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김문철과 부인 도개손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54

2019-09-23 09:04:23

연안에 도착한 후 김문철은 장문철이라는 가명으로 섬북공학 제1기 제2대대에 들어가 학습하고 도개손은 전극민이라는 가명으로 중앙당학교 제12반에 들어가 학습하였다.

김문철, 도개손 부부가 어린 아들 김연상을 안고. 부부가 함께 있는 사진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사진.(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제공)

9

1935년 11월 김순경은 할빈에서 상해에 이르러 상해의 당중앙을 찾았으나 성사하지 못하고 도개손을 만났다. 1936년 1월 김순경은 도개손의 아들애를 북평에 데리고 가서 김문철의 둘째 아주머니 리석경(李皙卿)에게 부탁하였다. 김순경은 2월에 할빈으로 돌아가 장문렬에게 도개손의 정보를 알리였다. 그들은 도개손이 광서, 광동, 사천, 산동, 하북 등지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장문렬은 그들에게 통신처를 전하였다.

도개손은 드디여 만주성위와 련계를 가지였다. 도개손은 만주성위에 자기들 관계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장문렬은 그들이 오는 바를 똑똑히 해야 하고 보고를 부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 두분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해 쪽과는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또, 꼬리를 달고오지 못합니다. 당신들이 와서 오는 바를 잘 알리여야 관계를 넘길 수 있습니다.”

김문철과 도개손이 비밀조직선을 따라 할빈에 가니 만주성위 지도부가 교체되고 있었다. 그때 만주성위 서기대리는 장문렬인데 장문렬을 쇼리(小李)라고도 하였다. 사실 장문렬은 당조직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서기대리가 아니라 성위 서기가 모스크바에 불리워간 형편에서 잠시 성위 사업을 주관하고 있었다.

장문렬은 산서 사람이고 집이 부유하였다. 아버지 장수치(张树帜, 1881ㅡ1946)는 신해혁명 때 동맹회 회원이고 1928년 북벌전쟁 시절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집법총감(第三集团军执法总监)으로서 1931년에 이미 진수군사정리위원회 중장 상무위원(晋绥军事整理委员会中将常务 委员)을 맡고있었다. 국민당 중장이란 말이다.

장수치께 선후로  안해 넷에게서 낳은 아들딸 11명이 있었으니 장문렬은 장수치의 둘째아들이였다. 이 같은 아버지의 슬하에서 장문렬은 북평의 란지(兰池)학교를 졸업하고 이름난 통현 로하(通县潞河中学)중학에 입학하여 중공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장수치는 당시 북평에서 륙군대학을 다녔는데 그는 둘째의 혁명적 언행을 때때로 듣지만 간섭하지 않았다.

1933년, 장문렬은 상해복단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지하혁명조직의 활동에 열성을 다하며 통현 로하중학시절 알게 된 김문철의 녀동생 김순경과 열연에 빠져버렸다. 이듬해 10월에 장문렬은 국민당 군통특무한테 잡히였다. 장수치는 즉시 남경에 가서 공상희(孔祥熙) 등을 찾아 도움을 청하는 한편 거금을 들여 상해의 청방두목 두월생(青帮大亨杜月笙)을 통해서 군통과 법원의 문을 두드린 덕에 아들 장문렬은 가벼운 옥외보석 판결을 받게 되였다.

장수치는 문렬을 데리고 태원의 집에 돌아와 반년이 넘게 있으면서 《삼민주의》, 《건국방침》 등 책을 읽게 하였지만 아들은 그런  책에는 마음이 없다. 1935년 가을에는 상해에 가서 조선 미혼처를 데려다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장수치는 그저 동의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때를 두고 장수치는 생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나는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속으로는, 이것은 그 애의 구실로서 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애가 내가 읽으라는 몇가지 책을 읽고나서도 아주 랭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때 그더러 자기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도록 하려고 마음 굳혔습니다. 아무리 막아봤자 소용 없으니까요.”


환한 모습의 김문철.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제공)

10

장수치는 이같이 국민당의 중장장군이면서도 일생 동안 나라를 사랑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증오한 항일장령이며 자식들을 자기가 선택한 주의와 길을 따라가게 한 현명한 아버지였다. 장문렬은 이런 아버지가 있음으로 하여 북평 로하중학교를 다니며 조선사람 김문철과 동창이였고  1933년-1934년 사이 상해의 공청단중앙에서 선전공작과 공청단강소성위 선전부장을, 1934년 11월에는 상해에서 만주성위로 전근하면서 공청단만주성위 서기로 부임할 수 있었다.

