적이 있으니 그날은 3월 3일이였다. 안해와 아들애까지 일가 셋이 물어물어 오늘의 황포구 장락로 128번지를 찾으니 유감스럽게도 128번지를 이루는 장락로 짝수 구간은 오래 전에 광장공원으로 되여있었다.

“짝수 쪽 옛 민가들은 30~40년 전에 전부 파가이주되였습니다.”

“30~40년 전에요?”

“틀림이 없습니다!”

문가에 나온 홀수 쪽 60대 분과의 문답. 결과는 포석루 128번지를 이루었던 짝수 쪽 옛집들이 모두 력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짝수 쪽 옛집구간들에 자라난 아름드리 뭇나무들은 이곳 파가이주가 어언 30~40년 전의 일이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유감스러웠지만 위안과 기쁨도 없지 않았다. 이 땅의 조선족으로선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 옛터를 처음으로 찾아보았다는 것이 위안이고 기쁨이라 할가. 어찌하든 후일의 조선인 홍군장령 무정과 장세걸이 활동했고, 후일의 홍군음악가 최음파가 활동했고, 조선인혁명가 김문철 등이 활동했던 력사의 고장이여서 감회가 새로웠다.

김문철은 1929년 2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를 찾은 후 상해에서 혁명활동에 뛰여드는 한편 수차 조선에 파견되여 활동했다. 그 시기는 1929년부터 1931년 사이이다. 김문철이 조선 국내로 다시 파견된 것은 1931년 1월, 그 시절 김문철이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의 활동모습은 그 시절의 동아일보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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