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김문철과 부인 도개손
《소년진리보》는 공청단강소성위에서 꾸리는 신문으로서 발행량이 1000여부에 이른다. 도개손과 김문철은 상급의 지도가 없는 형편에서 《소년진리보》를 편집하여야 했다.

2019-09-16 10:05:30

1934년 10월 출옥 직후 김문철 모습. (출처: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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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앞선 1933년 6월 2일자 《동아일보》는 2면 기사 <조선당 재건을 획책한 공산주의 3거두 래력(來歷)과 그 활동경로>에서 홍남표, 조봉암, 김찬 세 사람의 사진을 박으면서 김찬이라고 불리운 김문철의 국내에서의 행적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중대한 사명을 띠고 북평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다가 붙잡힌 김찬은 어려서 부모와 함께 북평에 가서 살다가 상해에 가서 중국공산당원 김형선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받아 협력해서 조선안에 들어와 동지를 다수히 획득하는 동시에 장차 조선내에 ○○○○○○를 건설할 것을 약정하고 소화 6년 1월에 조선에 잠입하여 동지를 다수히 획득하엿다.

진남포와 평양에서 농민조합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엿으며 여자 당원의 획득도 꾀하엿섯다. 그 후 6월에 김찬은 평양에 ‘콘스타’ 회사에 들어가 활동하고 동년 12월에는 안종각을 통하야 숭실학교를 중심으로 학생층에 잠입을 꾀하고 7년 4월에 경성에 들어와 김형선을 밀회하야 5월 1일 ‘메이데이’를 앞두고 격문 3백매와 ‘콤뮤니스트’ 20부를 가지고 평양에 돌아가 평남(平南) 평양 등 78고무공장에 와 소야전(小野田) 세멘트, 삼성광업소 등에 각각 격문화 팜풀레트를 발송하고 동시에 학생들에게도 역시 팜풀레트와 격문을 반포햇섯든 것이라 한다.

그러다가 다시 북평에 건너가 많은 군자금을 손에 쥐고 안동을 경유하여 국경을 넘어 들어오려다가 선천(宣川) 모 여관에서 9월 15일에 평북경북경찰에 체포된 것이라 한다.


사실 김문철은 1931년 1월 조선의 고향 진남포에 다시 파견되니 고향을 떠난 지 꼭 10년 만이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가 본 고향은 공장굴뚝은 수없이 많아진편이라지만 어떤 공장들은 가동을 멈춘 지 오래되여 스산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길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나 말이 아니였다.

10년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도 보이였으니 고향땅으로는 평원선 렬차가 새로 달리는가 하면 진남표 외곽에는 철도를 확장하는 공사가 강행되고 있었다. 나라와 백성들은 경제 대공황으로 허덕이여도 철도는 철도 대로 늘어만 가니 일제놈들의 수탈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김문철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였다.

1932년 5월 이후 김문철은 중국으로 돌아와 상해와 북평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9월 11일에 다시 조선 국내로 잠입하였다. 며칠 후에 평북 선천에서 일제 경찰놈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였다. 여기 체포과정이 그 시절 평북경찰서의 관련 자료에서 나오고 있다.

1933년 김문철 투옥사진.
김문철과 부인 도개손(출처: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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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시각은 1932년 9월 20일 오후 2시경. 이날 김문철은 다른 한 동지와 사이두고 흰 털의 조선말을 타고 마부와 더불어 평북 선천군 심천면 고군영주재소(宣川郡沈川面古军营驻在所) 앞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박씨로 가장한 김문철이였다. 그럴 때 고군영주재소 순사가 그들을 불러세우고 주재소에서 신원조사를 들이댔다.

“나는 정주군 곽산의 박창근이다. 장사일로 신의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김문철은 한마디로 잡아뗐다. 그래도 순사 놈들은 여러 취조자료를 통해 박창근이라는 이 사람이 바로 김찬, 즉 김문철임을 알아냈다. 평북경찰서에 넘어간 후 적들은 김문철 본인과 김문철의 상급 김형선과의 관계 등을 이미 관련 체포자들의 공술과 여러 증거품을 통해 잘 알고 있기에 김문철 취조가 비교적 쉬우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아니였다. 김찬으로 불리운 김문철은 서울에서의 김형선과의 련락사실, 메이데이 전후 평양을 중심으로 한 활동 등 전부를 부인하여 나섰다. 첫 취조부터 밀박아 모르쇠를 들이댔다. 경찰서 놈들은 평북 선천에서 숙박하던 려인숙의 주인을 불러다가 대질심문을 들이대도 허사였다. 적들은 이같이 모든 것을 부인하는 공산당 사람은 처음 본다고 아우성이였다.