장문렬이 1934년 11월 상해에서 만주로 간 후 상해의 당단 수뇌기관이 대파괴를 당하였다. 국제공산당 중국대표는 장문렬을 의심하게 되였다. 후에 만주당조직이 또 파괴를 당하니 모스크바 국제공산당 중공대표단은 만주성위 (할빈시위 포괄)에 내부간첩이 있다고 보았다. 한데서 중공만주성위 서기 림전암(林电岩)과 그 후임 양광화를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심사를 벌리였다.

1935년 1월 만주성위 서기 양광화(杨光华)가 모스크바로 소환된 후 장문렬이 중공만주성위 서기대리로 나섰다. 이어 강생(康生)은 한수괴(韩守魁)를 할빈에 보내 만주성위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만주성위 인원들을 계속 쏘련에 보내 심사하도록 하였다.

김문철과 도개손은 1936년 5월 25일 새벽에 렬차로 할빈에 도착하여 장문렬을 만났다. 김문철은 중공할빈시위 서기로, 도개손은 중공할빈시위 선전부장을 맡아보았다. 6월 상순에는 김순경의 안내하에 한수괴와 대면을 가지였다. 김문철 부부는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철도와 공장, 학교 등지를 찾아 당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던중 반역자의 밀고로 할빈 ‘6.13’사건이 터지면서 할빈시위 조직부 책임자 장경문(张敬文) 등 52명이 체포되고 당조직이 엄중한 파괴를 입었다. 이 사건은 북만 전역에 파급되여갔다. 할빈에 간 지 얼마 안되는 김문철 부부의 처지는 매우 위태로왔다.  그들 부부는 만주성위 대표 장문렬의 비준으로 6.13사변  나흘째 되던 6월 17일 할빈을 떠나 북평으로 가고 북평민선대(北平民先队) 지도사업에 나섰다.

장문렬과 김순경도 모스크바 국제공산당 중공대표단의 소환을 받았다. 그들은 사업관계로 쏘련행 시간을 늦추다가 1936년 7월 1일 두살배기 딸애 해라(海拉)를 데리고 만주리(满洲里)를 거쳐 쏘련행에  올랐다. 그에 앞서 할빈을 떠날 때 한수괴의 집에서 하루밤을 지우면서 한수괴가 작별식사를 마련하였다.

한수괴는 장문렬의 내부간첩문제는 허위라고 하면서 조직에서 인차 가려줄 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장문렬 부부는 모스크바로 가서 강생 등에 의해 인차 처결되고 만다. 장문렬은 그해 26살이고 김순경은 24살이였다. 그들이 할빈을 떠난 다음 한수괴는 적에게 체포되고 변절자로 되고 말았다.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은 큰어머니 리석경씨가 키우고, 딸 김소나는 큰이모 도위손이 키웠다.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제공)

11

1936년 9월 김문철 부부는 북평 통주의 김문철 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그들 부부가 북경에 간 것은 조카 김영애를 통해 조직선을 찾기 위해서였다. 초중에 다니는 김영애는 ‘민선’, 즉 중화민족해방선봉대에 참가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조카의 관계로 김찬부부는 민선의 사람들을 알고 민선에서 활동하게 되였다.

현실로 돌아오면 김문철의 아버지는 중국에 이사한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고 둘째아들 김우경를 도와 의사노릇을 하여서야 온 가족의 생계를 도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김우경은 남지자 대가(南池子大街) 남구로(南口路) 동쪽에 의원을 꾸린 데서 온 가족이 의원 뒤의 사합원(四合院)에 주숙하였다.

도개손은 그의 아들 김연상을 만나 본 후 언니한테 보낸 편지에서 “아이가 귀엽게 잘 자라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기르게 하는 것이 아쉽다.”고 썼다.

그러나 도개손은 잘 몰랐다. 아들은 워낙 선천성 질환이있는 데다가 강남 겨울의 으스스한 찬 날씨에 상해의 정자간(亭子间)에서 잘 보살피지 못했고 찬 우유를 마시게 한 데서 아이의 설사가 그치지 않아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하였다. 김문철의 둘째 아주머니 리석경(李皙卿)이 자기의 전부의 사랑을 아이에게 몰부으며 정성스레 키운 데서 아이는 살아날 수 있었고 귀엽게 커갔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철은 둘째 아주머니네가 시름놓고 살아가도록 금어골목 서구로(金鱼胡同西口路) 북쪽에 있는 아시아(亚细亚)약방을 넘겨주고 경영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이 약방을 혁명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혁명활동중 김문철은  1936년 12월에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였지만 굴하지 않았다. 1937년 봄에 출옥하니 당조직과의 련계가 끊어졌다.

