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선전교양전선의 우수한 전사 양송

2019-09-25 13:57:52

대별산혁명로근거지에 자리잡은 호북성 대오현 사고진 동심촌에는 몇백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3중으로 복도가 련결된 천정식 벽돌나무건축물이 있는데 일년 사계절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리론가, 선전가와 혁명활동가인 양송의 생가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양송혁명사적진렬실문밖 광장의 높은 바위에는 모택동이 양송을 칭찬하는 “양송동지는 일을 참답게 처리하였고 책임심이 있었으며 우리는 마땅이 그를 기억하고 따라배워야 한다” 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양송 렬사

양송의 원명은 오소일이고 1907년 11월 호북성 대오현에서 태여났다. 1921년 진담추, 동필무 등이 창설한 무한중학에 들어갔다. 1926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27년 2월 단중앙의 파견을 받고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들어가 학습하였으며 같은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졸업후 학교에 남아 중산대학 정치경제학 교원과 로씨야어 번역을 겸직했다. 1928년 중국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에 참석했다. 1931년 1월 공청단중앙 위원으로 선거되고 뒤이어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의 파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태평양로동조합 중국부 주임직을 맡았다. 1933년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의 파견을 받고 만주문제 처리사업을 책임지고 동북지역 당의 령도사업에 참여했다.

1934년 중공길동국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면서 양송은 당조직의 요구에 따라 오평으로 개명하고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신분으로 귀국하여 동북에 가 중공길동특별위원회를 설립하고 특별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그해말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정치위원을 겸직했다.

1935년 7월부터 8월까지 양송은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 대표의 신분으로 모스크바에 가 공산국제 제7차 대표대회에 참석했다. 그사이 그는 《8.1선언》의 기초사업에 참가하고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에 동북에서의 당의 항일사업을 회보했으며 통일적인 동북항일련군을 창설할데 대한 건의를 제기했다. 양송 등 사람들의 추동하에 1936년 2월부터 당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혁명군과 기타 항일무장은 선후로 동북항일련군으로 개편되였다.

1938년 2월말, 양송은 모스크바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담임하고 중앙맑스-레닌주의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같은해 9월부터11월까지 그는 동북지역 지도간부와 항일련군 대표의 신분으로 중공중앙 확대된 6기 6차 전운회의 참석해 회의 비서를 담임하고 문건 기초사업에 참여했다.

1941년 3월, 중앙은 당의 력사에서 첫 대형일보이며 중공중앙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창간하기로 결정하고 양송이 제1임 편집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고도의 정치책임감과 분투정신으로 당중앙과 모택동의 지도하에 신문사 동지들과 함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당의 리론, 로선과 방침정책을 선전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으며 《해방일보》로 하여금 당이 중국혁명을 지도하는 중요한 무기로 되게 하였다. 번중한 사업과 간고한 투쟁환경에서 양송은 페결핵에 걸렸으며 결국 병세가 악화되여 불행하게도 1942년 11월 23일에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오현당사지방지판공실 부주임 왕빈은 “양송은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일생은 빛나는 일생이고 전투적인 일생이고 분발한 일생이였다. 당을 엄하게 관리하고 초심을 잊지 않는 오늘날 우리는 양송 일생의 사적을 회억하면서 그의 숭고한 풍격과 위대한 형상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였다. 그의 정신적인 형상은 짙푸른 소나무마냥 세월과 더불어 더욱더 위용이 있게 우뚝 솟아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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