검거 후 고문과 심문의 거듭 속에서 그렇게 40여일이 지나도록 일체 모르쇠였다. 검거 45일 만인 1932년 10월 25일에야 김문철은 자기의 항일활동을 시인하여 나섰다. 심문자들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투옥자들치고 검거 45일 만에 입을 여는 현상은 류례가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공산당치고도 악질적인 공산당이라는 적들이였다.

이듬해 1933년 1월 30일 김문철은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압록강가 신의주형무소 검사국에 이감되였다. 1933년 9월 25일에는 일제측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을 받았다. 그해 11월 18일 징역 2년에 구형되고 12월 27일에는 징역 1년 6개월에 선고되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적들의 심문과 공판, 옥살이에서의 김문철은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는 견결한 혁명가로 등장했다.

1934년 10월, 김문철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곧추 북평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신의주형무소에서 풀려나오니 김문철은 체포 전 그의 지도자가 적들에게 체포된 데서 조직관계가 끊어진 난감한 현실에 부딪친다. 그럴 때 김문철은 북평에서 금방 배만녀중(贝满女中)에 입학한 조카  김영애(金英爱,즉 徐彦)를 통해 중국인 녀성혁명가 도개손이 상해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김문철과 도개손은 1930년-1931년경 북평에서 활동할 때 서로 알게 된 미더운 동지 사이, 련인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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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개손(陶凯孙)은 강소 무석사람,  1912년 3월 15일 일본 도꾜에서 출생했다. 항렬에서 아홉째이고 1918년 무석 제양(济阳)소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도개손의 아버지 도념균(陶念钧)은 청나라(清朝) 말기의 개화사상가로 일본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명문가였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 여럿을 일본에서 키웠고 대부분 중국 청화대, 북경대는 물론 딸을 미국에 류학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도개손은 1925년에 다섯째 언니 도우경(陶虞卿)과 같이 북평에 가 공덕(孔德)학교에 다니였다. 1927년 16살 때 도개손은 공덕학교 동반동창인  전삼강(钱三强, 후날 중국의 저명한 과학가인 소흥사람), 탁려(卓励) 등 셋이서 북경대학 예과에 시험쳐 합격되고 후에 북경대학 지질학부로 넘어갔다.

9.18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 도개손은 근 200명 북경대학 학생들과 함께 남경으로의 남하시위에 참가하여 이름을 떨치였다. 북경대학 학생들의 남하시위 후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분분히 남경에 가 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전국이 항일고조로 부글부글 끓었다. 중앙교육부에서는 별수 없이 명령을 내려 전국의 대학, 중학교들이 앞당겨 겨울방학을 하도록 하였다.

1932년 7월, 도개손은 공청단북평시위 선전부장으로 되여 직업혁명가 생애를 시작하였다. 1932년말에는 공청단천진시위 부녀부장으로, 1933년 봄에는 북평시공청단시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얼마 후 중공중앙은 상해에서 활동하는 공청단중앙국이 파괴된 데 대비하여 화북에서 한패의 사람들을 뽑아 상해 공청단중앙국을 회복하도록 하였는데 도개손은 그렇게 상해로 파견되여 공청단중앙 순시원으로 활동하다가 공청단강소성위 선전부장으로 부임하였다.

김문철은 혁명가로 활동하는 조카 김영애에게서 도개손의 행방을 알게 된 후 주저없이 상해로 달려갔다. 때는 1934년 가을. 김문철은 먼저 공청단중앙에서 활동하는 녀동생 김순경과 련계를 가지면서 공청단조직을 찾게 되였다. 그때 공청단강소성위 서기 정정부(郑征夫)는 김문철에게 선전부장인 도개손과 같이 숙박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중공강소성위 서기는 동의하지 않았다. 한데서 김문철과 도개손은 서로 떨어지고 같이 숙박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성당위 서기는 김문철에게 《소년진리보》를 편집하라고 하니 괜찮은편이였다. 이와는 달리 새로 공청단중앙 서기로 부임한 왕문덕(王文德)은 김문철을 믿지 않으면서 《소년진리보》를 편집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지정된 방에서 마음대로 떠나지도 못하게 했다.