1936년 12월 21일, 도개손은 북평에서 두번째 아이 딸애ㅡ소나(苏娜)를 낳았다. 일본군이 북평을 점령하기 전야 일본군이 조선인청장년들을 마구잡이로 군대로 끌고가는 데서 김문철은 북평을 떠나 남하하게 되였다. 김문철의 아버지는 두번 다시 일본놈들 치하에서 살아가기 싫다면서 김문철네와 같이 남하길에 오른다. 그들은 이자 일곱달을 잡은 딸애를 안고 도개손의 고향 무석(无锡)으로 갔다.

무석에서 김문철 부부는 당지 항일구망(救亡)후원단 일에 발벗고 나섰다. 도개손의 집 대청에는 숱한 재봉기들이 놓이고 후원단에서 동원한 군중들이 한창 전선장병들 솜옷을 짓는다. 상해의 항일장병들을 지원하는 무석항일구망후원단 솜옷 짓기 장소로 리용되고 있었다.


12

1937년 8월 도개손은 무석에서 항일구망후원단(抗日救亡后援团) 일을 보는 진운하(陈云霞)와 화악(华萼)를 통해 남경팔로군판사처의 리극농(李克农)과 련계를 가지였다. 도개손은 리극농과 서로 익숙한 동지관계였다. 그해 9월에 김문철 부부는 리극농의 알선으로 딸애에 아버지 김병순까지 넷이서 연안행에 오르게 되였다. 동행하는 동지들이 여럿이였다. 김문철의 아버지 김병순은 장사까지 갔다가 고혈압으로 하여 북평으로 돌아서야 하였다.

서안에서 연안까지는 가경시(柯庆施)와 그의 부인 등 동지들이 길을 같이하였다. 연안에 도착한 후 김문철은 장문철이라는 가명으로 섬북공학(陕北公学) 제1기 제2대대에 들어가  학습하고 도개손은 전극민(田克敏)이라는 가명으로 중앙당학교 제12반에 들어가 학습하였다.

그러나 어찌 알았을가, 김문철은  연안에서 다시 입당하였지만 불운한 나날이 뒤를 이었다. 1937년말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중앙사회부(중앙보위국) 부장 겸 중앙당학교 교장을 맡은 강생(康生)은 김문철 부부는 나쁜 사람이고  ‘일본간첩’으로 몰았다. 그러던 1938년 1월, 김문철과  도개손(陶凯孙)을 무단체포하여버린다. 억울한 1년여 시간을 끌다가 1939년 3월에는 비밀리 처결을 감행하였다. 그때 김문철은 29세, 도개손은 28세였다.

김문철 부부의 어린 딸 소나는 그렇게 사랑하는 부모를 잃고 연안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런 소나를 큰이모인 도개손의 언니 도위손이 데려다 키우게 되였다. 아들 김연상은 계속 큰어머니(김문철의 둘째 아주머니 리석경) 슬하에서 자라게 되였다. 부자였던 김연상의 큰아버지(김문철의 둘째 형 김우경)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에게 살 만한 집 한채를 주어 따로 살게 하였다.

김연상의 큰어머니 리석경은 자기에게 속한 집을 세놓으면서 시동생의 아들 김연상을 키웠다. 큰어머니는 평양 출신으로서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니 세를 든 사람이 월세를 내지 못해도 변변한 말을 건네지 못하였다. 그러니 생활은 항상 어려움의 동반이였다. 다행히 도씨네는 잘사는 사람들이 많아 그럭저럭 도움을 받을 수는 있었다.

1982년 2월 13일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는 ‘도개손, 김문철 동지에 관한 재조사 결론’(关于陶凯孙、金文哲同志复查结论)내리면서 “두명의 동지는 당의 비밀사업 종사기간 당과 혁명을 위해 유익한 일을 했다. 장기적으로 억울하게 살아온 이들의 루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해준다.” (两同志在从事党的秘密工作期间,为党为革命做出了有益的工作。他们长期蒙受不白之冤,现应平反昭雪,恢复名誉。)고 밝혔다. 김문철 부부는 드디여 억울한 루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게 되였다.

2013년 5월, 절강 월수대 시절 필자는 북경에서 살고 있는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씨와 련락이 닿았다. 그는 북경에서 생활하고 있고 녀동생 소나는 심양에 거주한다고 했다. 수차 통화도 했고 메일도 오가면서 북경에서 취재를 가지기로 약속도 하여보았다. 하지만 대학교수중이여서 내내 미루다가 썩후에 다시 련락하니 련락이 닿지 않았다. 그렇게 필자는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씨와의 만남을 가지지 못한 평생 유감을 안게 되였다.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