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해 헌신한 ‘백마장군’ 팽웅

2019-09-29 15:20:19

강서성 영신현 혁명렬사기념관 항일전쟁시기 진렬구역에는 유명한 항일영웅렬사 팽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진속의 팽웅은 군복을 입고 청수한 얼굴에 강렬한 눈빛을 간직하고 있다. 매번 청명절이나 렬사기념일이 되면 당지 중소학생들은 혁명렬사기념관을 찾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혁명선렬을 기리곤 한다. 

팽웅은 원명이 팽문찬이고 1915년 영신현 고교루진 대원촌에서 태여났다. 1929년 홍군에 참가하여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193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일찍 홍군 반장, 패장, 련장, 영장을 력임했으며 중앙혁명근거지 력대 반‘포위토벌’과 장정에 참가했다. 섬북에 도착한 후 홍군 제1군단 제4사 참모장으로 되였다. 

팽웅 렬사

1937년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팽웅은 팔로군 제115사 제343려 제686퇀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부대를 거느리고 평형관전투에 참가했다. 후에 팔로군 로동지대 사령원, 로서군구 부사령원, 황하지대 사령원 등 직을 맡았다. 

1941년 5월, 팽웅은 신사군 제3사 참모장으로 되였다. 그는 군대의 군사자질 향상에 치중하였고 엄격한 군사훈련을 진행함과 동시에 또 장병들의 학습을 조직하고 군사리론을 연구하였다. 제3사는 또 군사연구편집위원회를 설립하고 전쟁, 전투준비, 전술 등과 관련한 군사서적을 전문적으로 수집하고 군사총서를 편성하였으며 참모처에서 륙속 발간하여 간부들의 학습재료로 삼았다. 1941년 9월, 제3사에서 편찬한 제1권 군사총서 《항일민족혁명전쟁의 전략문제》를 출판했다. 팽웅은 서문에서 군사리론과 혁명전쟁 실천을 밀접히 결부시킬 것을 요구했으며 리론만 추구하고 실천을 홀시하는 않는 사람은 ‘공중의 양옥’이고  “두번이나 세번 돌격해 몇번 싸우는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고 협소한 경험론자”라고 비판했다. 

1943년 봄, 팽웅과 제3사 제8려 려장 전수요 등은 연안으로 학습을 떠나게 되였다. 3월 16일, 그는 돛배를 타고 소북 염하구를 출발하여 황해를 따라 일본군이 엄밀하게 봉쇄하고 있는 련운항을 에돌아 산동을 겨쳐 연안으로 가려고 계획했다. 17일, 소사동 해면에서 일본군 경비정과 조우하게 되였는데 적들은 기관총, 소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몇번이나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팽웅은 간부와 전사들을 지휘하여 권총과 수류탄으로 용맹히 반격하였고 세차례나 적들의 경비정을 물리쳤다. 팽웅은 전투가운데서 불행하게도 적들의 총탄에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에 장렬히 희생되였다.     

팽웅, 전수요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이 연안에 전해지자 《해방일보》는 ‘신사군 모사 참모장 팽웅, 려장 전수요 동지 장렬히 순국’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팽웅이 희생된 후 유체는 강소성 감유현 항일산렬사릉원에 안장되였다. 

1943년 9월, 소북의 군민들은 팽웅, 전수요 등을 위한 추도회를 거행했다. 추도회에서 황극성은 “팽웅, 전수요 동지는 모두 우리 군의 우수한 청년 고급지휘관이고 당에 충실했으며 작전에서 단호하고 용감했으며 전쟁과 사업 경험이 모두 매우 풍부했다. 이번에 해상에서 적들을 만나 용감하게 작전을 지휘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는데 우리 군에 손실이 막대하다.”고 침통하게 말했다. 

영신현당위 사지판공실 주임 하란평은“팽웅렬사는 영신에서 태여나 항일구국을 위해 소북 감유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앞장서서 완강하게 싸우고 용감하게 희생된 렬사의 혁명정신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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