1935년 7월에 공청단중앙은 재차 파괴당하고 왕문덕은 체포되여 변절하였다. 공청단중앙 조직부장 장신달(张信达)과 공청단중앙 교통원 유서원(俞西远)도 체포되여 단중앙에는 선전부장 갈부(戈夫)만이 남았다. 이때 도개손은 임신하여 건강이 형편없이 못해갔고 혁명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김문철과 도개손이 결혼하고 부부를 맺은 것은 1935년의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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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2월 7일에 도개손은 아들 김연상(金燕祥)을 낳았다. 첫아이였다. 그 후 1936년 1월, 도개손은 북평 공덕학교 시절의 한학급 동창이고 그때 진단대학(震旦大学)에서 공부하던 리지중(李志中)을 입단시키고 자기와 김문철, 리지중 셋이 《소년진리보》를 책임지고 꾸리였다. 《소년진리보》 (少年真理报)는 공청단강소성위에서 꾸리는 신문으로서 발행량이 1000여부에 이른다. 도개손과 김문철은 상급의 지도가 없는 형편에서 《소년진리보》를 편집하여야 했다.

김문철 부부는 《소년진리보》의 주요한 소식근원을 《구국시보》(救国时报)에 두었다. 《구국시보》는 중국공산당이 프랑스 빠리에서 출판하는 중문신문으로서 이 신문에서 당의 문건 정신과 투쟁정세를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백방으로 프랑스 조계지 안남(安南)에 가 특무들의 주의를 따돌리면서 《구국시보》를 가져왔고 《구국시보》 접수지점을 늘 바꾸었다.

그들은 《구국시보》에 따라 당의 로선, 정책을 리해하면서 국내 신문의 반면소식에 따라 국내 정세를 판단하고는 《소년진리보》에 글을 썼다. 1935년 당의 ‘8.1선언’에 따라 공청단중앙에서 결정을 지은, 백색구역에서 조직을 개방하며 공청단을 항일구국청년단으로 개변하는 선언도 모두 《구국시보》에 의한 것이였다. 김문철 부부는 또 《구국시보》의 일부 글들을 단독으로 문건으로 만들어서는 내부자료로 돌려보도록 하였다.

그들은 영국 조계지에 숙박하면서 도개손이 편집하고 김문철이 글을  썼다. 생활은 리지중이 맡아보고 판프리트 인쇄는 사천사람 류요신(刘耀新) 부부가 맡아 보았다. 후에 김문철부부는 상해를 떠났다가 1936년 9월에 김문철이 북평으로부터 상해로 다시 와서 사업 관련상 뒤처리를 하였다. 김문철은 상해에서 약 한달 머무른 다음 10월에 북평으로 돌아가면서 신변의 동지들과 “이후 전선에서 만나자!”며 작별인사를 남기였다.

김문철 부부의 북평행은 사실 만주행이였다. 만주행은 김문철의 녀동생 김순경(1913년-1936년)과 관계되였다. 김순경과 그의 남편 장문렬(1911년-1936년)은 흑룡강 할빈에서 활동하면서 중공만주성위에서 사업하고 있었다.

1935년 4월-6월 그 시절 도개손은 유서원을 통해 림시공청단중앙과 련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도개손은 심봉금(沈凤琴,  즉 孙维华)와 같이 숙박하고 있었다. 1935년 3월-7월간 림시 공청단중앙 교통원을 맡은 유서원은 김문철 부부의 만주행을 두고 이렇게 회고하였다.

“상급에서 나에게 일부 문건을 주면서 내가 베낀 다음 도개손에게 주라고 하였다. 모두 만주사업에 관한 당의 관련 기밀문건이였다. 그중 당중앙이 만주사업에 대한 지시와 결정, 만주성위에서 당중앙에 드리는 보고 및 만주정세에 대한 분석 등등이 들어있었다. 이런 문건들을 어찌하여 도개손에게 주어야 하는가를 령도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도개손도 문건을 받은 후 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도개손도 만주로 파견된다고 보았다.”

확실히 도개손은 만주로 가게 되였다. 그러나 조직관계가 끊어져 만주로 인차 가지 못하고 계속 상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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